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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 성경 다시 읽기: 만물, 교회, 그리고 사랑 - 에페소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14 조회수7,005 추천수0

[신약 성경 다시 읽기] 만물, 교회, 그리고 사랑 - 에페소서

 

 

바오로 서간을 읽는다는 건, 사도의 역사적 행보와 서간의 문학적 전망을 구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간혹 바오로의 사상과 행보에 집중한 나머지, 서간이 갖는 신학적이고 영성적인 가치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에페소서를 두고도 바오로가 작성한 것인가 아닌가를 물어왔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글투나 신학적 사상의 같고 다름을 논하는데 많은 학자들의 노력이 있었지요. 더불어 에페소서에는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에 머물렀다는 흔적이 전혀 담겨있지 않다는 점에서, 에페소의 구체적 장소와 그 환경을 특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도 바오로의 친서와 에페소서를 연관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공부하는데 있어 지배적이었습니다.

 

대개 학자들은 에페소서의 오래된 필사본의 인사말에 나타나는 ‘에페소에 있는 성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사는 신자들’이란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구체적인 수신자를 언급하지 않는, 그래서 많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읽었던 서간으로 에페소서를 이해하곤 합니다. 만약 특정 수신자를 염두에 두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읽은 바를 민족과 계급과 사는 처지가 달라도 함께 고민하고 나눌 수 있는 것을 지향한 서간이 에페소서라면, 우리는 에페소서를 읽는 자세를 다시금 다잡아 보아야 합니다. 굳이 2000년 전 에페소와 사도 바오로를 향하기 보다, 지금 우리네 삶 위에, 그 삶의 현실적 사유와 그 가치 위에 에페소서의 문학적 전망을 더듬어 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에페소서의 문학적 전망을 신앙적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일이 더욱 요긴한 것이겠지요.

 

에페소서는 콜로사이서와 그 내용에 있어 매우 흡사합니다. 학자들은 80년경, 에페소에 사도 바오로를 따르는 한 무리가 먼저 콜로사이서를 작성했고 10여 년 후, 콜로사이서를 바탕으로 에페소서를 작성했다고 여깁니다. 콜로사이서와 마찬가지로 에페소서 역시 교회론적 차원에서 그 특징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무엇인지, 다만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분의 가르침을 담아내면 되는 것인지, 행여 세상과 이질적인 우리만의 정의와 도덕을 체험하고 실천한다는 얼마간의 우월의식에 사로잡히는 건 아닌지, 교회에 대한 질문을 에페소서와 함께 추려보아도 좋을 일입니다.

 

에페소서의 교회는 ‘보편적’입니다. 특정 가르침, 특정 계급에 국한된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먼저 에페소서 1장 10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비체로서 작동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만물’과 연관이 있습니다. 특정 인물을 추앙하는 것이, 곧 만물을 향한다는 신비를 체험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점에 대해선 좀더 가까이, 깊숙이 묻고 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 만물과의 친교로 이어진다는 것은 만물 안에 깃든 신적 역동성을 전제해야 가능한 일이지요. 예수님께서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으로 만물을 움켜쥐듯 알아서 챙겨주신다는 신화화된 신앙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내 눈앞에 때론 차갑게, 때론 어지러이 놓여있고 벌어지는 수많은 사람과 사건들의 구체성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페소서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2,14) 대개의 신화화된 신앙은 타자에 대한 적개심을 바탕으로 한 자기 중심적 해석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분을 신화 속 신비한 인물로 만드는 것 역시 현실의 구체성을 외면한 우리 자신의 욕망이 투사된 상상과 망상의 산물일 뿐입니다. 만물을 향한 마음과 예수님을 따르는 마음이 하나될 수 있는 첫걸음은 내 안에 굳건히 쟁여놓은 타자와의 적개심을 허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저마다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았습니다.(에페 4,7) 우리 교회는 만물이 저마다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총을 깨닫게 하는 데 그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제도와 건물로 대변되는 체제 내의 획일화된 교회 조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각자가 지니는 고유한 은총의 실천으로 드러나고 성장합니다. 서로의 고유함은 때론 상충되는 갈등을 유발할 때가 있지요. 다름의 갈등을 틀림의 단죄로 둔갑시키는 우리의 무지와 완고함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은총을 짓밟고 훼손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에페 4,18)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새인간으로 불리움을 받았습니다.(에페 4,24) 새인간은 백화점에나 등장하는 신상품과 같이 홀로 빛나는 게 아닙니다. 매일의 일상이 반복의 습속에 빠져 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새인간의 품위를 잊어버립니다. 반복적 일상은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고유한 은총을 새롭게 펼쳐놓을 망석과 같습니다. 그 망석엔 저마다 고유한 삶을 살아내는 것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멋진 춤사위를 드러냅니다. 저 혼자만의 세상을 즐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세상에 함께 즐기기 위해 내어주고 품어주는 삶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새인간의 품위입니다. 악이란 게 실은 저 혼자만의 세상을 꿈꾸는, 제 논리와 제 주장을 절대시 여기는 옹졸함에서 기인합니다. 새인간은 이러한 옹졸함에 맞서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한 전사와 같습니다.(에페 6,10) 만물이 함께 모여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얻어 누릴(에페 1,3) 우리가 한낱 시류에 얽매여 개개인의 고유한 은총을 망각한 채 집단주의적 정서에 매몰되어선 안됩니다. 결국 남아야 하는 건 사랑입니다. 각자의 처지가 어떻든, 그 허물이 어떻고 그 능력이 어떻든 우리는 그저 서로의 지금 모습을 사랑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에페 5,2)

 

[월간빛, 2020년 9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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