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이사악 (1) 아브라함에 이어 두 번째 성조인 이사악 이름의 뜻은 ‘웃는다’입니다. 늙은 나이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웃었기에(창세 17,17; 18,13) 지어진 이름입니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의 불신앙을 질책하는 이름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하지만 이사악 이름의 뜻을 꼭 부정적으로 풀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악의 탄생은 사라에게 행복한 웃음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창세 21,6) 그런데 이사악 자신은 과연 이름처럼 웃을 수 있는 인생을 살았을까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를 보고 웃으실 수 있는 삶을 살았을까요? 이사악에 대한 일반적인 평을 소개하겠습니다: ‘성조들의 이야기에서 이사악의 비중은 매우 작다. 그리고 그는 이사악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주로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그는 행위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수동적이며, 그의 행위는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아브라함의 것을 모방하고 있다. 그래서 이사악은 마치 성조사에서 불필요한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이사악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확한 평일까요? 유다 고대 주석가 필로는 성조들 가운데 이사악을 가장 특별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이름이 바뀐 아버지(아브람-아브라함)와 아들(야곱-이스라엘)과 달리 하나의 이름을 계속 유지했으며, 가나안을 떠나지 않은 유일한 성조이기 때문입니다(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이집트에 한동안 머물렀으며, 야곱은 아예 이집트로 이주했습니다). 필로는 시련을 통해 성장해야 하는 아브라함이나 야곱과 달리 이사악은 완전한 상태로 태어났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렇게 상반된 평이 있는 가운데, 이사악이 정말 어떤 인물인지 알기 위해 먼저 아브라함이 모리야산에서 하느님의 명에 따라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한 장면부터 보겠습니다. 얼핏 보면 여기서 이사악은 철저히 수동적인 역할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단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제단 위에 올려진 말 못 하는 희생양과 같았을까요? [2020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이사악 (2) 이집트 카이로의 게니자라는 곳에서 발견된 유다 문헌에는 이사악이 제물로 바쳐지기 전 한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입 맞추고 부탁했다. “제 피를 제단에 뿌리고, 제 재를 모아 어머니께 가져다드리세요.” 여기서 이사악은 자기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묶은(창세 22,9) 이유가 그가 죽지 않으려고 저항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외경 마카베오 4서는 이사악이 자기 의지로 희생제물이 되기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꿈란 문헌에는 이사악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몸을 풀리지 않게 잘 묶어달라고 청하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부분만 남아 전해지는 고대 타르굼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제 손을 잘 묶어주세요. 만일 제가 고통을 못 참고 몸부림치게 되면 아버지께서 바치시는 제사를 망칠 수도 있어요.” … 천사들이 말했다. “내려가서 세상에 있는 단 두 명의 의인을 보자. …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 외아들을) 죽이기를 망설이지 않고, 다른 사람은 죽임을 당하면서 목을 늘어뜨리는구나.” 그런데 이러한 유다 전승과 달리 창세기의 이사악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자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몸에 칼이 들어오려는 순간까지 침묵할 수 있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아버지께 대한 순종의 가장 적극적인 표현이 아닐까요? 랍비들은 이사악이 통째로 태워서 하느님께 바치기에 여러 제사 가운데 가장 값진 번제(燔祭)에 사용될 흠 없는 제물이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오리게네스 교부는 이사악이 단순한 희생제물의 역할을 넘어서 사제의 직무까지 수행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번제를 위한 장작을 나르는 일은 사제의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악을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형(豫型)으로 보았습니다. [2020년 8월 23일 연중 제21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이사악 (3) 그밖에도 이사악에게서 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이사악은 모두 사랑받는 외아들이었으며(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따로 설명하겠습니다), 아버지에 의해 죽음을 명받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 못 박히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것처럼 이사악도 자신이 태워질 장작을 자기 의지로 지고서 모리야산을 올랐습니다. 흥미롭게도 랍비들의 창세기 해석인 창세기 랍바도 이사악이 마치 십자가를 지는 사람처럼 장작을 졌다고 합니다. 또한, 십자가에 묶여 돌아가신 예수께서 부활해서 다시 세상에 나타나신 것과 비슷하게 이사악도 제단에 묶여 거의 죽었다가 살아서 모리야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성인은 ‘칼은 이사악을 찌르지 않았다. 칼이 찌른 것은 양이신 그리스도다.’라며 예수 그리스도와 이사악의 차이점을 명확히 했지만, 후대의 유다 전승은 이사악이 실제로 죽고 부활했다고도 하며,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장소가 이사악을 태운 재가 발견된 곳이라고도 합니다. 창세기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사악이 아브라함의 외아들로 나옵니다(창세 22,2.12.16).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또 하나 있죠. 바로 여종인 하가르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입니다. 여기서 외아들은 이스마엘이 추방되고 남은 유일한 아들이라는 뜻도 될 수 있고,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의 결과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그리스어로 쓰인 칠십인역 창세기는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보아서인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 전승 미드라쉬에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대화가 이렇게 나옵니다: “네 아들을 데려가라.” “어느 아들 말씀입니까? 제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외아들 말이다.” “두 아들 모두 그들의 어머니에게는 외아들입니다.” “네가 사랑하는 아들 말이다.” “저는 둘 다 사랑합니다.” “이사악을 데려가라.” [2020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이사악 (4) 외경 희년서는 이사악을 아브라함의 첫 번째 아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맏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희년서는 이사악이 살아남은 것을 훗날 출애굽 사건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과(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탈출 4,22), 이집트에 내리신 열 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이들이 살아남을 것에 대한 예언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아브라함의 첫아들이라 부른 것 같습니다. 유다 전승에 따르면, 이사악은 유다 달력으로 1월(우리 달력으로는 3~4월에 해당합니다)인 니산달에 태어났고 니산달에 모리야산에 올랐다고 하는데, 이 전승 또한 이사악과 니산달 14일에 발생한 출애굽 사건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사악의 결혼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이사악은 40세에 결혼했는데, 유다 전통은 20세까지 미혼이면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할 정도였으니 매우 늦은 나이에 결혼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어 이사악은 대단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 혼인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살고 있던 가나안 남쪽에서 800㎞나 떨어진 아람 나하라임으로 가장 믿을만한 종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곳에 친척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며느리를 구한 이유는 족내혼(族內婚)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재산이 가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고, 종교적으로는 이방인과 섞임으로써 신앙의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아람 나하라임에서 아브라함의 종은 레베카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나그네에게 물을 대접하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이었지만, 레베카는 의무적인 대접을 넘어서 목마른 종이 물을 마시는 동안 물동이를 손에 받쳐 들고 시중을 들었으며, 낙타들까지 빨리 충분한 물을 마시게 하려고 물동이를 들고 뛰어다녔습니다(창세 24,18-20). 목마른 낙타 한 마리당 약 100ℓ 정도의 물을 마시는데, 당시 물동이는 10ℓ 크기를 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열 마리의 낙타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레베카가 얼마나 고된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2020년 9월 6일 연중 제23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이사악 (5) 이렇게 레베카는 친절하고 건강할 뿐 아니라 상당히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격을 가졌습니다. 고대세계에 여성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은 드물었는데, 레베카는 자기 혼인에 관한 결정에 참여합니다. 오빠와 어머니가 열흘간 함께 지낸 뒤에 보내려 했음에도 그 뜻을 따르지 않고 즉시 신랑을 찾아 떠난 것입니다(창세 24,55-58). 그리고 창세기 26,7은 레베카가 미모까지 겸비했다고 합니다. 이 혼인은 레베카가 주도하고, 이사악은 가만히 있다가 집안에서 짝지어 준 여인과 그냥 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왠지 남녀 역할이 뒤바뀐 듯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부부 사이에 정이 있었을까요? 아브라함 가문은 대를 이어 여인들이 불임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야곱은 사라와 라헬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심한 남편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이사악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였다.”(창세 25,21) 여기서 ‘위하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르노카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의 앞에서’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이사악은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레베카 앞에서 그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준 것입니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반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이사악은 아내 레베카가 20년간이나 불임으로 늙어가는데도 첩을 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성조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 사람의 아내만 둔 인물이며, 남녀 간의 사랑 묘사에 인색한 성경이 아내를 향한 사랑을 처음으로 언급한 남편입니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창세 24,67) 흔히 성조들의 사랑 이야기하면 야곱의 라헬을 향한 사랑만을 떠올리지만, 이사악이야말로 원조 사랑꾼이었던 것이지요. 미드라쉬는 이사악과 레베카가 같은 때에 태어났다고 하여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사악의 이런 모습과 나중에 필리스티아 임금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여 위기에 빠뜨리는 모습이 잘 연결이 되지 않죠? “하마터면 백성 가운데 누군가 그대 아내와 동침하여, 우리를 죄에 빠뜨릴 뻔하지 않았소?”(창세 26,10) [2020년 9월 13일 연중 제24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이사악 (6) 사실, 창세기 26장이 이사악 본인의 이야기인지, 창세기 12장에 나온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와전되어 다른 하나의 전승을 형성하였다가 창세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아직 논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악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연대적으로 어느 시점에 있었던 일인지도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냥 현재 창세기 이야기가 진행되는 대로 따라 읽어도 문제는 없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레베카를 향한 이사악의 사랑이 식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사악이 변한 것일까요? 이사악과 레베카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때는 에사우와 야곱 쌍둥이가 태어나면서부터로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쌍둥이를 불길하게 여겨서 한 아이를 버리거나 살해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거의 대등한 관계 사이의 지나친 경쟁으로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습니다. 에사우와 야곱의 탄생도 결국 가정에 불화를 불러옵니다. 창세기는 이사악과 레베카의 사이가 멀어진 이유를 자식에 대한 편애로 설명합니다.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사우를 사랑하였고, 레베카는 야곱을 사랑하였다.”(창세 25,28) 그런데 이사악이 에사우를 사랑한 이유가 그가 잡아 온 고기 때문이라니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레베카가 야곱을 사랑한 이유는 나오지 않는데, 밖으로만 나도는 큰아들과 달리 항상 곁에 머물며 어머니의 일을 도왔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5,27은 야곱이 온순했다고 하는데, ‘온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은 ‘가사 일을 좋아하는’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들에서 사냥하는 일을 좋아하는 에사우와의 대비가 확실해집니다. 어쩌면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창세 25,23) 것이 레베카가 야곱을 편애한 이유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앞으로 레베카는 하느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에사우의 장자권을 가로채는 데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당연히 에사우를 편애하던 남편 이사악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겠죠. [2020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이사악 (7) 이렇게 이사악과 레베카 부부 사이가 소원해진 차에 그들이 살던 네겝 지방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식솔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해 북서쪽으로 올라가 해안 평야 지대의 그라르라는 곳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사악은 그라르 남자들이 미모의 레베카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로써 자신은 안전해졌지만, 레베카는 정절을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아내를 지켜주지는 않은 것입니다. 다행히 불행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만, 이 사건 이후 부부간의 갈등이 더 커졌을 것은 충분히 짐작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이사악이 그라르로 가라고 하신 하느님(창세 26,2)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도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이사악이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충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루어 주겠다.”(창세 26,3) 그래서 본디 유목 생활을 하던 이사악이 농경 생활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는데도 크게 성공합니다. “이사악은 그 땅에 씨를 뿌려, 그해에 수확을 백 배나 올렸다.”(창세 26,12). 그러자 이방인인 이사악의 번영을 질투한 그라르인들이 그의 우물을 막아버렸고, 임금인 아비멜렉은 아예 그 땅을 떠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그라르 골짜기에 자리를 새로 잡는데, 그곳에서 우물을 파는 족족 물이 나옵니다. 이사악은 새우물을 가질 때마다 시비를 거는 그라르인들과 다투는 대신 자리를 옮겼는데, 옮긴 곳에서도 땅만 파면 물이 나온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우물을 가리키는 단어는 두 개입니다. 건기에는 그냥 구덩이였다가 우기에 빗물을 받으면 우물이 되는 ‘보르’가 있고, 자체에서 물이 샘솟는 우물인 ‘브에르’가 있습니다. 가나안의 우물은 대체로 보르이고 항상 물을 얻을 수 있는 브에르는 귀했는데, 놀랍게도 이사악이 판 우물은 모두 브에르입니다. 이사악은 확실히 하느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창세 26,29). [2020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이민의 날)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이사악 (8) 그러나 이사악의 말년은 불행했습니다. 심지어 편애하던 아들 에사우까지 그에게 상처를 줍니다. 에사우는 40세, 곧 이사악이 100세에 결혼을 했는데, 이방인인 히타이트 여인들과 혼인한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죠. “에사우는 마흔 살 되던 해에 히타이트 사람 브에리의 딸 여후딧과 히타이트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들은 이사악과 레베카에게 근심거리가 되었다.”(창세 26,34) 이렇게 에사우가 대놓고 아버지의 뜻을 거슬렀다면, 야곱은 레베카와 짜고 늙고 쇠약해진 아버지를 기만합니다. 창세기 27,1의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다’라는 표현은 육체적으로 시력이 떨어진 것뿐 아니라 판단력이 흐려진 것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속기 좋은 상태죠. 이때 이사악의 나이가 134세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에사우에게 고기 요리를 해 달라는 것(창세 27,3-4)을 보면 식욕은 아직 왕성한 듯합니다. 축복을 내릴 때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돋우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의 우가릿 지역에서 발굴된 고대 문서에는 한 손에 잔을 들고 다른 손에는 술병을 든 채 축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악이 자식들 가운데 에사우만 축복하려고 하는데(창세 27,4),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아들을 골고루 축복하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의 에사우에 대한 편애가 도를 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악의 편애만이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이어지는 구절들(창세 27,5-6)은 바로 말합니다. 이사악의 아들 에사우와 레베카의 아들 야곱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마치 가족이 아니라 남남 같습니다. 그러니 레베카와 야곱은 이사악과 에사우를 속이고 복을 가로채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2020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이사악 (9) 이렇게 말년에 아내와 두 아들 모두에게 실망하고 상처를 받은 이사악은 아버지보다 5년을 더 살아 180세에 죽습니다. 그는 헤브론의 막펠라 동굴에 아버지 아브라함, 어머니 사라와 아내 레베카 곁에 묻혀 지금도 함께 있습니다. “이사악은 노인으로, 한껏 살다가 숨을 거두고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갔다. 아들 에사우와 야곱이 그를 안장하였다.”(창세 35,29) 여기서 ‘선조들 곁으로 갔다’라는 표현을 단순히 부모의 시신과 함께 묻힌 것 이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같은 표현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는 조상들의 무덤에 묻히지 않은 아브라함에게도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창세 25,8). 이들은 이 표현이 영혼 불멸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영혼이 조상들의 영혼과 만난 사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창세기의 이 부분은 아직 영혼 불멸 사상이 등장할 때가 아니라고 반론을 펼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사악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한껏’ 살았습니다. 그냥 오래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계약에 충실하시려고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부족한 그의 일생을 함께하셨으니 복된 삶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사실을 빼고 생각해도, 이사악은 비록 노년에 가족에게 큰 상처를 받았지만(여기에는 자기 탓도 작지 않습니다), 결국 화해한 두 아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죽어 가족묘에 안장되었으니 이만하면 복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문득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는데,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레베카와도 화해했을지 궁금해지는군요. 만일 그랬다면, 이사악의 인생은 중간에 시련이 있었을망정 결국 비극이 아니라 완벽한 희극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겠네요. [2020년 10월 18일 연중 제29주일 ‧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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