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순례 - 구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천지 창조 (1) 우리의 첫 번째 순례지는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의 첫 부분인 창세 1,1-2,4ㄴ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본문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태초의 세상은 질서 있고 조화로우며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던 한 처음에 땅은 물과 뒤섞여 아무런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고, 어둠이 모든 것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 감돌고 있었습니다. 창조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시작되고, 명령은 즉시 실행됩니다. 창조는 6일 동안에 이루어지며, 첫 3일에는 피조물이 존재할 공간이 창조되고, 나머지 3일에는 그 공간을 채울 피조물이 창조됩니다. 첫째 날에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창조하심으로써 밤과 낮이 생겼습니다. 둘째 날에는 하늘의 궁창을 만드셨고,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를 만드셨으며, 땅의 식물이 돋아나게 하셨습니다. 넷째 날에는 하늘의 궁창에 걸릴 빛물체들, 곧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다섯째 날에는 하늘과 바다를 채울 해양 생물과 바다 괴물들과 하늘의 새들을 만드셨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땅을 채울 온갖 동물들을 만드시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이 말씀은 고대 근동의 신학과 비교할 때 놀라운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오직 임금만이 신의 모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신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세상을 다스릴 임무를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아트라하시스’라고 하는 수메르의 창조 신화와 ‘에누마 엘리쉬’라고 부르는 바빌론의 창조 신화에서 인간은 신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릴 권한이 주어졌지만 하느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듯이 그렇게 세상을 돌보고 보살펴야 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에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온갖 푸른 풀들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육식이 허락된 것은 노아의 홍수가 끝난 뒤의 일이었습니다(창세 9,2-3 참조). 이렛날이 되자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쉬셨습니다. 이렛날의 쉼을 통해 그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창조는 6일간의 창조와 이렛날의 쉼이라는 리듬을 통해 지속될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의 여덟 가지 창조 행위를 일부러 6일간의 틀에 맞춤으로써 이렛날의 쉼을 강조합니다. 곧 쉬는 것이 창조질서의 한 부분임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저자에 따르면 멈춤이나 쉼을 무시한 채로 성장과 번영만을 추구하는 것은 창조질서를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좋고 아름답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야기를 매우 체계적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이 단락에서 하느님의 이름 ‘엘로힘’은 35번 언급됩니다. 35는 구약성경에서 완전함을 의미하는 숫자 7의 배수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는 말도 일곱 번 되풀이됩니다(창세 1,4.10.12.18.21.25.31). 이것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의 완전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각 창조 행위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는 공통된 구절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부각시킵니다. 이런 체계적인 구조를 통하여 저자는 하느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곳인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20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가톨릭마산 2면, 김영선 루시아 수녀(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성경 순례 - 구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천지 창조 (2) 우리는 아직 첫 번째 순례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아름답고 질서 있는 세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남녀가 다스리는 태초의 세상에는 온갖 생물들이 제 종류대로 자랍니다. 오늘날의 용어를 빌리자면 생물학적 종의 다양성이 최대한 보장되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원죄도 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를 읽고 나면 우리는 저절로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태초의 세상과 같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실제로 성경의 저자도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곧 이어서 나올 것입니다. 첫 번째 순례지를 떠나기 전에 생각해 볼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창조 이야기가 말하는 대로 세상이 6일 만에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할까요?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역사적인 자료가 아닙니다. 어떤 본문이 역사적인 자료가 되기 위해서는 사실 확인이 가능한 이름이나 사건, 연도를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문에는 그런 자료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정말로 세상이 6일 만에 창조되었는가가 아니라 왜 성경의 저자는 이런 식으로 창조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또 이런 이야기를 통하여 창조에 관하여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는 고대인들이 생각하던 우주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 위에도 물이 있고, 이 하늘 위에 있는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투명한 궁창이 그것을 받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늘이 파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끝에는 매우 높은 산이 있어서 하늘을 기둥처럼 떠받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늘의 궁창에 해와 달, 별들이 매달려 있으며, 궁창의 곳곳에는 창문이 달려 있어서 홍수가 날 때는 이 창문들이 열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창세 7,11 참조). 그리고 땅속 깊은 곳에는 지하 세계가 있어서 사람이 죽으면 그곳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이 각각의 영역을 책임지는 신들이 따로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늘을 관장하는 신, 지하 세계를 관장하는 신, 태양신, 달신, 별신 등 우주의 영역은 그것을 관장하는 신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저자가 이 모든 것이 유일하신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선언한 것은 그 당시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고려할 때 놀라운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저자가 해와 달 대신에 큰 빛물체와 작은 빛물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창세 1,16 참조).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해와 달은 매우 중요한 신들로 숭배되었습니다. 그런데 해와 달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큰 빛물체와 작은 빛물체로 언급함으로써 고대 근동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하는 것들이 하느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천문학의 발달로 그 시대의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었던 천문학적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대인들의 우주관을 믿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비과학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해 버려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저자가 기록한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저자가 선포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태초의 세상은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질서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세상의 부조화와 무질서, 아름답지 못한 모든 것들을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2020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일 가톨릭마산 2면, 김영선 루시아 수녀(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성경 순례 - 구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천지 창조 (3) 우리의 두 번째 순례지는 첫 번째 순례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입니다. 둘 다 태초에 창조된 장소와 연관되어 있지만 자세히 둘러보면 다른 점이 무척 많습니다. 두 번째 순례지와 연관된 성경 본문은 창세 2,4ㄴ-3,24입니다. 이 본문의 앞부분인 창세 2,4ㄴ-25은 첫 번째 창조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면 뒷부분인 3,1-24은 첫 인간이 낙원을 잃게 된 까닭을 이야기합니다. 이 본문은 한꺼번에 둘러보기에는 조금 길어서 이번에는 앞부분인 창세 2,4ㄴ-25만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둘러볼 두 번째 순례지는 아주 흥미로운 곳이기 때문에 곳곳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창조의 배경이 되는 장소부터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는 매우 건조하였습니다. 땅에는 들의 덤불도 들풀 한 포기도 없었습니다. 이런 설명은 이 창조 이야기가 매우 건조한 지역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어느 날 이 건조한 땅에 안개가 솟아올라 땅을 적십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흙(아다마)의 먼지로 사람(아담)을 빚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사람이 피조물들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창조되었다면, 이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사람이 제일 먼저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쪽의 에덴동산에 첫 사람을 두시고,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습니다. 이 동산은 인간이 살기에 좋은 낙원이었습니다. 그 동산에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가 자랍니다. 그리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자랍니다. 이 동산은 생명력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사방을 적실 네 개의 강줄기가 흘러나옵니다. 이 동산은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저자가 말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산에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따 먹을 수 있지만 단 하나의 나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따 먹는 즉시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규정을 분명하게 첫 사람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과연 그는 이 규정을 잘 지킬 수 있을까요? 한편 이 아름다운 동산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느님께서는 그를 도와 동산을 돌보고 가꿀 협력자를 만들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흙으로 온갖 들짐승과 새를 빚어 그에게 데려가시자 사람은 생물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었지만 그 가운데서 자신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그것으로 여자를 지어내시어 사람에게 데려가셨습니다. 그 여자를 본 사람은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고 외치면서 그를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모습으로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창세 1,27). 여기에서 남자(자카르)와 여자(네케바)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남녀를 성적으로 구별하는 말이라면, 창세 2,23의 남자(이쉬)와 여자(잇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에 살던 남자와 여자는 둘 다 알몸이었지만 서로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더불어 평화로웠기에 그들에게는 감추어야 할 것도, 가려야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세상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십니다. [2020년 10월 11일 연중 제29주일 ‧ 전교 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가톨릭마산 2면, 김영선 루시아 수녀(광주가톨릭대학교)] [구약성경 순례 - 구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창조 이야기의 종합 우리는 여전히 태초에 창조된 아름다운 낙원에 있습니다. 이 낙원을 떠나기 전에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장면들을 한 번 종합해보겠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창조 이야기가 있으며, 두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두 개의 창조 이야기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지 않고 두 개의 창조 이야기를 나란히 배열해 놓았을까요? 만약 하나의 창조 이야기만 있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많은 이들이 성경이 말하는 글자 그대로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은 권위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성경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조 이야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읽을 때 그것을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두 이야기 모두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본래 그 세상은 질서 있고, 조화로우며, 아름다운 낙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창세기 첫 두 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 외에도 예언서와 시편, 지혜 문학 안에서 창조에 관한 다양한 전승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 근동의 창조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하게 야훼께서 용이나 레비아탄, 라합 등으로 대표되는 혼돈의 세력과 싸워 이기고 그 혼돈에서부터 창조를 이룩하신 것으로 설명하는 전승들이 있습니다(이사 27,1; 51,9-10; 시편 74,13-17; 욥 26,7-13 등 참조). 또 잠언 8,22-31에 의하면 지혜가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언급된 다양한 창조에 대한 전승들을 글자 그대로 믿으려 든다면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의 언어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신학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 안에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메시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세상은 하느님께서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고, 그 세상을 잘 돌보고 관리하도록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따라서 세상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착취하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원래 하느님께서 세상에 부여하신 질서에 따라, 그 질서를 존중하면서 이용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둘째, 일과 쉼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하느님의 질서를 존중하는 한 방법이고, 하느님께서 태초에 우리에게 심어주신 거룩함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우리는 우리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생각하고 우리에게 존재를 허락하신 분을 찬미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우리 존재의 뿌리와 재결합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하느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흙에서 빚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드신 이유는 인간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그를 도울 협력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파괴할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공동의 집인 지구의 생태 환경의 구성원이며, 그 환경을 지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그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곧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곧, 양성의 적절한 보완을 통해서만이 하느님의 모습이 우리를 통해 온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창조는 인간이 다른 동료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2020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가톨릭마산 2면, 김영선 루시아 수녀(광주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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