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자는 죽은 후 저승에서 멀리 있는 아브라함을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사전에 본 관계는 아닐 것 같은데요? | 카테고리 | 성경 | ||
---|---|---|---|---|
작성자신희순 | 작성일2013-10-10 | 조회수668 | 추천수0 | 신고 |
---죽은 후 영혼이 머무는 곳----
1. 영혼은 그들의 존재가 육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육체적인 것들이 바로 영적인 것에 의해 다스려지도록 안배하셨고, 그로부터 그들의 관계가 유쾌하게 되고 어떤 점진적 단계가 형성된다. 이런 조화를 통해 보다 고상한 사물에 합당한 영혼이 할당되었다. 이런 방법 안에서 영혼에게도 그들의 장소(locus) 가 있다고 말한다. 보다 뛰어난 장소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천국(caelum)인바, 즉 우리가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인들이 천국에 머문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성에 완전한 참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영혼들은 찬란한 장소에 모이고, 악한 영혼들은 어두운 곳에 모이는 것이다. 2. 만일 고정시켜 잡아두지 않으면 육체가 그들의 (경중의) 성질에 따라서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밑으로 내려가기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육체로부터 매듭이 풀어진 영혼은, 만일 어떤 일시적 형벌이 연옥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곧바로 벌을 받으러 또는 상을 받으러 가게 될 것이다. 3. 영혼들이 상을 받고 있는 상태, 또는 벌을 받고 있는 상태가 변할 수 있다는 의미로서나, 또는 살아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 못하게 하는 고립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로서, 낙원이나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감각적인 육체와 더불어 결합되어 있어서 그 영혼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영혼들이 연옥에 있다면 하느님의 섭리를 따라서 사람들을 권고하거나 또는 중재 기도를 요청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거나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적에 속하는 것으로서 의로운 영혼들에게만 그들이 원할 때 가능한 것이다. 4.죽은 후의 평화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서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다. 첫번째로 그 평화를 누린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그러므로 " 아브라함 품에 " 라는 표현은 죽은 후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에로의 승천 이전에는 영광이 결여된 상태였고, 그것을 지옥의 변두리, 또는 림보(Limbus, 고성소)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제는 아브라함의 품과 림보가 동일하지 않다. 5. 림보는 지옥과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림보로부터 성조들이 나왔으며, 지옥으로부터 누구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시 림보가 지옥의 가장자리인 만큼 그곳에서 서로 만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의 형벌은 양에 있어서 동일할 수가 없다. 6. 같은 논리로 성조들의 림보와 유아들의 림보가 비록 장소가 동일할지는 몰라도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성조들은 영광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그곳에 있었고, 세레를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들은 그런 희망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7. 영혼의 거처는 그 영혼의 상태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거처는 다섯 군대가 있다. 그러므로 죽은 후 영혼의 거처는 다음 다섯 장소로 구분된다. 낙원(천국), 연옥, 지옥, 그리고 성조들의 림보, 그리고 유아들의 림보.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감각 능력 (potentia, sensitiva)----
1. 감각적 능력은 영혼과 결합된 육체의 소유물이다. 그러므로 육체가 소멸한 후 그 능력은 고유한 원리로서 근원적으로 영혼 안에 남는다. 왜냐하면 만일 영혼이 육체와 다시 결합하게 되면 이 능력은 다시 현실화되는 효럭으로서 영혼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2. 감각적 능력의 행위와 작용은 원근원(遠根源, radice remota) 안에서가 아니라면 육체와 분리된 영혼 안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3. 순수한 영적 존재인 악마들이 지옥의 질료적인 불에 의해 소통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그만큼 육체의 주체적 형상인 영혼들도 불에 의해 고통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악마들은 그들이 보고, 또 두려워하는 만큼 불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만일 영적인 존재인 그들에게 불이 어떤 해를 줄 수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그들은 불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은 하느님이 정의의 차원에서 사용하시는 보복의 도구이며, 이 도구는 근원적 작인(作因, agente principale)의 힘을 항상 전달하고 있다. 불은 그런 영적 존재들의 장소로 선택된 곳일 수 있고, 그렇게 자유를 강제로 속박하는 것일 수 있다. 불은 그런 방식으로 처벌하는 자연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성인들의 기도---- 1. 하느님의 본질 안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성인들은 비록 신적 본질을 본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바라볼지라도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복 (또는 행복)은 그 지복이 부여하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 하느님 안에서 성인들은 우리가 그들을 향하여 드리는 신심, 서원, 기도를 알게 된다. 2. 올바른 질서는, 지금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있고 그분을 향해 순례하고 있는 우리를, 보다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분들에 의해, 하느님께 가깝도록 한다. 이미 천상 고향에 있는 이들의 기도에 의해 그분께로 우리가 인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인들의 중재를 간구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거룩한 인물에게 기도를 부탁한다면, 더욱이 저 세상에 있는 성인들에게 기도해야 한다. 3. 우리들에 대한 호의로서 성인들의 기도는 항상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원하지 않고, 항상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의 결실에 방해되는 어떤 결함이 우리 편에 있을 수 있다.
*** 질문을 벗어나는 내용이지만 부활한 자의 자기 동일성(identitas)에 대해 조금 언급하자면... 만일 영혼이 그 이전의 동일한 육체를 다시 취하지 않는다면 부활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다시 발을 딛고 일어서는 것, 넘어진 사람이 발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단순한 새로운 육체의 수용이다. 그러한 오류는 무엇보다도 영혼이 육체의 본질적 형상이요, 원리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다시 살아난 사람은 수량적으로 그 이전과 동일한 사람이다. 사실 부활은 그것을 받아 들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인간은 최종적 완성을 이루지 못할 것이요, 그 마지막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다시 살아난 사람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 그 전의 자신이 아니라, 그 전의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면, 부활은 마지막 목적으로서 무익할 것이다. 즉 최종적 완성이 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 안에서 욥은 우리에게 오류를 보여 주지 않는 스승이다.
자연적인 것보다 더 물질에 의존하고 있는 인위적인 것에서 만일 어떤 부분의 물질이 그 전의 장소로 되돌아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전의 그것을 다시 만들었다고, 또 되돌아왔다고 말한다. 그와 같이 더욱 쉽게 비록 어떤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고, 육체로부터 변한 재가 그 전에 속했던 한 부분으로 재구성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시 살아난 사람의 육체가 그 전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편의상 어떤 부분들, 적어도 본질적인 것이 그 전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부활은 신적 작용을 통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다시 살아난 육체는 그 형상이요 목적인 영혼과 완전하게 상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그의 모든 지체를 완전하게 지니게 될 것이다. 머리, 손톱, 발톱까지도 인간의 자연 본성의 온전성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은 다시 살아난 사람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육체와 더불어 육체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체액까지도 다시 얻게 될 것이다. 인간 본성을 형성하는 데 속하는 것은 이성적 영혼(anima rationali)에 의해 주입 형성된 모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체가 부활하도록 정향된 것도 이성적 영혼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영혼에 의해서 주입 형성된 육체의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자체에 물질적으로 있었던 모든 것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인간 본성을 형성하는 데 속하는 모든 것들은 다시 살아아야 하고, 그의 양, 형태, 장소, 그리고 각 부분들의 질서에 있어서 인간적 특수성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상대적이어야 한다. 한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인간 안에 있었던 질료의 전체성은 양적인 것을 앞선다.
결함없이 인간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인간 본성을 결함없이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보기인 그리스도께서 그러했던 것처럼 모두가 완전한 연령으로 부활할 것이며, 모든 결함을 제외하고서 완전히 성숙한 연령과 관련된 체격을 지닌 체 부활할 것입니다 완전하지 못한 상대적인 것, 동물적인 삶의 영역에 속하는 것 , 인간 본성의 결함과 관련되는 것들은 부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그런 종류의 것은 일체 없을 것입니다.
더 궁금한 것들은 책을 통해 알아 보시기를..^^ 덕분에 저도 이 부분을 다시 기억할 수 있어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