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비평 방법론] 설화비평에 대하여* 1. 텍스트의 세상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수많은 사건, 사고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과 그 사람이 움직이고 살아가는 삶의 공간과 시간들…. 이 세상은 그래서 늘 움직이고 그래서 늘 살아 있다. 이야기가 엮어내는 세상 또한 우리의 세상과 별반 차이가 없다.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 속의 등장인물들을 새로이 구성하면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이야기에서 텍스트의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세상 처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우리 중 그 누구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시작은 세상 처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창조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빛을 만드시고, 물을 갈라놓으시고, 땅을 드러내시며 창공을 열어젖히시는 것의 묘사한다. 그리고 하늘이며 땅이며 바다에 이르기까지 각종 동물과 식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뿐인가, 낮과 밤이라는 시간적 표지들을 통해 하루, 이틀, 사흘이 흘러가며 결국엔 하느님의 거룩한 쉼에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등장인물과 공간과 시간이 실제 경험하는 세상의 것과는 다름을 잘 알고 있다. 창조 이야기는 이야기를 위한 ‘의도된’ 세상, 곧 ‘텍스트의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시간, 공간, 등장인물의 인위적 구성을 통해 형성된 텍스트의 세상은 독자의 독서행위를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안에 아무리 좋고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하더라도 독자의 눈앞에 펼쳐지지 않는다면 텍스트의 세상은 ‘없는 세상’이나 마찬가지다. 텍스트는 독자를 통해 자신의 세상을 드러낸다. 프랑스의 해석학자 폴 리쾨르는 이렇게 말한다. “저자인 아버지에게서 고아가 된 텍스트는 독자의 공동체 안에서 입양된 아이로 거듭난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설화비평적 성경 읽기는 텍스트가 독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하고자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텍스트가 독자에게 어떻게 ‘입양(전해지는지)’되는지를 살펴보고 그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이 설화비평적 성경 읽기의 목적인 셈이다. 2. 설화비평의 위치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성경에 대한 학문적 접근 방식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역사비평학적인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은 성경 텍스트의 역사적 배경과 그 편집과정에 대해 집중하면서 현재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성경의 이야기보다는 그 이야기의 형성 배경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우리는 모세오경의 연구에 있어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다. 모세오경이 모세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고, 여러 세기를 거쳐 다양한 전승과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 각색되고 편집되었음을 역사비평적 방법론은 잘 보여주고 있다. 흔히들 엘로힘계, 야휘스트계, 신명기계 그리고 사제계로 구별되는 ‘네 가지 문헌 가설’은 역사비평적 방법론이 가져다준 결과물 중 단연 으뜸으로 여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모세오경의 이야기를 분석하는 데 있어 이 부분은 엘로힘계다, 저 부분은 사제계다 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이야기를 ‘분해’하고서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모세오경이 구성되었는지, 그 전승들의 시작과 융합 과정이 어떠했으며, 어떻게 지금의 모세오경의 형태로 고정되었는지 살펴보고자 애를 쓰는 것이 성경공부의 기본으로 통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역사의 흐름 안에서, 역사를 통하여 본다고 해서 ‘통시적 접근’이라 칭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80년대부터 성경 이야기의 설화적 흐름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면서 등장한 설화비평적 성경 읽기는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야기의 ‘있는 그대로’의 구성과 짜임새를 존중한다. 지금 이렇게 짜여진 이야기는 그 형성 과정이 복잡다단하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성경 저자들과 편집자들의 의도가 결집되어 나타난 하나의 작품이므로, 그 작품의 의도를 읽어내어야 한다는 데 설화비평은 관심을 기울인다. 왜 이렇게 이야기를 구성했을까? 무엇을 의도하면서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과 시간, 그리고 공간을 이렇게 배치시켰을까? 또한 독자들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주기를 바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하는 질문들이 설화비평이 가질 수 있는 질문들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느 시간, 어느 시대에서도 지금 있는 그대로의 텍스트가 해석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설화비평은 실제 역사적 인물인 성경의 저자와 그 저자에 의해 작성된 성경 텍스트를 직접 보았던 실제 역사적 독자에게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가지게 된다. 우리 눈앞에는 ‘성경 이야기’가 놓여져 있는 것이고, 그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성경 이야기 안에서 이야기를 해나가고 있는 가상의 존재를 ‘암묵적 저자’라 칭하고, 그 성경 이야기를 접하는 모든 독자들(그 독자가 오늘이든 내일이든 그 어떤 시대든 간에 성경 이야기를 접하는 모든 이들)을 ‘암묵적 독자’라고 칭하게 된다. 그래서 설화비평은 다분히 ‘공시적 접근’의 방법론이다. 성경 이야기가 탄생한 역사적 순간이 아니라 성경 이야기가 읽혀지는 모든 시대를 염두에 둔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3. 설화비평의 원칙들 이제 설화비평적 방법론이 성경 이야기를 어떻게 접근하는지 그 주된 방법적 도구들을 살펴보자. 이 도구들은 성경의 이야기가 어떤 의도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데 길잡이가 된다. 3.1. 이야기의 구성 이야기의 구성은 이야기(들)가 어떻게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만들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창세기 1-11장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창조이야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카인과 아벨 이야기, 노아의 홍수 그리고 바벨탑 등의 삽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 서로 다른 삽화들이 서로 이어져 배치된 것은 성경 저자의 ‘의도’로 인한 것이다. 인간 현실에 대한 사제계 신학자들의 오랜 고찰과 반성을 통해, 왜 인간은 이렇게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급기야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하는 일종의 인간학적 반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창세기 1-11장까지의 이야기의 의도다. 인류의 시작은 하느님의 평화 안에 머물렀지만, 인간의 탐욕과 욕심으로 하느님과 멀어지고 그 탐욕과 욕심은 인간 스스로를 죽이는 살인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나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인간의 교만(바벨탑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창세기 1-11장까지의 여러 삽화들은 이야기한다. 삽화들은 다양할지라도 그 삽화들을 함께 배치시키는 이야기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이 설화비평적 성경 읽기의 시작이자 마침이라 할 수 있다. 설화비평은 여러 삽화들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의 의도된 흐름을 가려내기 위해서 다섯 단계의 설화도식을 제시한다. 초기 상황 - 문제 제기 - 전환 실행 – 문제 해결 - 종결 상황이라는 다섯 단계가 그것인데, 이 도식을 통해 이야기의 흐름을 분류해 볼 수 있다. 이야기에는 분명 어떠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문제 제기) 그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노력이나 행위들(전환 실행)을 통해 이야기의 문제는 해결되어 간다(문제 해결). 그리고 그러한 문제가 어떤 상황에서 시작되고(초기 상황), 또 어떤 상황을 만들어 내면서 해결되는 지도 관심 있게 살펴볼 내용이다(종결 상황). 3.2. 등장인물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내는 것이 이야기의 구성에 관한 것이라면, 등장인물은 그 흐름 속에 하나의 장식품과 같다. 이야기를 이끌고 나갈 등장인물들의 역할과 태도를 제시하면서 이야기는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입혀나가게 된다. 예컨대,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9,7)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이 문장은 자캐오와 예수님에 대한 군중들의 평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캐오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찌되었건 이야기 안에서 죄인으로 그 성격이 굳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이 그 죄인과 어울리는 것이 군중에게는 하나의 스캔들로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야기는 하나의 등장인물에 대해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정보를 독자에게 제공하면서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규정해 간다. 예수님과 자캐오는 만나고 있으나, 군중들은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는 등장인물의 이러한 역할과 성격을 통해 하나의 문제를 만들어 가고, 이 갈등의 문제가 어떻게 바뀌어 갈지(문제 해결) 우리는 이야기의 구성의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역할과 성격으로 규정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여러 역할과 성격이 주어져 있는 등장인물도 있다. 복음서에 자주 나타나는 바리사이들은 대부분 예수의 적대자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평면적 등장인물), 마르코복음의 백인대장 같은 경우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다면적 등장인물). 등장인물이 어떤 역할과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잘 살펴보면 등장인물 간에 대립적 관계인지 보조적 관계인지를 알 수 있고, 그 관계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을 거부하는지 동조하는지를 찾아볼 수 있다. 등장인물의 행위와 말 그리고 다른 등장인물 간의 관계의 성격에 따라 이야기는 만들어져 간다. 자캐오가 죄인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구원을 이야기한다. 죄인의 자리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예수님은 죄인과의 관계 안에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완성해 나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3.3. 초점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 답은 분명하다. 이야기가 묘사하는 대로 우리는 볼 수밖에 없다. 등장인물의 내적인 상태를 이야기가 묘사하고 있다면(내적 초점화) 우리는 그 등장인물의 생각과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반대로 등장인물의 외적인 모습과 행동을 이야기가 묘사하고 있다면(외적 초점화) 우리는 그 등장인물의 내면보다는 외적인 상태를 살펴볼 수 있다. 이야기가 등장인물이나 사건의 어떤 부분에 더 관심을 가지고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우리는 이야기의 의도가 무엇인지 보다 선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의 기도가 ‘대사제의 기도’의 형식 안에서 전개된다. 사실, 예수님께서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하셨는지는 역사적으로 또는 객관적으로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야기는 예수님의 내면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올렸던 기도를 자세히 들려준다. 이는 예수께서 진정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대사제의 역할을 맡고 계시고,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 될 수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3.4. 시간성 실제 현실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은 하나의 시간적 흐름을 가지고 있다. 몇 시에 기상해서 몇 시에 회사에 출근하고 몇 시에 점심을 먹고….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실제로 흘러가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시간이 이야기 안에서 새롭게 구성되면 그 성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기상하는 시간을 아주 자세히 서술하고 출근하는 시간을 아주 간단히 서술한다면, 우리는 기상과 출근이라는 두 사건 사이에 야기되는 이야기의 ‘속도’의 차이를 감지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경우에서도 같은 현상을 보게 된다. 13장 이후에 펼쳐지는 요한복음의 예수 수난사는 공관복음에 비해 엄청나게 길게 묘사되고 있다. 특별히 예수의 고별사(14-16장)는 공관복음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요한복음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수난을 길게 표현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 건너가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다. 반면 요한복음에는 아주 짧게 사건들을 요약하는 장면도 있다.(2,23-25) 파스카 축제 때 보여주신 많은 표징적 사건을 단 몇 절만으로 정리해 버리는 것이다. 어떤 부분을 길게 늘어뜨려서 서술하는 것은 그 부분이 저자의 입장에서 중요하게 생각되기 때문이고, 어떤 부분을 요약하거나 짧게 서술하는 것은 그 부분이 저자에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서술하다 보면 예전에 일어난 일을 다시 언급하거나 미래의 일을 미리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야기를 서술하는 현재의 시간 안에서 과거나 미래의 시간을 언급하는 이유는 현재 벌어지는 이야기가 과거 또는 미래와의 연결 안에서 어떠한 의미작용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서다.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현재 벌어지는 사건의 의미를 더욱 선명히 하는 복음서의 경우가 그러하다. 예컨대 루카복음 4장 16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의 희년 선포 내용을 회당에서 언급하시며 그 희년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야기의 현재 시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신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라는 시간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의 현재는 과거의 약속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이러한 시간의 구성을 통해 의도하는 바이다. 이야기 안에 펼쳐지는 시간의 구성이 어떠한지 살펴보는 것은 이야기의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강조점을 통해 이야기가 무엇을 더 확실히 전하고자 하는지 짐작케 한다. 3.5. 이야기의 틀 하나의 이야기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이야기의 사회적 배경이라는 틀이 있어야 한다. 요한복음에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는데, 그때가 밤이었다.(요한 13,30) 밤이라는 시간적 틀은 요한복음에서 빛이신 예수님과 대립되는 시간 개념이다. 밤은 단순히 시간적 표지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배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치유기적은 회당 안에서 벌어진다.(1,21) 회당은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나누어지는 공간이다. 예수님의 치유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회당이라는 공간적 틀이 사용되었다. 회당의 상징적 의미가 예수님의 치유행위를 통해 더욱 선명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의 선교 덕택에 믿는 이로 거듭나게 된 로마 총독에 대해 이야기한다.(13,12) 이는 로마 제국이라는 사회적 배경 안에서 복음의 선포가 점점 더 확정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틀은 이야기의 등장인물과 구성 요소들을 어느 때에, 어떤 자리에 배치시키느냐를 살펴보는 기준이 되며 같은 등장인물, 같은 구성요소라 하더라도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회적 배경의 틀을 달리할 때는 전혀 다른 존재적 가치를 지니게 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3.6. 설화자의 관점 이야기 안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존재를 ‘설화자’라 칭한다. 설화자가 이야기의 대상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 관점은 주로 설화자의 해석 안에 뚜렷이 드러난다. 예컨대 마르코복음 14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 설화자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속내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것을 읽는 독자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속임수를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설화자는 독자에게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보여주게 되는 셈이다. 또 다른 예로, 욥기의 시작은 욥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욥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1,1) 우리는 설화자의 관점에 의해 제시된 욥의 됨됨이를 받아들이거나 또는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전적으로 설화자가 제시한 욥에 대한 평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화자의 관점은 그래서 이야기가 제시하는 하나의 길과도 같다. 이런저런 길이 있을 테지만 설화자가 제시한 그 길로 걸어가야 이야기는 제대로 읽혀지게 된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설화비평적 성경 읽기의 도구들은 성경을 ‘읽기’ 위한 방법론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언어학과 문학의 도움을 받아 시작된 실화비평적 성경 읽기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성경 텍스트가 왜, 무엇을 위해 이렇게 구성되고 짜여졌는지를 살펴보는 데 집중하면서 독자에게 ‘독서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가 독자와의 만남 안에서 자신의 성격과 가치를 드러낸다. 독자는 텍스트가 의도한 바대로 읽어나가면서 서로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나서게 된다. 설화비평적 성경 읽기는 이렇게 텍스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내는 데 그 가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이 글은 스위스 로잔 대학의 성서학 교수 다니엘 마흐그라의 소고 “이야기의 세상 안으로 들어가기 Entter dans le monde du recit”를 참조하였다.(Daniel Marguerat, “Entter dans le monde du recit”, dans : D. Marquerat, A. Wenin, B. Escaffre, “Autour des recits bibliques”, Cqhiers Evangile 127, p.6-22.) [회지 하나되어 40호(2014년, 성바오로딸수도회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발행),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선남천주교회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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