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사목교서 ‘성서의 해Ⅱ’ 특집] 로마서 - 율법이 아닌 믿음에서 오는 의로움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서간은 ‘로마서’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줄여서 이렇게 부릅니다.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바오로 서간들의 배열 순서는 예로니모 성인의 라틴어 번역본인 불가타(Vulgata) 성경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데, 이 순서는 저술 시기에 따른 것(이른 시기 → 늦은 시기)이라기보다 서간의 길이에 따른 순서(긴 것 → 짧은 것)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서간인 로마서는 가장 긴 서간이지만 가장 먼저 작성된 서간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오로의 친서라 여겨지는 서간들 가운데 저술 시기가 가장 늦은 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 번째 선교 여행 말엽에(57-58년) 코린토에서 얼마간 체류한 것으로 보이는데(참조: 1코린 16,5-6; 사도 20,1-3), 아마도 이 시기에 로마서를 작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로마서는 바오로의 친서들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기록된 만큼 바오로 사도의 신학을 가장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바오로 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믿음에 의한 의화(義化)’ 사상을 비롯하여 ‘율법’, ‘할례’, ‘죄’, ‘은총’, ‘이스라엘의 구원’, ‘하느님의 선택과 예정(豫定)’과 같은 다양한 신학적 주제에 관한 사도의 생각을 잘 드러내기 때문에, 로마서는 그리스도교 교리가 정립되는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서간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서간들은 대체로 교리적인 문제를 먼저 다루고, 그다음에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관한 교훈적인 내용을 전하는데, 이는 로마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1-11장은 교리적인 내용을, 12-16장은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반부인 교리 부분은 다시 셋으로 구분됩니다: 1-4장(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로움), 5-8장(의롭게 된 이들의 새로운 삶과 희망), 9-11장(이스라엘의 구원). 로마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교리 사상을 뽑으라면, 그것은 조금 전 언급한 ‘믿음에 의한 의화’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논증하게 될 핵심 주제를 서두에 제시하고 그 주제에 대해서 차근차근 논증을 펼쳐나가는 수사학적 방식을 택하는데, 로마 1,16-17은 바로 서간 전체의 주제에 해당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내용은 믿음을 통해 의로움이 온다는 대전제를 뒷받침하는 논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가 죄의 지배 아래 놓여있음을 밝히고자 합니다(1,18-3,20). 이방인들은 율법과 관계없이 그들의 불경과 불의로 하느님의 진노를 초래하며 죄 속에 놓이게 되지만, 유다인들의 경우는 율법을 알면서도 그 누구도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죄 속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그들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할 뿐, 그 누구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나서, 이제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3,21-4,25).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은 아무 차별 없이,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3,22)을 통해서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오로는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4,1-25),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즉 율법이 생기기 전에 온전한 그의 믿음을 통해서 의로움을 얻었고,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4,11)이 되었음을 피력합니다. 이렇게 로마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되고 구원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구원은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킨 공로로 받게 되는 대가도 아니고, 어떤 노력에 따른 보상의 차원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오로는 우리의 구원이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이자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는 절대 의로워질 수 없는 죄인의 처지에 놓인 우리 모두를 위해서 친히 당신 아드님을 인간이 되게 하시고 그를 속죄 제물이 되게 하셨으며 오로지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을 주기로 계획하신 하느님. 이러한 그분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매일의 삶 속에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2020년 8월 23일 연중 제21주일 인천주보 3면, 정천 사도 요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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