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사목교서 ‘성서의 해Ⅱ’ 특집] 바오로의 옥중 서간 II – 필리피서, 필레몬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오로의 ‘옥중 서간’으로 분류되는 네 서간 가운데 에페소서와 콜로새서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나머지 두 서간인 필리피서와 필레몬서를 살펴보려 합니다. 에페소서와 콜로새서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바오로의 친저성(親著性)을 의심하지만, 필리피서와 필레몬서의 경우에는 바오로가 직접 작성한 서간임을 거의 모두가 확신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 번째 선교 여행 중 에페소에서 두 해 이상을 머물게 되는데(55-57년경), 이 체류 시기의 일정 기간 동안 감옥에서 지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필리피서와 필레몬서는 아마도 이 투옥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필리피서의 수신자는 바오로가 50년경 소아시아를 떠나 유럽 대륙에 첫 번째로 세운 공동체인 필리피의 교우들입니다. 바오로와 이 교우들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오해를 살까 다른 공동체로부터 일절 받지 않던 경제적 도움까지도 이들에게서는 기꺼이 받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4,10-20 참조). 그래서인지 이 공동체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특별한 애정과 그리움이 서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1,8);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4,1). 사실 다른 바오로 서간들 가운데 필리피서만큼 친밀하고 다정다감한 어조를 보여주는 서간이 없을 정도로, 바오로는 이 공동체에 특별한 신뢰와 우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는 그러한 형제적 친교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강조하면서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거듭 당부합니다(참조: 1,4.18; 2.1-2.17-18; 3,1; 4,1.4.10). 이 때문에 필리피서를 ‘기쁨의 서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기쁨을 강조하고 있는 바오로 사도의 처지와 필리피 공동체의 상황이 어떠한 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오로는 감옥에 갇혀 있었고, 필리피 공동체도 외부의 적대자들로부터 믿음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1,27-28 참조). 즉 양쪽 모두가 박해라는 ‘투쟁’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죠(1,30). 이런 어려운 처지 속에서 바오로가 역설적으로 거듭 기뻐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투쟁의 여정이 결국 승리와 구원으로 종결되리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희망 속에서 고난의 투쟁은 오히려 신자들이 누리는 “특권”(1,29)이 됩니다.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이 그러한 투쟁을 굳건히 지속하도록 겸손의 덕목(2장)을 제시하는데, 필리 2,6-11의 ‘그리스도 찬가’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동등한 분이 자신을 비우시어 사람들과 같이 되시고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시어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신 예수님,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비움을 본받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일치하는 가운데 구원의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피력합니다. 필레몬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서간들(지역 공동체에 보낸 서간들)과는 달리, 필레몬이라는 인물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서간입니다. 게다가 ‘장’의 구분 없이 25개의 ‘절’로만 구성되어 있어, 바오로 서간 가운데 가장 짧습니다. 그럼에도 편지로서의 양식(인사말, 감사, 본문, 맺음말)을 모두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하층 계급에 속하는 노예,종에 대한 바오로의 신학적 견해를 엿볼 수 있기에, 다른 서간에 비해 그 중요도가 덜할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필레몬서는 바오로 사도가 오네시모스라는 인물에 대해 필레몬에게 부탁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네시모스는 필레몬의 종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였는지(자유를 얻기 위해? 금전적 손해를 끼쳐서?) 그에게서 도망쳐 나오고, 감옥에 있던 바오로를 만나게 됩니다. 바오로는 “옥중에서 얻은” 자신의 아들(10절)로 새롭게 태어난 그를 다시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오네시모스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16절) 받아줄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결국 세례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신앙인들이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사회적 신분과 상관없이 – 그가 사도(바오로)이든, 주인(필레몬)이든, 종(오네시모스)이든 -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며 동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노예제도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혹시 다른 방식의 차별로 계급을 나눔으로써 모두가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020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이민의 날) 인천주보 3면, 정천 사도 요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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