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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정경으로서의 성경: 나와 너, 우리의 이야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30 조회수6,405 추천수1

[말씀을 더욱 깊게] 정경으로서의 성경 - 나와 너, 우리의 이야기

 

나호준(요한 보스코) 신부1)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매일 드리는 미사 혹은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주일미사 안에서 적어도 두세 번은 듣고 외치는 선포이자 고백이다.

 

어린 시절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의미를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머릿속에 새겨진 문구이고 성인이 된 후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 거부감 없이 그저 외우게 되는 전례응답으로서의 문구.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 따라 읽기에도 어색한 이름들, 이랬다저랬다 헷갈리는 진행, 때론 너무 잔인하고 때론 너무 답답한 상황들의 전개 등 무엇 하나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글들이 어째서 주님의 말씀이 되는가… 그리고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

 

신학교에 입학하고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쩌면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이 바로 말씀과 나의 관계가 아니었나 싶다. 아무리 읽고, 쓰고, 묵상해도 지금의 내 삶과 맞닿는 통로를 찾지 못한다면 성경은 그저 ‘알아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연구해야’ 하는 기록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오늘 들은 말씀이 ‘주님의 말씀’으로 자리하기보다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해야 하는 하나의 ‘본문’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묵상 나누기를 해도 그날의 말씀과는 아무 연관 없는 지금 내 삶의 애환과 갈등을 나누는 경우가 많고, 교회 안에서의 나와 현실에서의 나 사이의 괴리감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문제가 무엇일까? 예비자 교리 시스템의 문제인가? 각 본당 사목자들의 잘못된 강론이 문제인가? 성경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인가…? 수도 없이 많은 원인과 배경이 자리할 테지만 여기에선 아주 단순하게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성경 말씀이 어떻게 주님의 말씀이고, 우리는 왜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 굳이 성경을 읽지 않고 좋은 글이나 영상, 그림 등을 보고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나누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성경 말씀은 과연 우리들의 삶 안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정경(Canon)으로서의 성경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안에서 그야말로 규범(kanwn), 말씀을 해석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는가? 다시 말해 성경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과연 ‘정경’으로 자리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을 찾아 암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본 연수는 성경공부라고 하기보다 우리 신앙의 위치를 조금이나마 분명하게 확인하고 서로 나누기 위한 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듣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들여다보고 확인하고 나누는 것에 목적이 있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나눌 질문을 다시 한 번 되뇌어 볼 필요가 있다. 나에게 있어 성경은 과연 ‘정경’인가?

 

 

1. 정경으로서의 성경

 

‘정경’이라 하면 흔히들 서기 4세기 즈음 카르타고에서 확정된 ‘정경목록’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기에 예비자 교리라든가 성경공부를 할 때 정경은 하나의 ‘목록이나 숫자’로 다가오게 된다. 성경이 연구 대상 또는 암기 대상으로 자리하는 첫 단계가 아닌가 싶다.

 

이틀간의 여정에서 우리가 사용할 정경이라는 개념은 73권의 목록이 아니라 말 그대로 ‘canon’ 곧 어원 그대로 ‘신앙의 척도’라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따라서 정경으로서의 성경은 73권이든 66권이든 그 목록의 나열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신앙의 터전이요 발판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앙인에게 성경은 과연 정경으로 자리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만약 그렇다면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2. 정경과 주님의 말씀

 

잠시 서론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미사 때마다 듣게 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라는 선포를 통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생각을, 어떤 개념을 갖게 되는가?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아니 더 구체적으로 저자에게 받아 적으라고 불러주신 말씀이라고 철저하게 믿는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성경을 접하고 더 많은 부분을 알아가면서 던지는 질문을 보면 거의 대부분 성경을 하느님께서 직접 저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 - 함축적이거나 상징적이 아닌 문자 그대로 들려주신 - 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의 첫몇 페이지를 읽고 누구나 던지는 질문만 봐도 그렇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어째서 인간이 따 먹을 줄 알면서도 선악과를 만드셨나요?” 이 질문은 성경의 마지막 부분까지 모든 부분에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을 하나의 패러다임이 된다. 주님의 말씀을 ‘소리’가 아닌 ‘문자’로 죽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경이 신앙의 척도가 아닌 ‘법, 규율’로 자리하게 되면서 성경은 법전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그토록 두꺼운 법전들이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의미 없는 문자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과연 지구상에 존재하는, 경전을 가지고 있는 종교들은 모두 그들 경전의 권위를 위해 ‘신의 속삭임’을 고백해 왔다. 절대자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에 인간은 누구도 손을 대어서는 안 되고 토를 달아서도 안 되며 믿지 않아서도 안 되는 신성한 책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지만, 그것이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주님이 내 삶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주님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나, 성경과 우리들의 삶… 그 관계 안에서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간격을 어떻게 좁혀나갈 수 있을까?

 

 

3. 정경으로 다시 읽는 성경

 

이들 문제에 대한 고민은 비단 현재 우리들만의 고민은 아니다. 비록 이 질문에 본격적으로 응답하려는 움직임이 불과 1, 2세기 전에 태동되었지만 말이다. 역사비평으로 시작된 성경 연구의 흐름은 20세기 중반 들어 많은 도전과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성경 연구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은 하나의 위기였을지 모르나 전체 연구 역사를 통해 보면 성경연구의 괄목할 만한 발전을 가져다준 기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도들 가운데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197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정경 접근’이다.

 

3.1. 정경 접근의 이해

 

정경 접근은 소위 말하는 새로운 방법론은 아니다. 1993년에 발표된 교황청 성경위원회(이하 위원회)가 발표한 ‘교회 안의 성경 해석’2)에서 정경 접근은 첫째 장 “해석을 위한 방법론과 접근법”의 셋째 절인 “전승에 근거한 접근법”에서 소개되고 있다. 다시 말해, 정경 접근은 역사비평 방법(méthode historico-critique: 1절)이나 문헌 분석의 새로운 방법들(nouvelles méthodes d’analyse littéraire: 2절)로도 간주되고 있지 않다.

 

위와 같이 위원회의 문서는 정경 접근에 대해 하나의 ‘방법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 해석의 새로운 방식’으로도 간주하지 않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정경 접근이 성경 해석의 새로운 방식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이 접근법이 과학적인 방법론 안에 수용될 수 있기 위해선 통시적(diachronique), 공시적(synchronique) 방법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경 접근의 탄생 목적과 역할은 무엇인가?

 

위원회의 문서는 역사비평 방법으로는 신학적인 결론에 도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정경 접근이 시도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문헌분석 방법들에 대해서는 이 방법론들이 역사비평 방법들보다는 연구 대상 본문의 내적 통일성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이긴 하지만 각각의 문헌을 독립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성경 해석이 불충분한 채로 남게 됨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상호 관련이 없는 본문들의 집합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거대 전승의 증언들로 이루어진 통일체”3)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970년대 미국에서 역사비평 방법을 보완하려는 접근법으로서, 신앙의 명시적인 틀인 성경 전체를 출발점으로 삼고 해석의 신학적인 역할을 더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정경 접근이 탄생하게 된다. 즉 정경 접근의 역할은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과학적인 방법들을 가지고 ‘정경’4)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1970년대 미국의 어떤 배경 가운데 이 정경 접근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3.2. 정경 접근의 출발점

 

정경 접근의 시작은 미국 예일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였던 Brevard S. Childs의 기고문 “Interpretation in Faith”에서 찾을 수 있다. 1964년에 발표한 이 소논문에서 그는 제대로 된 구약성경 주석서가 없다고 유감을 표명하면서 이와 같은 현상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 연구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석의 관심사가 성경 본문의 ‘원천’을 찾기 위한 본문비평, 역사비평 그리고 역사 어문학 등에 치중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신학적인 결론을 잊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의 신학적 역할은 ‘중립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신앙이라는 명백한 틀’에서 출발해야 가능함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Childs가 주장한 ‘정경적 독서’의 시작이 된다.

 

3.2.1. 정경적 맥락(contexte)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0년대 후반의 급변하는 미국 사회 안에서 시작되어 1960년대까지 활발하게 진행되던 ‘성경신학 운동’이 자유주의 해석과 근본주의 해석의 영향으로 조금씩 정체성과 위치를 상실하다 급기야 ‘사망’하게 되었다고 Childs는 1970년에 발표한 “Biblical Theology in Crisis”에서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그는 새로운 성경신학이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시대적 징표를 이해하고자 하는 교회와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 성경 해석을 위한 가장 적합한 ‘맥락’의 성립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맥락’은 주석학자들에 의해 제안되는 단순한 ‘시각’이 아니라 본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상황 전체’를 의미한다.

 

과연 어떤 ‘맥락’이 오늘날 성경 해석을 위해 가장 적합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까? Childs는 가장 적합한 맥락으로 그리스도교의 ‘정경’을 제시하며 정경적 독서의 시작을 알린다. 그가 여기서 주장하는 정경적 맥락은 ‘성경 본문의 최종 정경 형태’로서 철저히 공시적인 입장에서의 정경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역사 그 자체는 계시의 수단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거룩한 활동 그리고 그에 의해 생성된 규범적인 역사들이야말로 계시의 역사이기에 정경이 되기까지 이어져 온 규범의 역사는 모든 신학과 해석학의 노고가 온전히 펼쳐져 있는 성경의 최종 형태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성경 본문이 서로 다른 사회적 상황, 역사적 사건들 안에서 생성된 다양한 전승에서 기인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인 배경이나 원래의 상황들은 정경으로 전수되어 오면서 점차 ‘원천’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고 이와 같은 전수의 역사 안에서 새로운 상황들을 위해 본문이 원래 취한 원천에서부터 재창조, 재현실화라는 과정을 거쳤기에 오늘날의 주석은 계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 본문의 최종 형태에서 출발하여 오늘날에 맞갖은 성경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역사비평 연구와 같은 통시적 입장의 연구를 무시하거나 배척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Childs가 주장하는 최종 형태의 정경을 통해서 오늘날 성경 해석을 위한 규범이나 법칙을 찾아낼 수 있을까? 최종 형태의 정경이 나오기까지 수도 없이 많았을 특별하고 중대했던 배경들 안에서 성경을 통해 그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했을 신앙의 역사들 또한 묻히고 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1972년 뉴욕 연합신학교 교수인 James A. Sanders는 Torah & Canon에서 정경적 독서를 발전시킨 비평, 곧 정경비평을 탄생시키게 된다.

 

3.3. Sanders에 의한 정경비평5)

 

Sanders의 정경비평과 Childs의 정경적 독서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정경에 대한 입장 차이라고 할 수 있다. Childs가 “성경 본문의 최종 형태”를 정경이라고 본 반면 Sanders는 오히려 통시적인 측면에서 정경이 성립되게 된 통시적인 과정(processus)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정경을 ‘거울’에 비유하면서 Sanders는 모든 종류의 신앙 공동체는 그들의 정체성(identité)을 해석학적인 규범에 의거해서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찾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정경은 모든 시대에 각자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줌으로써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경이라는 기반 위에서 위와 같은 작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Sanders는 이스라엘과 초대교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미 경험된 역사적인 긴장과 시련들(유배,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와 같은) 간에 역동적인 유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Sanders는 이와 같은 역동적인 유비를 통해 정경의 현실화가 가능해진다고 역설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신앙공동체들이 체험한 여러 가지 위기들과 시련이라는 여정은 정경화 과정 안에서 이미 완료되었고 우리들 또한 우리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마찬가지의 여정 중에 있기 때문에 이 정경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현재의 어려움과 시련, 위기들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Sanders의 입장에서 정경비평은 오늘날 우리들, 우리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필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3.3.1. 정경화 과정(processus canonique)

 

Sanders가 주장하는 정경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말하는 ‘과정’이 지니는 개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관심사의 시작은 이스라엘 공동체, 유다 공동체, 초대교회 공동체, 오늘날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같은 신앙 공동체이다. 하나의 공동체는 그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 ‘과정’을 통해 찾게 된다. 본문(texte)에 의해 구체화된 공동체이지만 이들 공동체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새로운 내용을 본문에 첨가하게 되고 점차적으로 성경 본문의 최종 형태와 내용을 결정짓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들 ‘과정’은 정경이 외적으로 하나의 최종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 공동체들의 필요와 요구, 경험들을 조명하기 위해 성경을 재조명하고 재해석하는 내용이요 척도가 되기에 Childs의 공시적 시각과는 달리 Sanders의 정경 접근은 통시적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Sanders는 ‘정경화’라는 개념을 ‘정경의 형성과정(composition du canon)’과 분리해서 이해하고 있다. 유다교와 이슬람, 그리스도교라는 세 개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정경이 다르고, ‘정경의 형성과정’보다 정경의 기능적인 측면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경화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서, Sanders는 성경의 편집자들이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지니고 있던 신학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널리 퍼져있던 문학작품들을 어떤 관점과 의도로 편집했는지를 먼저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하나의 전승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이해되고 해석되는 경우 이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서 과거의 전승들이 그 후대 유다 공동체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사용되었고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해석학적 규율들은 오늘날의 해석을 위해서도 유효한데 이는 하나의 전승이 발생되고 반복되고 편집되어 또 하나의 전승이 되고 결국 해석학적인 규율, 즉 정경으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3.4. 정경 접근의 몇 가지 주안점

 

앞서 살펴본 대로 두 신학자들의 주장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Childs는 ‘정경적 맥락’이고 Sanders는 ‘정경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경 접근은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방법들을 함께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공시적인 입장에서 정경 접근은 서로 다른 장면들과 본문들의 상호 연관성을 살피게 해주고, 더 나아가서 연구하려는 본문과 인접하고 있는 본문들과의 관계에서, 문학적 형태, 목적, 유사성과 차이점 등을 찾도록 도와준다.

 

통시적 입장에서 정경 접근은 신학적이고 사회적이며 규율적인 성찰의 순간들을 반영하는 거울처럼 각각의 본문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어떻게 해서 하나의 경전이 대를 잇는 신앙공동체를 통해 전수가 되고 하나의 전승이 되었는지를 찾도록 이끌어 준다.

 

정경 접근은 또한 정경의 개념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정경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하나의 신앙 경전으로 지니고 있는 성경 목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 각 권이 들어있는 ‘최종 형태’라고 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각 권들이 구성하는 정경의 총체가 ‘정경’이라고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정경은 고정되어 있으면서 유연성이 있고 다양한 자료들을 함께 포용하면서도 일관성이 있기에 성경 각 권은 정경 전체의 전망에서만 성경이 될 수 있다.

 

역사비평 방법과의 관계에서 정경 접근은 신앙의 역사적인 개진 과정 안으로 직접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에 역사비평 방법 자체를 무시하거나 소외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나자렛 예수」6)에서 역사적인 방법들은 과거에 속하는 사건이나 말씀들을 연구하는 것으로 그 말씀들을 현재에 접목시킬 수는 있지만 그 말씀들을 현실화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말씀들은 과거 안에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경 접근을 통해서라면 일정한 규율에 의해 여러 가지 전승들과 사고들이 농축된 경전을 각기 다른 층의 전승들과 과정들을 그들 자체의 원천에서 떼어내지 않고 이해할 수 있기에 정경 접근을 성경 해석을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척도로 보고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각각의 본문들 안에는, 여전히 싹트기를 기다리는 씨앗들과 같이 새로운 상황과 체험, 고통과 시련들 안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말씀들이 내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하느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기록들의 살아있는 주체가 되고 그들에 의해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백성들 즉 우리 신앙인들에게까지 언제나 현재형이 된다. 그러기에 베네딕토 16세는 정경 접근을, 정경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해석의 규율을 찾아 오늘날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도와줄 도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접근 방식을 통해 정경 접근의 분명한 원칙을 말해주는 몇 가지 기본적인 특성들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첫째, 정경 접근은 비록 역사적, 문학적 방법론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다분히 신학적이다. 둘째, 정경 접근은 신앙 공동체들과, 전승의 발전에 영향을 준 어떤 역동성에 초점을 맞춘다. 믿음의 공동체에 의해 생산된 성경 본문이지만 그 공동체의 정체성은 이미 종교적인 전승들을 숙고함으로써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외치는 개별 저자의 목소리는 공동체가 받아들인 본문의 목소리보다는 덜 중요한 것이다. 셋째, 정경 접근은 성경 본문들에 적합한 해석학은 본문 자체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넷째, 정경 접근은 성경을 이야기들의 모음집으로 보지 않고 신학적 사고들이 새로운 맥락에 대해 반응하면서 끊임없이 재형성되는 살아있는 토론장으로 본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상황에 있고, 어떤 환경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물질만능주의는 이미 우리 삶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가정의 역할은 축소되고 또 축소되어 그 의미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며, 환경문제와 에너지 문제 역시 우리네 삶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이다. 인터넷과 정보매체의 발달로 하느님의 말씀은 거추장스러운 장신구처럼 되어버렸고 생명과 인권을 무시하는 과학기술이 점차 각광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여 우리 삶속에 뿌리내리게 할 수 있을까? 과연 정경 접근은 이와 같은 우리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줄 수 있는 도구가 되는가? 이를 위해 우리는 간략하게 정경 접근을 통해 창세기 2,4b-3,24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4. 정경 접근을 통한 창세기 2,4b-3,24 다시 읽기


4.1. 왜 창세기 2-3장인가?

 

창세기 2-3장은 거룩한 말씀인 성경을 여는 창세기의 시작 부분에 해당하고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들뿐 아니라 비그리스도교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창세기 2-3장의 해석은 본질보다는 역사적인 입장에서 본문을 바라봄으로써 기원과 원천이라는 측면에 더 큰 비중을 두어왔다고 할 수 있기에 그 말씀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창세기 2-3장은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의 첫머리에 해당된다. Sanders가 “정경에 대해 말하는 것, 그것은 먼저 토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7)라고 말하듯 토라 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고대 전승들의 총체와 이들 전승들을 바탕으로 깨닫고 형성하게 된 그들의 정체성 즉 삶의 원천을 찾을 수 있다.

 

4.2. 창세기 2-3장의 정경 접근을 위해 필요한 선이해

 

정경 접근을 통해 창세기 2-3장의 본문을 읽기 위해서 먼저 본문의 범위를 설정해야 한다. 과연 어디에서 막을 올리고 어디에서 막을 내려야 하는가?

 

3장 24절은 뒤이은 4장의 내용과 비교해서 명확하게 차이를 보이지만 2장 4절에서는 적지 않은 어려움들을 만나게 된다. 4절의 내용 전체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그 전체를 우리들이 연구할 본문의 시작점으로 취할 수도 있지만 2,4a에 등장하는 “톨르돗”이란 표현을 1장에서 시작한 천지창조 사화의 끝맺음 부분으로 생각하고 2,4b에선 의도적으로 4a의 표현들을 역순으로 차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2,4b가 1,1의 메아리 역할을 하고 있기에 2,4a를 1장의 내용과 2-3장의 내용을 잇는 경첩으로 보고 2,4b를 2-3장에서 새로 시작되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렇게 2,4b를 시작으로 창세기 2-3장의 구조를 일곱 개의 장면으로 나눌 수 있다.

 

장면 I : 2,4b-17 아담의 창조와 에덴동산에 자리함

장면 II : 2,18-25 동물들과 여자의 창조

장면 III : 3,1-5 뱀과 여자의 대화

장면 IV : 3,6-8 금지된 열매를 따 먹음

장면 V : 3,9-13 주 하느님과 아담, 하와의 대화

장면 VI : 3,14-21 뱀과 여자, 아담을 향한 저주

장면 VII : 3,22-24 아담 커플이 동산에서 쫓겨남

 

각각의 장면들은 교착어법 등을 이용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고 특별히 장면 I과 VII, 장면 II와 VI, 장면 III과 V는 내레이션과 대화, 등장인물, 배경 등에서 서로 연관을 맺고 있으며 금지된 열매를 따 먹는 장면인 넷째 장면은 이 본문의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다. 본문의 가운데 장면이 클라이맥스를 이루면서 인간의 불순종과, 법과 하느님의 선물을 공경하지 않는 자세를 강조하면서 참되고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에덴동산에 인간을 둔 것은 땅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고 언급하고 있는데(2,15) 마찬가지로 동산에서 쫓겨날 때도 그 이유가 사람이 난 흙을 경작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즉 창세기 3장의 내용은 2장에서 시작된 아담과 하와의 역사를 끝맺지 않고 오히려 뒤이을 내용들을 열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시적인 입장만으로는 본문 안에 내재된 긴장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알아내기 어렵기에 통시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창세기 2-3장의 내용과 고대 근동의 신화들을 비교함으로써 어떠한 신학적 반성들이 창세기 2-3장의 내용에 깔려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천지창조와 인간의 창조, 특별히 동기와 방법에서 차이점을 살펴보면 창세기 2-3장의 내용 안에서는 우선 주 하느님이 유일하신 하느님이라는 유일신 사상이 드러난다. 또한 인간이 신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그리고 있는 고대 근동의 신화들과는 달리 창세기의 인간은 자치권을 부여받은 피조물로서,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2-3장 안에서 인간 창조의 완성은 다른 신화들과는 달리 아담의 창조가 아니라 하와 곧 여인의 창조를 통해 완성되고 있기에 더욱 깊은 차원에서 남자와 여자의 일치를, 더 나아가 인류의 일치를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대 근동의 신화들과 창세기 2-3장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놀라우리만큼 유사한 표현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창세기 2-3장의 저자가 당시 널리 퍼져있던 신화들의 내용을 아무런 여과 없이 인용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고유의 체험과 신학들을 바탕으로 재해석하고 재창조하여 창세기 2-3장의 내용을 완성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어서 창세기 2-3장에서는 저자들이 이미 본문 안에 오늘날과 소통할 수 있는 장치들, 곧 상징적인 표현들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에덴동산이라는 표현을 살펴보면 구약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이 정원의 이름이 다른 곳에서는 에덴, 하느님의 동산이라고 간주되는 반면 창세기 2-3장 안에서는 에덴의 동산(창세 2,8) 또는 에덴동산(창세 2,15; 3,23.24)이라는 표현으로만 쓰이고 있다. 먼저 창세기 2,8에서만 쓰인 ‘에덴의 동산’이란 표현은 Westermann에 따르면 하느님에 의해 조성되긴 했지만 인간이 살아가게 될 장소로서 하느님의 정원과 구별되는 것이다. 반면 ‘에덴동산’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산책을 하시고(창세 3,8) 머무시는 장소로 인간이 쫓겨난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 할 수 있다(창세 3,23.24). 창세기의 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 동산의 장소적인 배경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좀 더 멀리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에덴이라는 장소를 그야말로 낙원 같은 곳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경험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다시말해 장소적으로 한정될 수 없는 곳으로 그리고 있다. 에덴은 실재하는 장소로 그려지지만 지리적으로 구체화되어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성경 밖에서는 그것의 존재를 증명해 낼 수 없는 장소다.

 

인간이 창조된 바로 그 땅(창세 2,8)은 에덴동산과 비교해서 우리가 체험하는 세상 그 자체 곧 외형적 땅이고, 창조된 인간이 경작해야 했던 땅, 그러나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그 땅은 에덴동산으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내재적 땅이 된다.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편집자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저자는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생명나무를 따 먹는 것은 금지하지 않으시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을 금지하셨다고 전하는가? 게다가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은 열매는 동산의 한가운데 있는 나무로서 전후과정을 볼 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나무 열매가 아닐까?(창세 2,9; 3,3) 도대체 창세기 2-3장은 하나의 나무를 다루고 있는가, 아니면 두 개의 나무를 다루고 있는가? 이에 대해 Westermann은 본문의 내용 안에는 하나의 나무만 있지만 그것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무로 분리되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생명나무라는 표현은 본문의 시작과 끝(2,9; 3,22-24)에서만 등장하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2장 9절과 17절에서만 등장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 나무’ 또는 ‘금지된 나무’라는 표현으로만 등장하고 있다(3,2.3.5.6.11.12.17).

 

이 나무들에 대한 표현에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개의 전승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 하나는 생명나무 열매에 관해 알고 있는 전승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 또는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또는 ‘금지된 나무’ 외에는 생명나무 열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전승이다. Westermann에 따르면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에 대해서만 알고 있던 전승이 생명나무에 대해 알고 있던 저자 또는 편집자와 만나 지금과 같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나무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에 대한 모티프는 유지하면서 생명나무 열매라는 모티프를 들여오기 위해선 또 하나의 다른 이름을 가진 나무가 필요했고 그것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는 생명나무 열매도 되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되며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창세기 2-3장의 배경에는 다양한 원천과 전승들이 녹아있다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이들 다양한 원천과 전승들은 그저 저자나 편집자가 연관성 없이 죽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각각의 설화적인 틀 안에 맞도록 각각의 신학적인 배경 위에 하나의 새로운 유기체로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진행과정 안에 작용한 어떠한 법칙 바로 이것이 해석의 규범으로 작용하는 정경인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2-3장의 여러 가지 전승들이 이런 정경화 과정을 거치게 된 가장 큰 역사적인 순간은 언제일까? 그리고 창세기 2-3장의 내용은 ‘정경’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이들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John van Seters는 창세기 2-3장의 저자를 역사가이면서 동시에 고대자료전문가(antiquarian historian)인 야훼계 학자들로 보고 있다. 그러나 Van Seters가 말하는 야훼계 학자들은 von Rad가 말하는 솔로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저술가들도 아니고 Gunkel이 말하는 구전전승들의 모음집을 만들어 낸 이들도 아닌 신명기계 신학의 영향을 받은 후대 유배시대에 활동하던 역사가들로 역사학적 시각 안에서 성경의 원천뿐 아니라 성경 외적인 자료까지도 가져다가 형태를 갖추는 작업을 한 이들을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Van Seters는 창세기 2-3장을 에덴동산이라는 표현, 인간의 범죄와 추방 그리고 지혜와 신성성에 대한 것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에제키엘 28,1-19과 비교하면서 창세기 2-3장의 저자가 에제키엘 28장의 배경으로 사용된 전승을 고유의 신학과 목적을 바탕으로 변형했다고 설명한다. 곧 하느님의 동산인 에덴에 자리하던 임금이 자신의 죄 때문에 동산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전승을 창세기 2-3장의 저자가 임금을 최초의 인류로 변형하고 동시에 메소포타미아와 그리스에서 흘러들어온 원천들을 접목시켜 창세기 2-3장의 내용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Van Seters는 이 과정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야훼계 저자들이 이미 알고 있던 전승이 에제키엘 예언서의 전승 안에 표현된 죄와 인류의 타락의 원인인 지혜를 대변하는 상징으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인간이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곧 하느님의 거룩한 명령이 지어준 ‘한계(limite)’를 파괴함으로써 얻은 것으로 이 지혜를 바탕으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고찰은 근동의 전승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서양의 헬레니즘 문화에서 발견되는 고찰로서 이를 바탕으로 야훼계 저자들은 창세기 2-3장을 뒤이어 발전해 나갈 인류의 역사의 머리말로 구성하였다는 것이 Van Seters의 주장이다. 곧 야훼계 저자들은 인류의 원천과 인류의 비참한 현실과 고통들의 원인을 찾는 고대 서양의 전승들에 영향을 받은 병인학적인 측면뿐 아니라 법과 계약에 순명하는 결과로 장수와 약속된 땅이라는 축복을 받는다는 신명기계 역사학적인 고찰까지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안에서 백성들에 의해 단절된 계약은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 급기야 유배라는 결과를 낳았는데 같은 모습으로 야훼계 안에서는 금지된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야기된 계약의 파기는 연속되는 고통과 저주, 급기야 동산에서의 추방이란 결과를 낳았다.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신명기계 역사의 국가 종교적인 관점은 유배라는 충격적인 상황 하에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추방이라는 새로운 전승을 탄생시켰고 이를 통해 야훼계 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유다에서의 추방을 모든 인류가 겪어야 할 보편적인 현실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를 단순히 성경이 그려내는 최초의 인류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너와 나,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보편적인 인간으로 여기는 관점으로 이제 창세기 2-3장의 내용을 정경 접근을 통해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4.3. 정경 접근을 통해 다시 읽는 창세기 2-3장

 

4.3.1. 불순종에서 순명으로: 창세기 1-12장과 창세기 2-3장

 

창세기 1장과 2-3장의 내용은 그저 단순하게 아무 의미 없이 차례로 연결된 사화가 아니라 하나의 문학적인 구조 안에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의도적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생각해야 한다. 창세기 1장이 먼저 쓰였는지 아니면 창세기 2-3장이 먼저 쓰였는지는 우리의 관심사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답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정경으로 자리 잡은 지금의 위치가 그 나름의 신학과 이유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두 본문은 어떠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을까?

 

이미 언급한 대로 이 두 본문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2,4a라고 할 수 있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두 본문의 공통된 관점은 먼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은 항상 좋은 것을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창세 1,4.10.12.18.25.31; 2,18) 그리고 하느님 자신이 세상과 모든 피조물들의 기원이시라는 것,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응답을 원하시고 이것은 법에 순명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창세 1,29-30; 2,16-17)

 

창세기 1장과 비교해 보면 창세기 2-3장의 해석을 도와주는 요소들을 찾을 수 있는데, 창세기 2-3장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선물, 은총은 비록 금지와 같은 조건이 제시되어 있지만,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먼저 무한한 선물을 주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의 행동 역시 같은 차원에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데 2-3장의 내용을 알고 있는 독자들은 1장을 읽으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선물을 다 받은 인간이 결국 취하게 될 행동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1장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의 선물이 더욱 애절하게 다가온다. 창세기 2-3장을 뒤따르는 창세기 4장과 더불어 정경 접근 방식의 독서를 하게 되면 2-3장의 신학적 배경, 특별히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이해가 더욱 선명해진다. 구조적으로도 창세기 3장과 4장은 유사한 부분이 많다. 창세기 3,1-5의 내용은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 장면으로서 금지, 한계에 대한 대화가 나오는데 창세기 4,6-7에서는 주님께서 ‘죄’에 대해 언급하시며 카인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초대하신다. 이는 곧 카인의 한계와 금지에 대한 주님과 카인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뒤이어 창세기 3,6-7에서는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이야기가 그려지고 창세기 4,8에서는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창세기 3,8-13에는 잘못에 대한 주 하느님과 피조물 간의 대화가 나오고, 창세기 4,9-10에는 잘못에 대한 주님과 카인의 대화가 나온다. 창세기 3,17-19에서는 인간을 향한 주 하느님의 판결이 등장하고, 창세기 4장에서도 11-12절에 카인을 향한 주님의 판결이 등장한다. 그리고 벌의 집행이 3장에서는 동산에서 쫓겨남으로, 4장에서는 카인 스스로 에덴의 동쪽으로 물러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창세기 4장과 2-3장의 연계성은 4장 7절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옳게 행동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카인은 지금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앞에 서있는 것이다. D. Rudman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범죄가 하느님의 명령을 거스른 것이라 한다면 카인의 범죄 또한 여전히 유효한 하느님의 명령, 즉 하느님의 뜻 앞에서 스스로 하느님처럼(to be as God) 되고자 했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8) 카인은 동생을 죽이는 ‘악’을 선택하고, 뒤이은 주님의 질문들은 창세기 3장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은 직후에 하느님과 인간이 나눈 대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J. Skinner에 따르면 아담과 달리 카인의 대답에는 그의 책임에 대해 반항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이 담겨있는데 이는 창세기의 저자가 죄의 힘이 무섭도록 발전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그린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9) 아벨을 찾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카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라고 답변한다. 이 답변을 통해 카인은 이미 하느님의 뜻을 어긴 것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게다가 보호자(gardien)라는 단어는 창세기 2장에서 이미 언급된 아담의 역할과 사명 즉 하느님의 뜻을 지키는 것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창세 2,15 참조).10) 결국 카인은 자신의 갈망인 죄, 다시 말해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유혹자인 뱀을 다스리는 것에 실패하게 되고 그의 죄가 짊어지기 무겁다는 것을 인식하여 자신의 원의로 주님의 면전에서 멀어져 간다.

 

창세기 2-3장을 창세기 4장과 연계해서 읽은 결과 창세기 4장이 창세기 2-3장의 내용, 그중에서도 ‘불순종’이라는 인류의 첫 번째 행동을 더욱 선명하게 발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시야를 넓혀 창세기 2-3장을 성조들의 역사, 즉 창세기 11장까지의 말씀 안에서 다시 읽게 되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인류의 모습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창세기 1-11장의 내용 안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신학적인 내용들을 창세기 2-3장은 포괄적으로 지니고 있다. 즉 하느님에 의해 다른 무엇보다 먼저 주어진 은총, 법, 그리고 법에 대한 불순종이다. 창세기 11장까지의 내용 안에서 인간의 불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점차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죄의 모습으로 순차적으로 묘사된다. 인간의 사악한 생각과 부패된 모습(창세 6,5-8.11-12)은 주 하느님의 인간 창조에 대한 회의를 야기하고 결국 홍수라는 결정에 이르게 한다.(창세 6,6-7.13) 홍수 후에 인간은 도시를 세우고 탑을 만드는데(창세 11,4) 이것은 인간의 언어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결과를 낳는다.(창세 11,6-9) 이처럼 창세기의 첫 11장의 내용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향한 불순종이 모든 고통과 죽음의 원인, 즉 인간의 절망적 현실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은 홍수 이전에도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고 있는데 아담과 홍수 이후의 노아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아담과 노아는 성조라는 측면에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창세 2,7; 9,20) 아담은 땅을 경작하기 위해 땅(흙)에서부터 창조되었고(창세 2,7-8.15) 노아는 땅의 사람(창세 9,20)으로 묘사된다. 창세기 2,17과 3,2-6의 에덴동산의 열매는 노아사화에 나오는 열매, 즉 9,20-21에 나오는 포도주와 연계된다. 이 열매를 따 먹음으로 해서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리고 벌거벗은 몸이 드러나게 되었듯이(창세 3,7)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채로 잠들어 버려 벗은 몸이 아들 함에게 드러나게 된다.(창세 9,21-22) 눈이 열려 서로의 알몸을 보게 되고 아버지의 알몸을 본 결과로 아담과 하와 그리고 함에게 저주가 내려진다.(창세 3,14-19; 9,25-27)

 

이와 같은 유사성을 통해 D. Carr는 성경이 전하는 원역사는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특별히 조명한다기보다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지니는 일반적인 자세를 조명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비 제관계 문헌인 창세기 2-3장은 성조들의 역사라는 문학적 맥락 안에서 뒤이은 사화들과는 독립된 하나의 역사학적인 서론의 역할을 하는 신학적 원인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11)

 

창세기 1-11장의 내용을 지나 창세기 12장에 이르러 창세기 2-3장의 내용은 새로운 인물을 만나게 된다. 먼저 창세기 12,2에 등장하는 ‘축복’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28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받게 된 원축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최초의 축복이 이를 원치 않는 인간의 교만과 거역이라는 행동을 통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 12,4에서 아브라함은 주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난다. 창세기 2-3장(4장 참조)에서 순명으로 이어지지 않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 이번에는 비록 약속한 축복이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을 통해 ‘순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모습은 창세기 2-3장에 등장하는 인류의 모습과 정반대되는 표상인 것이다.

 

4.3.2. 신약성경 안에서 다시 읽는 창세기 2-3장

 

그러나 아브라함의 순명을 통해 극복되는 듯하던 인류의 불순종은 열왕기 하권 25장에 이르러 바빌론 유배라는 결과를 낳기까지 지속된다. 인간의 불순종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이제 시야를 넓혀 창세기 2-3장의 내용을 신약의 말씀들 안에서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Sanders가 제시한 해석학을 위한 삼각구조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좌측 아래에 신약에서 인용된 창세기 2-3장의 말씀을 놓고 우측 아래에 당시의 정치, 사회적 배경 하에 이미 적용되던 전승을 두고 맨 위 꼭지점에는 해석학적 법칙을 두는 것이다.

 

위의 구조에 따라 창세기 2,24의 말씀을 좌측 하단 꼭지점에 두고 이 말씀을 인용한 마태오복음 19장과 에페소서 5장이 어떠한 전승과 배경을 바탕으로 이를 해석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유가 타당하면 아내를 버려도 좋으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마태 19,3) 신명기 24,1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당시의 정치, 사회적 배경에 입각한 바리사이들의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1,27의 말씀과 2,24의 말씀을 인용하신 후 대답하신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우리는 먼저 창세기 1장과 2-3장의 내용이 창세기 2,4a라는 경첩을 통해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도 이미 창세기 1장과 2-3장을 연결지어 해석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말씀들을 인용하신 후에 예수님께선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하고 계신다.(19,5) 이혼이라는 것, 즉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처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로 해석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서로 알몸인 것이 드러나자 부끄러워 나뭇잎을 엮어 자신들의 몸을 가리고 하느님의 질문에 자기 아내를 탓한 아담이었듯이, 하느님 앞에서 서로 하나 되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서로를 향한 책임을 저버리는 행위 곧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해석의 법칙, 기준이 되어 창세기 2,24의 말씀을 재해석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분의 해석 안에서 창세기 2-3장의 내용은 모세의 율법을 초월하는 하나의 전승이 되고 있는데 이 같은 사실은 뒤이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정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그분의 해석에 따르면 결혼을 통한 일치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뿌리내리는 것이지만 이혼은 그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구조가 되는 것으로 결국 남자와 여자의 일치, 즉 아담과 하와의 결합은 마태오복음 19장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뜻으로 재해석된다.

 

한편 에페소서의 말씀을 통해 남자와 여자의 결혼을 통한 유대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의 모습으로 변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창세기 2,24의 결혼의 유대를 통해 제시된 남자와 여자의 일치에서 출발해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 여자와 남편의 몸이라는 유비를 마련한다. 비록 창세기 2,24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의 신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창세기 2,24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 신비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같은 모양으로 에페소서 5장의 말씀을 통해 창세기 2,24의 충만한 의미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에페소서 5장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통해 창세기 2,24의 말씀이 단지 남자와 여자의 평등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향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의 모임이고 그분의 몸을 통해 양육된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관성은 일치의 관계이자 친교의 관계이며 순명의 관계이다. 따라서 창세기 2-3장에 묘사된 남자와 여자의 일치는 이제 친교의 관계로, 순명의 관계로 확장된다. 즉 아담과 하와의 결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준 그 사랑 위에서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에페소서 5장에서 인용된 창세기 2,24의 말씀은 따라서 남자와 여자의 일치라는 본래의 의미를 잃지 않고 오히려 그 말씀의 깊이에 그리스도론적인 차원의 새로운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 2-3장의 내용은 로마서 5,12-21에서 재인용되고 있다. 로마서 5장의 말씀을 읽는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아담, 죽음, 은총, 법, 불순종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창세기 2-3장에서 쓰인 표현들을 찾을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아담과 하와’라는 표현 대신 ‘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과 대칭을 이루게 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 2,17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법을 상기시키면서 아담의 위반을 죄로 정의한다.(5,12.15) 이 법의 위반 즉 아담의 죄에 의해 죽음이 온 인류를 다스리게 되었지만 바오로 사도는 모든 주의를 이 죄에 쏟지 않고 오히려 그의 시선을 장차 오실 아담의 원형에 맞추고 있다.

 

창세기 1-3장을 읽으면서 은총이 법에 선행한다는 것을 알았듯이 로마서 5,15-19에서 바오로 사도는 잘못의 결과와 은총의 풍성함을 대조하면서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의 보편성과 풍성함을 강조하고 있다. 뒤이은 본문에서 바오로 사도는 두 아담의 행동에 집중한다. 로마서 5,18-19을 읽으면서 우리는 즉시 창세기 2-3장의 클라이맥스인 금지된 열매를 따 먹는 인간의 불순종의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이 기초 위에 바오로 사도는 직접적으로 ‘불순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새로운 클라이맥스로 우리를 초대한다.

 

아담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라면 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 것이다. 게다가 동산에서 쫓겨나고 죽게 된 인류, 즉 생명나무로 다가갈 수 없게 된 인류는 하느님께서 머무시고 다스리시는 그 동산에 들어갈 수 없기에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은총이 우리를 다스리게 되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고 고백한다.(5,21) 창세기 2-3장의 아담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새로운 아담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요한복음서에서 절정으로 드러나게 된다.

 

‘한 처음에’로 시작하는 요한복음서는 이미 시작부터 창세기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사화에서는 복음사가가 창세기 2-3장의 내용을 광범위하게 다시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창세기 2-3장의 주요배경인 동산이 요한복음서 안에서는 예수님의 수난 장소가 된다. 빌라도의 질문(요한 18,35)은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건네신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 무슨 짓을 했느냐(요한 18,35; 창세 3,13), 어디에서 왔느냐(요한 19,9; 창세 3,9), 소리를 듣는다는 표현(요한 18,37; 창세 3,8.17), 보라 이 사람을(요한 19,5; 창세 3,22), 보아라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창세 3,20).

 

이처럼 요한복음서의 시각을 통해 창세기 2-3장을 다시 읽게 되면 동산에서 쫓겨나 정지된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운명이 이제 새 아담을 통해 완성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들로서 아버지와 이루는 사랑의 관계를 통해, 그리고 그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은 생명나무 열매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요한 14,6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빛으로 성령 안에서 본문들이 지니고 있는 그러나 감추어져 있던 열매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정경 접근을 통해 다시 읽어본 창세기 2-3장의 내용 안에 담긴 신학을 어떻게 오늘날 우리들에게 ‘현실화’된 신학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까?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한 결과는 에덴동산에서의 추방과 바빌론 유배였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와 지혜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존재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함과 지혜에 근거한 자유를 통해 하느님처럼(to be as God) 되려는 마음은 하느님을 닮은(to be like God) 인간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며 스스로 죄의 권세에 짓눌려 살고픈 의지이다. 이처럼 이미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으나 순명하지 않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은 오늘도 아담이 되고 카인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앞에 서게 된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그것은 너희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신명 30,15-20 참조)

 

만일 오늘도 어제와 같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또다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는 우리들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줄 생명나무 열매만을 바라고 청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교만함과 불순종으로 다시는 먹을 수 없게 된 생명나무 열매가 매일의 미사성제 안에서 십자나무에 달려있는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으로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4.4. 정경 접근의 기여

 

“성경 문구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듣기 위해서는 온 교회의 생생한 성전과 신앙의 유추를 염두에 두고 성경 전체의 내용과 통일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계시헌장 3장 12) 결국 정경 접근이라는 것은 공의회가 밝히고 있듯이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방법론을 정경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그대로 적용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경 접근이 지니는 의의를 크게 두 가지로 찾는다면 첫째, 역사비평 방법이 고전했던 신학적인 결론을 정경이라는 맥락 안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는 것과 둘째, 정경을 그저 말씀의 모음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정경을 전수하고 받아온 공동체의 삶과 규율이 담긴 살아있는 해석학의 규범으로 자리하게 했다는 것이다. 정경화 과정을 통해 갈고 닦인 신학의 내용들을 그저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늘을 위한 하나의 신학으로, 하느님의 말씀, 즉 정경으로 받아들여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정경 접근을 통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정경 접근을 통한 말씀 나누기는 스스로의 삶을 바탕으로 복음을 다시 읽는 것이고 같은 차원에서, 생활나눔은 말씀의 해석을 위한 역사적 순간의 반영이 된다. 따라서 말씀과 삶의 상호교류 안에서 다시 읽는 정경이 우리들 작은 공동체가 필요로 하고 찾고자 하는 신학적 결론, 성경 해석을 위한 규칙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정경 접근이 우리 모두를 이끌어 줄 것이라 기대해 본다. 아울러 많은 봉사자들이 정경 접근의 연구를 통해 이들 소공동체를 좀 더 신학적인, 다시 말해 신심이 강화된 공동체로 이끌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나가면서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정신없이, 두서없이 달려 온 시간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도 더 넘게 매달려 온 부분들임에도 이렇다 할 성과가 이다지도 없음을 보며 다시 한 번 하느님과 교회 앞에 부끄러움을 고백하게 된다. 그럼에도 서두에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듯한 성경 말씀이 지금 내게 살아있는 ‘목소리’로 들리는 것은 우리 각자가 ‘정경’이라는 맥락 안으로 들어갈 때 가능하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마련되어야 할 것은 역사적 사실이나 증거를 초월하는 ‘진실로서의 역사’에 대한 이해이다. 성경은 과거 이스라엘의 어느 시대, 어느 시점에 실제로 그러한 사건이 있었는지에 대한 보고가 아닌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과의 진실한 역사에 대한 고백이기에, 주님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듣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늘 현존하는 그 장(場)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역사의 중심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가 고백하듯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지는” 생명의 말씀 곧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은 하루, 한 달, 일 년, 더 나아가 내 삶 전체라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재해석 곧 정경이라는 맥락 안에서의 재해석을 통해 가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게 될 것이고 그때서야 우리는 머리가 아닌, 입이 아닌 온 삶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외치게 되지 않을까 한다.

 

덧붙이는 말.

 

이 자료는 강의를 위한 자료라기보다는 참고용이기에 구체적인 각주나 설명은 생략하였습니다.(중간에 나오는 정경 접근에 대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에서 발췌, 요약하였기에 각주가 있습니다.) 강의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하긴 하지만 중간중간 다른 내용들이 첨가되기에 이 자료를 통해 이해가 안 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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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8년 서품. 파리가톨릭대학교 성경신학 전공. 현재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신부.

 

2. Commission biblique pontificale, L’interprétation de la Bible dans l’Eglise (Paris, Cerf), 1994.

 

3. 같은 책, p.43.

 

4. 위원회의 문서는 ‘정경’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 의해 신앙의 규범으로 전수된 그대로의 성경”이라고 정하고 있다. 같은 책, p.44.

 

5. Sanders는 정경비평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정경 접근을 하나의 방법론으로까지 확대하고 있으나 Childs는 Sanders의 이 같은 태도에 유감을 표명하며 정경적 독서가 하나의 방법론으로 간주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한다.

 

6. Joseph RATZINGER/Benôit XVI, Jésus de Nazareth (Paris, Flammarion, 2007), p.428.

 

7. James A. SANDERS, Torah & Canon, Coll. Lectio Divina n°87 (Paris, Cerf), 1975, p.10.

 

8. Dominic RUDMAN, “A Little Knowledge is a Dangerous Thing Crossing ForbiddenBoundaries in Gen 3-4”, Studies in the Book of Genesis, BETL (Leuven: Peeters, 2001), p.464 참조.

 

9. John SKINNER, Genesis,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Edinburgh: T.&T. CLARK, 1930), p.108 참조.

 

10. 창세기 2,15에서 ‘지키다’라는 분사는 3인칭 단수 여성형이다. 문맥상으로 아담은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기 위해 에덴동산에 자리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동산은 남성형 명사이기에 좀 더 넓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경작하고 지켜야 할 대상을 여성형 명사인 ‘흙’으로 보기도 하고 유다 전승에 따라 여성형 명사인 ‘명령’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1. David McLain CARR, Reading the Fractures of Genesis. Historical and Literary Approaches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6), p.241 참조.

 

[회지 하나되어 43호(2017년, 성바오로딸수도회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발행), 나호준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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