[신약 성경 다시 읽기] 거리두기 - 필레몬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삶의 많은 부분이 새롭게 사유되고 평가됩니다. 서점가에는 코로나19 사태로 빚어질 새로운 사회 현상과 삶의 방식에 대해 소개하는 책들이 쏟아집니다. 어떤 삶이 옳은가에 대한 정답을 찾는 책이 있는가 하면, 삶 자체가 본디 수많은 역경과 낯선 위기들로 채워진다는 자조섞인 전망을 담은 책들도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여전히 강조되고 있으나 답답함을 못 이겨 조금씩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켠이 짠해집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라는 철학책 속 명제가 일상의 거리로 뛰쳐 나온 듯 우리 모두는 삶에 대해 사유하고 나누고 또 질문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근대화 이후 사람 중심의 삶이 강조되면서 많은 것들이 ‘사람’을 기준으로 평가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자연과의 관계입니다. 자연을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개발하는 것을 두고 생태 공원 혹은 녹색성장이라 칭하는 역설까지 등장하게 되지요. 자연 그대로 두면 될 것을 굳이 건드려서 공원화하고 인위적으로 성장을 시켜야 하는지 도대체 모를 일입니다. 코로나19 사태를 사람들의 마구잡이식 문명화에 대한 자연의 공격으로 생각하는 투쟁적 논평도 있습니다. 이쯤되면 물어야 하지요. 사람이 언제부터 자연과 맞서고 있었는지, 사람이 언제부터 자연과 구별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필레몬서를 두고 펼쳐진 대개의 신학적 해석들 역시 ‘사람 중심’입니다. 종에서 형제로 받아들여지는 오네시모의 극적인 변화는 사람을 귀히 여겨야 한다는 그리스도적 형제애로 정리됩니다. 16절의 말씀은 단연 그 중심에 있습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 한때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데 필레몬은 초대받았습니다. 필레몬이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였을까요? 만약 필레몬이 바오로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그래서 바오로의 원의가 무참히 짓밟혔다면 필레몬이라는 편지가 정경 안에 남아 우리 손에 들려졌을까 싶네요. 필레몬서를 읽으면서 교회 공동체는 사람이 그 귀천에 따르지 아니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형제적 관계로 거듭나길 요구받아 왔습니다. 물론 그러해야겠지요. 다만, 도대체 ‘사랑하는 형제’가 어찌 되는 것인지, 마음만 먹으면 되는 것인지,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결심 하나면 모든 게 행복한 건지 되묻고 싶어집니다. 오네시모가 귀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바오로가 오네시모를 떠나 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람을 향하는 감정이 지나칠수록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바오로를 통해 엿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랑받는 형제’로 서로를 생각하는 건, 당연히 ‘사람 간’의 거리가 전제 될 때 가능합니다. 사람 간의 ‘거리’가 무시될 때 ‘사람’이라는 모호한 말마디는 제 안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어떻게 나한테…’,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이 모든 말들이 실은 ‘사람 중심’을 ‘자기 중심’으로 둔갑시키곤 합니다. 자신을 위하는 것이 곧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지독한 교만과 획일적 사고가 사람 사이를 지배합니다. 코로나19 사태에 제 건강과 안전이 불안해서인지, 아니면 마스크를 기다리다 지쳐서인지 ‘나도 사람이다!’라고 외치는 약국 주변의 거친 음성이 그 방증이겠지요. 오네시모를 귀히 여기는 데 몰두하면 바오로의 처지와 심정을 소홀히 여기게 되지요. 바오로의 입장에서 다시 16절로 돌아가 봅니다. 필레몬은 오네시모를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오네시모와 필레몬은 본디 같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오네시모와 바오로가 만나게 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주인인 필레몬에게 손해를 끼쳐서 도망왔을 것이라 추정되는 오네시모를 바오로는 제 몸같이 챙겼을 테지요.(18-19절) 바오로 곁에서 오네시모는 믿는 이로 거듭났고(10절) 바오로는 오네시모를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려 합니다. 오네시모는 필레몬에 앞서 바오로에게 먼저 귀한 사람이 었습니다. 바오로는 그 ‘귀함’을 놓아주려 합니다. 귀한 것에 사로잡히면 귀함의 종이 됩니다. 형제애를 강조하다보면 미움과 질투, 그리고 갈등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서운함을 종종 경험하지요.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이럴 수 있어?’라는 말은 실은 자신이 설정한 귀함의 정도에 상대가 무릎 꿇길 바라는 필요 이상의 집착을 보여줄 뿐입니다. 곁에 두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심정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12절) ‘심장’이라고 번역된 그리스말은 희생제물에 쓰이는 동물의 내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기관을 주로 언급할 때 사용한 ‘스플랑크나’라는 말마디를 의역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 심장과 같은 오네시모를 떠나보내는 바오로는 그 사람 중심이 아니라 사람과의 ‘거리’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형제애를 몸소 가다듬었습니다. 바오로는 수인으로서 필레몬서를 썼습니다.(1.9.13.22절) 바오로가 수인이 된 곳은 에페소나 카이사리아, 그리고 로마인데 아마 에페소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살아갔을 오네시모가 바오로를 쉽게 찾아볼 수 있으려면 지리적으로 가까운 에페소여야 했으니까요. 더군다나 필레몬서에 언급된 아피아 자매와 아르키포스, 그리고 필레몬 등은 콜로사이서에도 등장하는데, 콜로사이는 에페소에서 200km 떨어진 곳이었고 두 도시는 서로 왕래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콜로 4,17) 바오로는 에페소에 머문 56년경 필레몬서를 썼을 것입니다. 수인으로서 바오로는 갇혀서 고립되었으나 사람 사이의 거리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생각하는 사고의 여유 속에서 오네시모를 생각하고 필레몬을 배려했습니다. 거리는 사람을 제대로 보게 합니다. 쓸모없다고 여겨진 사람이 어딘가에서 놀랍게도 쓸모있는 이로 거듭나는 기적을 맛보게 하는 건 사람 사이의 거리가 유지될 때 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에페소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네시모가 에페소의 주교임을 밝힙니다. 오네시모는 에페소로 돌아갔고, 거기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중요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가 바오로의 흩어진 편지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오네시모가 주교가 되었고 바오로의 편지를 모아 들였다는 어떠한 객관적 증거는 없지요. 다만 그런 전설같은 이야기를 교회가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무리 하찮고 쓸모없다고 여겨진 사람일지라도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사랑은 그 사람을 너무나 쓸모있는 사람으로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오네시모’라는 이름은 ‘쓸모있다’라는 뜻을 품습니다) 귀한 건, 적당한 거리를 둘 때 그 중요함을 사유하고 존중하고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갈수록 사람이 우선인 세상에서 사람끼리의 거리는 제 삶과 공동체적 삶에 대한 건강한 사유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누군가 그러더군요. 하느님은 사람이 두 다리로 8시간 갈 수 있는 거리를 허락하셨는데, 비행기 만들고, 기차 만들고, 자동차 만들어서 가고픈 데 모조리 다 가게 되어서 이 꼴이 났다구요. 적당한 거리는 서로를 건강하게 합니다. 귀한 것을 떠나보내는 허전함은 사회적 관계의 풍성함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당위로 받아들여지는 요즘, 그 당위가 힘겨워지는 요즘, 다시 묻습니다. 오히려 ‘거리 두기’의 삶이 우리에게 진작에 필요한 것이 아니었냐구요. [월간빛, 2020년 6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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