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들과 오늘 우리] 듣고 말하기 예언과 예언자 신명기는 예언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언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였는데도 그 말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언자가 제멋대로 말한 것이다”(13,22). 이 구절을 통해 참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르는 기준이 예언의 실현 여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실현되지 않은 신탁들도 있다(참조: 예레 18,7-10: 에제 26,1-6; 29,17-20: 다니 11,40-45; 요나서 등). 따라서 참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구분은 예언의 실현 여부보다는 ‘예언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거짓 예언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전한 이들이었고, 참예언자는 하느님께 들은 말씀을 전한 이들이다. 성경의 예언은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맡기신 말씀이고, 미래의 사건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오늘을 성찰하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방향 제시이다. 여예언자들 성경에서 여예언자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아서인지 그들을 만나면 반갑다. 구약 시대에 활동한 여예언자는 미르얌(탈출 15,20), 드보라(판관 4-5장), 훌다(2열왕 22,13-20), 이사야의 아내(이사 8,3), 노아드야(느헤 6,14)로 다섯이다. 신약성경에서 명시적으로 예언자라 불리는 이는 한나(루카 2,36-38)뿐이다. 미르얌은 모세의 누이로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시대에 활동하였고, 드보라는 판관 시대에 예언자요 판관으로 활약하였다. 이사야는 자신의 아내 또한 예언자임을 암시하였고, 노아드야는 유배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 복구를 지휘한 느헤미야의 활동을 방해한 인물로 간략히 묘사된다. 이들과 달리 훌다의 예언 활동은 상세히 서술하고 비중 있게 다룬 것이 인상적이다. 훌다는 요시야 임금의 종교 개혁 시대에 등장한다. 대사제 힐키야는 성전을 보수하던 중 율법 두루마리를 발견하고, 서기관 사판이 그 두루마리를 요시야 임금에게 읽어 주게 하였다. 요시야는 사판이 낭독하는 율법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며 통곡했다(2열왕 22,3-13). 우상숭배에 빠진 조상들의 잘못으로 그들에게 주님의 진노가 타오르게 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 두루마리의 율법을 두고 하느님께 문의하려고 훌다에게 사절단을 보냈다(22,14). 남성 중심 사회인 유다에서 남자 예언자가 아닌 여자 예언자 훌다에게 하느님의 뜻을 문의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훌다가 두루마리의 권위를 인정하자, 요시야는 그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22,15-23,3). 이처럼 훌다는 하느님에게서 돌아선 백성에게 그분의 뜻을 전하고 바른길로 가도록 방향을 제시해 준 인물로 묘사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에 ‘훌다 문’이라 부르는 성전 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유다교에서 훌다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려 준다. 신약성경에서 필리포스의 네 딸에게 예언 능력이 있었다고 하지만(사도 21,9) 그들이 어떤 예언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루카 복음서에서 예언자로 불리는 한나 또한 그가 한 예언에 대해서 알려진 바 없다. 루카는 한나를 성전에서 오랫동안 단식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섬긴 여자로서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자 하느님께 감사드린 인물로 소개한다. 그때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맞았던 이는 한나 말고 시메온 예언자가 있었다. 그가 아기 예수님을 두고 마리아에게 한 말이 우리에게 전해진다(2,30-35 참조). 반면에 한나의 축복이나 예언은 남아 있지 않아 아쉽다. 루카는 다만 한나가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2,38)고 서술한다. 어쩌면 복음사가는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시메온과 한나 두 사람의 예언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시메온의 것만 상세히 전하고 한나의 예언은 간략하게 요약했을 법하다. 시메온의 예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첫째, 그들이 기다려 온 구원자, 속량자이시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받는 표징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하느님을 뜻을 전하실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인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최고의 예언자이시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전하는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과 나를 성찰하고 하느님께 돌아서라는 말씀을 선포하는 최고의 참예언자이시다. 정보 : 왜곡과 변형 몇 년 전 아동 학대로 의심받던 어린이집 교사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학대를 받았다는 원생의 친척이 맘카페에 글을 올리며 해당 어린이집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사건의 진위를 차분하게 알아보기 전에 카페의 글을 읽고 다수의 군중이 한 사람을 공격한 것이다. 이러한 집중포화 속에 어린이집 교사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산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공각기동대’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공각기동대’ 속 시대 배경은 2029년으로, 발달한 기술 문명을 바탕으로 전 세계가 전자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그러한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유독 눈길을 끄는 질문은 인간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 가운데 하나인 ‘기억’이 여전히 한 개인의 정체성의 지표로 남을 수 있는지이다. 발전된 과학기술 시대에는 인간 두뇌에 저장된 정보(기억)가 해킹되어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더는 나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영화 속 인간의 조건이 오늘 우리의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 머릿속은 끊임없이 온갖 정보로 채워지고, 우리는 다시 그 정보를 세상으로 실어 나른다. 기존의 오프라인 정보 이외에 거대하고 광활한 온라인 정보가 두뇌를 비집고 들어왔다가 다른 곳으로 나간다. 정보의 무차별폭격 속에서 나의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며, 그것을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듣고 말하기 넘쳐 나는 온갖 정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말해야 할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 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혼돈 속에 잠시 멈춰 서서 정보의 근원이 어디인지 묻고 살필 일이다. 예언자는 하느님 뜻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성찰하도록 도와주는 이다. 훌다가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우상숭배를 제거하는 종교 개혁에 기여했다면, 한나는 온 세상의 구원자를 알아보고 그분의 오심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기뻐하였다. 훌다와 한나. 그리고 최고의 예언자이신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지 않고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아우성 가운데서 나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진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식별이 요청되는 시절이다. * 강선남 헬레나 -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신약학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성경의 인물들」, 「교부들의 성경 주해, 탈출기-신명기」 등의 역서를 냈다. [경향잡지, 2020년 7월호, 강선남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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