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1)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뒤를 이은 세 번째 성조(聖祖)이자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이름이 그로부터 비롯된 인물 야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의 탄생부터 말씀드리자면, 그의 어머니 레베카도 할머니 사라와 마찬가지로 불임의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내를 위한 이사악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셔서 에사우와 야곱이 태어나게 됩니다(창세 25,21). 이것은 야곱의 탄생이 특별한 사건임과 동시에 생명은 오직 하느님만이 주관하심을 보여줍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고대에는 이름을 짓는 것이 특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지을 때는 일반적으로 기원이나 축복을 담아서 지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에사우는 그 신체적 특성을 따라서, 야곱은 그가 태어날 때 한 행위를 따라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에사우는 피부가 붉고 털이 많은 외모 때문에 지어진 이름입니다. 그의 후손들이 자리 잡은 에돔은 붉다는 의미를 지닌 ‘아돔’과, 에돔의 중심 지역인 세이르는 털이 많다는 의미를 지닌 ‘세아르’와 어원이 같습니다. 그리고 에사우의 발을 잡고 태어난 야곱의 이름은 발뒤꿈치를 뜻하는 ‘아케브’와 어원이 같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쌍둥이를 금기시해서 아이 가운데 하나를 버리거나 살해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잔인한 일이지만, 나이 차가 나지 않는 대등한 관계 사이의 지나친 경쟁으로 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불가피한 조치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우려가 근거 없지는 않았던지 에사우와 야곱 사이에도 결국 사단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레베카는 야곱을 살리기 위해 친정 오빠 라반에게 피신시키게 되지요. 우리말 성경 25,27은 야곱이 온순했다고 합니다. “에사우는 솜씨 좋은 사냥꾼 곧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살았다.” 그런데 야곱이 앞으로 할 일들을 보면 이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온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탐’인데, 이것은 아랍어 ‘팀’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팀’은 ‘가사 일을 좋아하는’ 정도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야곱과 들에서 사냥하는 일을 좋아하는 에사우와의 대비가 확실해집니다. 그런데 비록 야곱과 에사우가 태어나면서부터 경쟁 관계에 있었다 해도,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그들 사이의 갈등이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2020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2) 창세기 25,28은 에사우와 야곱 형제의 갈등이 커진 원인이 부모의 편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악이 에사우를 사랑한 이유가 그가 사냥해 온 고기 때문이라니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레베카가 야곱을 사랑한 이유는 나오지 않는데, 밖으로만 나도는 큰아들과 달리 항상 곁에 머물며 어머니 일을 도왔기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두 형제의 운명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창세 25,23)을 들은 것이 레베카가 야곱을 편애한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23절은 다르게 해석될 여지도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형과 동생으로 번역한 히브리 단어들은 각각 수와 지위의 영역에서 ‘많은’, ‘위대한’과 ‘적은’, ‘보잘것 없는’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문장 구조 안에서 주어와 목적어도 분명치 않습니다. 즉, 누가 누구를 섬기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비록 하느님의 말씀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일일지라도, 앞으로 레베카는 하느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지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장자권을 가로채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전적인 자유가 장자 계승이라는 인간이 정한 질서에 얽매이지 않음과 동시에 인간의 불완전함조차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데 이바지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사실 창세기는 아우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을 지속해서 보여줍니다. 카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사악, 형들과 요셉, 므나쎄와 에프라임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이것을 하느님께서 고대 근동의 후발 국가이자 약자이던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불의와 억압, 착취의 대상인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인 선택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는 예언은 일반적으로 다윗 임금이 에사우의 후손들인 에돔 민족을 복속시킴으로써 실현된 것으로 이해합니다(2사무 8,12-14). 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에돔이 유다를 위협하고, 결국에는 에돔의 후신인 이두매아 출신 헤로데가 유다의 임금이 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장자권을 가로채 형이 된 야곱이 에사우를 다시 만날 때 그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굴한 모습을 보일 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2020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3) 에사우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넘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인 이스라엘의 장자는 자녀들 가운데 특별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가장의 뒤를 이어 한 집안의 으뜸으로 제사와 전쟁 등 모든 대소사의 통솔권과 심지어 가족 구성원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까지 가졌습니다. 유산도 다른 형제들의 두 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비록 이스라엘에서 장자 상속제가 기본 제도였지만, 장자가 반드시 출생 순서로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비열한 방법을 통해서지만 야곱이 에사우의 장자권을 양도받고 아버지로부터 장자 축복까지 받았으므로 구약성경은 야곱의 집안인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맏아들로 부릅니다(탈출 4,22). 오랫동안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은 에사우는 부정적으로, 야곱은 긍정적으로 묘사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외경 희년서는 야곱은 글쓰기를 배웠지만, 에사우는 일자무식이었으며 상스럽고 사나운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또 창세기 랍바는 33,4의 해설에서 에사우가 야곱을 다시 만났을 때 짐승처럼 야곱의 목에 달려들어 물었지만, 그의 목이 돌로 변하는 바람에 치아를 다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드라시는 에사우가 태 속에서 먼저 나가게 해주지 않으면 어머니 레베카를 출산 도중 죽게 하겠다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반면, 중세 유다 전승은 야곱의 얼굴이 하느님의 어좌(御座)에 새겨졌다고 할 정도로 야곱과 에사우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9,13은 하느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셨다’라고 하며, 히브리서 12,16는 에사우를 불륜을 저지른 속된 자라고 부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레베카의 뱃속에서 에사우와 야곱이 싸운 것을 두고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에서 에사우와 야곱은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됩니다. 에사우는 과장하기를 좋아하고,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며, 근시안적입니다. 야곱은 이해타산적이고 몰인정하며 공격적입니다.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야곱이 더 부정적인 면모를 드러냅니다. 에사우가 청을 하자마자 응답하는 야곱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형이 약해지기를 기다려 장자권을 뺏으려 미리 계획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곱은 에사우에게 맹세(이 맹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하는 행위입니다)를 시킴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0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4) 에사우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넘기고 맙니다. 이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 티그리스강 주변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 누지에서 발굴된 기원전 15세기의 점토판에도 장자권을 양도하거나 파는 것이 가능하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성경에서 ‘마카르(판매)’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입니다. 이 단어를 사용한 야곱을 성경의 첫 번째 상인으로 본다면, 그는 턱도 없는 폭리를 취한 악덕 상인입니다. 장자권을 가진 야곱은 이제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에게 주어질 복까지 가로챕니다. 야곱의 이름 ‘야아코브’가 속인다는 뜻의 히브리어 ‘아코브’와 유사하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창세기 27,1의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한다.’라는 표현은 이사악의 시력이 떨어진 것뿐 아니라 판단력이 흐려진 것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때 이사악의 나이가 134세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이사악이 에사우에게 고기 요리를 해 달라고 청하는데(창세 27,3-4), 축복을 내릴 때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기쁜 분위기를 돋우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가릿 문서에 한 손에 잔을 들고 다른 손에는 술병을 든 채 축복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사악은 에사우만 축복하려는데,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아들을 골고루 축복하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사우에 대한 극단적인 편애가 이사악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것 같습니다. 창세기 27,5-6은 이사악의 아들 에사우와 레베카의 아들 야곱을 구분하여 마치 남남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레베카와 야곱은 이사악을 속이고 에사우에게 돌아갈 복을 가로채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창세기 27,13은 레베카의 야곱에 대한 집착을 보여줍니다. “내 아들아,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 그런데 야곱은 장자 축복을 위해서는 어머니가 저 대신 저주를 받는 것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에사우는 이방 여인들과의 혼인으로 이사악을 실망하게 하더니(창세 26,34-35), 야곱은 제 성공을 위해 어머니의 안위를 도외시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27,19부터는 야곱이 어머니의 사기 행각에 마지 못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두 번이나 자신이 에사우라고 속이며 하느님까지 끌어들이는 대범함을 보입니다(창세 27,20). [2020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5)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창세 27,22) 이사악이 야곱의 목소리를 듣고 의심한 이유는 단순히 목소리 자체가 달랐기 때문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의 역할을 철저히 준비한 것을 보면, 성대모사까지 연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목소리의 차이를 메우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야곱과 에사우가 이사악에게 말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읽으면 에사우는 이사악에게 최상의 공경을 담아 말하는데, 야곱의 말투는 평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평소에 아버지에게 하던 말투를 고치지 못했기 때문에 야곱은 의심을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만 아들을 편애한 것이 아니라, 아들도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이사악은 야곱에게 속아 그에게 족장의 지위를 포함한 풍성한 축복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 축복이 야곱에게 그대로 주어질까요? 복은 이사악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인데, 하느님마저 거짓말의 도구로 이용한 야곱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관건은 야곱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그가 앞으로 복을 받을만한 인물로 성장하느냐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미 야곱을 축복한 뒤 늦게서야 찾아온 에사우에게 내린 이사악의 축복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네가 살 곳은 기름진 땅에서 저 위 하늘의 이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면서 네 아우를 섬기리라. 그러나 네가 뿌리칠 때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떨쳐 버릴 수 있으리라.”(창세 27,39-40) 다수 학자의 의견처럼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사우를 위한 이사악의 축복은 다르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땅의 기름짐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하늘의 이슬도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칼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 형제를 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떠도는 동안 그 멍에는 네 목에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번역에 따르면, 야곱에게 이미 내린 축복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지만, 에사우가 사냥꾼의 일을 계속하며 떠도는 한 야곱을 섬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벌써 야곱에게 최대의 복을 빌어주고 만 이사악이 사랑하는 아들 에사우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로 보입니다. [2020년 11월 22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6) 야곱이 사기(詐欺)를 치는 일을 도우며 아들 에사우를 잃은(창세 27,45) 레베카는 이제 야곱이라도 지키고자 그를 외갓집으로 피신시킵니다. 에사우는 달아나는 야곱을 뒤쫓지 않는데, 아버지 살아생전에는 아들의 피를 보지 않게 하려는 배려입니다(창세 27,41). 하지만 야곱은 그의 잘못된 욕망의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의 수장이 되고자 했지만,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빈 몸으로 도망쳐 아내를 얻기 위해 20년간 고된 타향살이를 해야 했고, 생전에 다시는 부모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형을 속인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속고 이용당합니다. 또한, 고향으로 돌아올 때도 에사우에게 온 식구가 죽을까 두려워 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형제간의 갈등 끝에 노예로 팔려가는(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 알았지만)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죽음마저 타향인 이집트에서 맞이하고, 죽은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긴 시련의 시간을 겪으며 야곱은 변하고 이스라엘로 새로 태어나지만, 그런데도 그의 인생에서 불행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사악은 자기를 속인 못된 아들이지만 먼 길을 떠나는 야곱을 축복해줍니다(창세 28,3-4). 그런데 이 축복은 이전의 것과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물려받아 전해주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레베카에게 하신 말씀이 실현됩니다. 브에르 세바를 떠난 야곱이 베텔에 도착했습니다. 베텔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7㎞ 떨어진 베이틴이나 32㎞ 정도 떨어진 엘 비레로 추정하는데, 양쪽 모두에서 베텔 성소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은 베텔에서 환시 중에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혹은 층계)를 보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랍비들은 이 천사들을 두 부류로 구분하여, 아래로 내려오는 천사들은 야곱이 가나안을 떠날 때 동행할 천사들이고, 올라가는 천사들은 야곱이 가나안에 있을 때 보호해주던 천사들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천사들의 임무 교대가 이루어지는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항상 야곱과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해석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어떤 곳’(창세 28,11)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그곳’입니다. 이 장소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이 잘 알려진 곳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유다 전승은 이 장소를 이사악이 제물로 바쳐질 뻔했고,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한 모리야산(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또한, 야곱이 주워 머리에 벤 돌이 성전의 제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제단은 흙이나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야곱은 나중에 자신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만날 장소에서 그분을 미리 만난 것입니다. [2020년 12월 6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7) 야곱의 사다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예언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인간들의 세상과 신들의 세상을 이어줄 통로로 지구라트를 건설했고, 이것이 바벨탑 이야기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벨탑이 아니라 예수님이시죠. 야곱은 하느님을 사기를 치는 데 이용했지만,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땅과 후손의 약속을 재확인하시며 희망을 주십니다(창세 28,13-15). 하느님의 자비가 야곱을 변화시킵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변화는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야곱이 감히 하느님께 거래를 제안합니다(창세 28,20-22은 조건문입니다). 야곱이 하느님께서 저의 하느님이 되고, 기념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느님의 집이 될 조건을 제안합니다. 하느님은 야곱이 베텔(하느님의 집)이라 이름을 붙인 곳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심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야곱이 세운 돌기둥은 나중에 베텔 신으로 둔갑하여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돌기둥 숭배는 기원전 4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근동의 가장 오래된 풍습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세기 29,1은 야곱이 동방인들의 땅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하란이 유프라테스강 동쪽에 있음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야곱이 심판을 받고(창세 4,16) 추방된(창세 25,6)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9,2의 우물을 덮은 돌은 네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이물질이 들어가거나 적이 독을 주입하는 것을 막는 용도, 두 번째는 동물이나 사람이 실수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용도, 세 번째는 우물을 위장하는 용도, 네 번째는 공동체의 허락 없이 누군가 임의로 물을 사용하는 것을 막는 용도입니다. 이 네 번째 이유로 우물을 덮은 돌은 혼자서 몰래 들어낼 수 없을 정도의 크기와 무게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돌을 혼자 굴립니다(창세 29,10). 에사우와의 대조로 연약한 이미지를 상상케 하는 야곱이 실은 대단한 장사였던 것입니다. 야곱이 장사였다는 기록은 외경 희년서에도 나옵니다. 희년서에 따르면 그는 스켐에서 7명의 아모리 왕들과 싸워 여섯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강한 남자의 첫인상을 심어주려고 우물에 먼저 와 있던 목자들을 빨리 보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창세 29,7). [2020년 12월 13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8) 야곱이 라헬에게 입을 맞춥니다(창세 29,11). 초면에 과한 행동처럼 보이고 성경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입 맞추는 장면이 드물지만, 고대 근동에서 남녀구분 없이 친구나 친척에게 하는 일반적인 인사가 포옹하고 양 볼에 입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목 놓아 우는 것은 이상합니다. 라헬은 왜 우는지 묻지 않고, 야곱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브에르 세바에서 하란까지 약 950㎞의 고생스러운 여정이 끝난 안도감에서 흘린 눈물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아내가 될지도 모를 여인 앞에서 너무나 초라한 몰골에 자괴감이 들어 울었을까요? 라반과 야곱의 관계는 혈육의 관계에서 주종의 관계로 변합니다. 라반이 품삯을 야곱더러 정하라고 하는데(창세 29,15), 을의 위치에서 정당한 몫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벌어지는 일 또한 라반이 후한 품삯을 주려 야곱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는 짐작을 뒷받침합니다. 물적인 인간 야곱이 임자를 제대로 만났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혈육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듯하지만(창세 29,14), 그가 7년 동안 품삯 없이 일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야 집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창세 29,18-19). 이렇게 힘이 장사인 야곱의 노동력을 7년간이나 공짜로 얻고도 라반은 그를 속입니다. 야곱이 첫눈에 반한 라헬 대신 언니 레아를 아내로 준 것입니다. 레아의 눈은 생기가 없었다고 하는데(창세 29,17), 눈은 고대에 미의 중요한 척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집트 여인들이 생기있는 눈을 만들기 위해 마스카라를 한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형 에사우 행세를 하여 장자권을 가로챈 야곱이 동생 라헬 행세를 한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야곱이 속은 이유는 신부가 7일간의 혼례식 내내 베일을 쓰고 별도로 마련된 방에 머물며 혼례식이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는 관습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은 첫날밤 전에 신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한 부부가 되기 전 신부의 얼굴을 먼저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혼인을 파기하지 못하도록 베일을 쓰는 관습이 생겼다는 설도 있습니다. 참고로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혼례식 기간 일주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에 맞춘 것입니다. 즉, 새 생명의 창조, 아기의 잉태를 기원하는 기간입니다. [2020년 12월 20일 대림 제4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9) 라반의 욕망에 희생된 레아는 가련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9,31의 우리말 번역 ‘사랑받지 못하는’은 직역하면 ‘미움받는’입니다. 레아의 슬픔은 그가 아들들을 낳으면서 한 말들에 담겨있습니다(창세 29,32-33). 이런 레아를 불쌍히 여기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많은 자식을 주셨습니다. 레아의 아들들 이름은 태어날 때의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르우벤의 이름은 레아가 ‘주님께서 나의 괴로움을 보아주셨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합니다. 이 문장의 히브리어 자음은 ㄹ, ㅂ, ㄴ인데 르우벤은 이 세 자음으로 이루어진 이름입니다. 시메온은 레아가 ‘주님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들으시고’라고 말한 데서 유래합니다. ㅅ, ㅁ, ㄴ의 자음으로 이루어진 이름 시메온에는 들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자음 ㅅ과 ㅁ이 들어있습니다. 아들을 둘이나 낳고도 여전히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는 세 번째 아들을 낳으면서 이제는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기를 원하며 아들 이름을 레위로 짓습니다. 레위는 ‘매이다’라는 뜻의 ‘라와’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들을 넷이나 낳은 레아는 네 번째 아들이 탄생할 때 하느님을 찬송합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유다로 짓습니다. 유다의 뜻은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입니다. 하느님께서 불쌍한 레아의 태를 열어주셔서 네 아들이나 낳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 라헬은 몸종 빌하를 통해 아들 단과 납탈리를 얻습니다. 단은 라헬이 ‘내 권리를 찾아주셨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딘’은 희망이 없는 이에게 정의를 보여주는 것을 뜻합니다. 납탈리는 싸움을 뜻하는 ‘납탈’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라헬이 레아에게 이겼다고 생각하여 지은 이름입니다. 레아도 질파를 통해 가드와 아세르를 얻습니다. 가드(다행)의 이름은 라헬이 으스대는 꼴을 보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뜻이고, 아세르(행복)는 많은 아들을 두어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라헬은 임신 촉진제인 합환채까지 복용하지만, 정작 아들을 낳은 이는 출산이 멈추었다고 생각한(창세 30,9) 레아였습니다. 생명의 탄생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린 것입니다. 이 아들들의 이름은 합환채 값으로 받은 잠자리에서 생겼다고 이사카르(값), 이제는 야곱이 잘 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즈불룬(잘해주다)으로 지었습니다. 결국, 라헬도 아들을 낳는데, 하나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더한다는 뜻의 ‘야사프’에서 유래한 요셉으로 이름을 짓습니다. [2020년 12월 27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10) 라반이 점을 칩니다(창세 30,27). 그런데 이 점은 미래의 일을 미리 엿보려는 일반적인 점과는 달리 과거의 일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점을 쳤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어쨌든 점괘는 라반의 부가 야곱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것은 야곱을 통해 다른 이들이 복을 얻으리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창세 28,14). 이렇게 그의 부가 하느님의 사람 야곱 덕분에 이뤄진 것이기에 라반은 뒤탈이 없기 위해서라도 야곱에게 정당한 대가(적어도 그렇게 보이는)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자 야곱은 얼룩지고 점박이거나 검은 양과 염소들을 달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돌연변이로서 그 수가 아주 적습니다. 고대 계약에 따르면 목자는 주인의 가축 중 10~20%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훨씬 적은 수의 돌연변이마저 야곱에게 주지 않으려 빼돌립니다(창세 30,36).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야곱은 짝짓기 철인 6~9월에 튼튼한 양과 염소들이 교미할 때만 흰 줄무늬가 보이게 껍질을 벗긴 나뭇가지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흰 어린양들을 돌연변이들과 짝짓게 하였습니다(창세 30,40의 ‘얼굴을 향하다’라는 표현은 짝짓기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튼튼한 돌연변이 양과 염소는 야곱이 차지하고 허약한 것들만 라반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이런 주술적인 행위는 여러 민간 설화에도 나타납니다. 오늘날도 서양에는 어머니가 입은 옷의 색이 태어날 아이의 성을 결정짓는다는 민간전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유전학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창세기 31,9은 야곱이 주술적인 행위의 효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리신 복으로 큰 부를 이루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야곱은 두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간 라반의 일을 공짜로 해주었지만, 마지막 6년간은 품삯을 받으며 일을 합니다. 그 기간 라반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치기하는(창세 31,7) 등 온갖 꼼수를 부렸음에도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내리시어 그는 큰 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라반이 갈수록 자기 재산은 줄고 야곱의 재산만 느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데다, 받을 유산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라반의 아들들의 불만이 커지는 때 야곱은 꿈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라반이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 떠나는 것을 순순히 허락해줄 것 같지가 않자 몰래 도망치기로 합니다. [2021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11) 라반의 처사에 불만이 많던 레아와 라헬도 야곱의 도망 계획을 따릅니다. 그들은 라반이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할 경우의 생계를 위해 혼인 때 받은 돈까지 가로챈 것처럼 말하는데(창세 31,15), 야곱은 무일푼이어서 라반의 일을 해주는 것으로 혼인 비용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레아와 라헬은 야곱의 품삯 일부를 받을 것을 기대했는데 라반은 딸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깊었던지 라헬은 집안의 수호 신상까지 훔쳐냅니다(창세 31,19). 이 수호 신상들은 ‘테라핌’인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조상들의 지방(紙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집안의 복과 번영, 건강을 기원하는 대상인 동시에 재산을 가장 많이 상속받을 권리, 즉 장자권을 상징했습니다. 라반이 수호 신상을 되찾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온 것을 보면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근동에서 발굴된 수호 신상의 크기는 다양한데, 라헬이 낙타 안장에 숨긴 것을 보면 라반 집안의 것은 크기가 작았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장자권을 속여서 빼앗았는데, 라헬은 라반 가문의 장자권을 훔쳐내니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야곱 집안의 신앙이 아직 한 분 하느님만을 믿는 유일 신앙으로 발전하지 못했음을 알려줍니다. 야곱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때를 틈타 달아나는데, 이 시기는 봄으로서 여름 전에 털이 다시 자라 무더위로부터 양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양털을 깎는 장소는 정해져 있어 그곳에 모여 털을 깎아 말리고 천으로 짰습니다. 고고학자들은 네겝 광야의 팀나에서 양털 깎기가 대규모로 행해졌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양털 깎기가 끝나면 축제가 이어졌습니다. 양털을 깎으러 간 라반은 야곱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사흘 뒤에야 듣게 됩니다(창세 31,22). 라반은 야곱을 길앗 산악지방에서 따라잡습니다. 길앗은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 사이, 요르단강 동쪽에 있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야 겨우 잡은 것입니다. 허겁지겁 달려온 라반은 분통이 터질 일이지만 이미 하느님의 경고를 받은 터라(창세 31,24) 야곱을 폭력적으로 대하지 못합니다. 다만 수호 신상들은 포기할 수 없어 야곱 일행을 수색하는데, 라헬은 ‘몸이 있어’ 일어설 수 없다고 합니다(창세 31,35). 이 표현은 월경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라헬이 움직이지 않는 충분한 핑계가 됩니다. 고대인들은 생리혈을 악마가 머무는 곳으로 믿어 그 피를 보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입니다. [2021년 1월 10일 주님 세례 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12) 라반이 수호 신상을 찾지 못하자 오히려 야곱이 그에게 따집니다(창세 31,36-42).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목자와 양주인 사이의 계약서에는 목자의 의무와 품삯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계약에 따르면 부주의나 실수로 양을 죽게 한 경우는 목자가 그 값을 물어내야 하지만, 맹수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질병 등의 자연적 이유로 죽게 된 양은 물어내지 않습니다. 다만 죽은 양의 가죽이나 뼈 등을 결백의 증거로 양주인에게 가져가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통상 계약상의 의무를 넘어서는 책임을 졌습니다. 그런데도 라반은 꼼수를 써 야곱의 품삯을 가로챘습니다. 야곱의 한 맺힌 불만을 들은 라반은 사과하는 대신 야곱의 가족과 재물을 선심 쓰듯이 말하며 상호불가침 계약을 맺자고 합니다. 계약의 증거로 돌기둥과 돌무더기를 쌓는데, 돌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진 항구성 때문입니다. 계약을 맺은 후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은 근동의 오랜 관습으로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알리는 행위입니다. 다시 길을 떠난 야곱이 하느님의 천사들을 만납니다. 이곳의 이름 ‘마하나임’(창세 32,3)은 진영(陣營)들이라는 뜻으로, 하느님의 진영과 야곱의 진영이 만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만남은 하느님의 군대가 야곱을 보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야곱은 에사우가 4백 명의 장정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들이 무장했다는 보고가 없음에도 겁을 냅니다. 그래서 야곱은 에사우에게 모든 식솔과 가축이 한꺼번에 전멸당하는 것을 피하려고 두 무리로 나누는 한편 총 550마리의 가축을 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선물로 준비합니다. 참고로 야곱은 축산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에사우에게 선물로 바치는 가축 목록(창세 32,15-16)을 보면, 암염소 이백 마리와 숫염소 스무 마리, 암양 이백 마리와 숫양 스무 마리, 암소 마흔 마리와 황소 열 마리, 암나귀 스무 마리와 수나귀 열 마리가 나옵니다. 이들의 성비(性比)는 암염소와 숫염소가 10:1, 암양과 숫양이 10:1, 암소와 황소가 4:1, 암나귀와 수나귀가 2:1인데, 이것은 번식에 가장 적합한 암수 비율이라고 합니다. [2021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13) 야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요르단강 동쪽 지류 가운데 하나인 야뽁 강가에서 정체불명의 인물과 밤새 씨름을 합니다. 유다 전승은 이 인물을 에사우의 수호천사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모든 나라와 개인에게 신적인 수호자가 있다는 고대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해석인데요, 이 해석에 따르면 에사우의 수호천사마저 결국 야곱에게 축복을 내리고 만 것은 장자권이 완전히 야곱에게 넘어간 것을 인정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장자로서 새 이름을 부여받고 긴 밤이 지나고 동이 터 오는 아침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강을 건너야 하는 야곱과 건너지 못하게 가로막는 강의 정령(精靈) 사이의 대결을 봅니다. 이 정령은 밤에는 강하지만 해가 뜨면 힘을 쓰지 못하는 일종의 밤 귀신이며, 그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야곱이 얻어낸 축복은 정령이 가진 초자연적인 힘 일부를 받은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하느님 신앙을 대표하는 야곱이 가나안 토속 신앙을 대표하는 강의 정령과 대결해 승리한 후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야곱 내면의 고뇌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에사우와의 만남을 앞두고 가문의 존립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두려움이 극에 달한 야곱의 자아가 분열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창세기 32,11의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를 ‘나는 둘로 나뉘었습니다’로 번역하여 야곱의 분열된 자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두 자아 가운데 하나는 이전처럼 계략에 의지해 생존을 모색하는 야곱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야곱인데, 둘의 대결에서 승자는 후자라고 합니다. 제 꾀만을 믿던 야곱이 신앙의 인간이 된 뒤에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야곱과 씨름을 한 인물을 하느님(혹은 하느님의 천사)으로 봅니다. 그 자신이 야곱에게 ‘네가 하느님과 겨루었다’(창세 32,29)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도 살아남았다고 합니다(창세 32,31). 그리고 하느님만이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줄 수 있는 분, 즉 실존적 본질을 변화시켜 줄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께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기 위해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어주십니다. [2021년 1월 24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14)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는데, 그 이유는 야곱이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창세기 32,29)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본뜻은 ‘하느님께서 싸우신다.’, 혹은 ‘하느님이 이기신다.’입니다. 하느님의 이름 ‘엘’이 동사와 함께 쓰일 때는 대부분 ‘엘’이 그 동사의 주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이스라엘의 뜻을 본 의미와는 다르게 풀이하여 마치 야곱이 하느님을 이긴 것처럼 표현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야곱이 하느님께 끈질기게 매달려 기어이 축복을 얻어낸 것이 그의 승리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비록 하느님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은 쪽, 즉 패자는 야곱이었지만, 성경 저자들이 선조 야곱의 힘을 과장하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한편, 이 표현이 야곱의 승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하느님과 겨루고도 살아남았고 사람들과 겨루어서는 이긴 사실을 말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이 표현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느님 덕분에 승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준다고 해석합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이제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삶의 주체로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근동인들은 이름이 존재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을 마치 제품의 사용설명서를 갖게 되는 것처럼 그 존재를 지배 내지는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심지어 이름만 안다면 신적인 존재까지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곱의 이름은 하느님께 알려졌지만, 하느님의 이름은 야곱이 알지 못한 사실에서 둘 사이에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은 야곱의 이름을 새로 지어 주시기까지 하니, 야곱은 철저히 하느님의 손아귀에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새 이름을 받은 뒤 다시는 예전 이름 아브람으로 불리지 않지만,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뒤에도 여전히 야곱이라고도 불립니다. 하느님께서 더는 남의 발뒤꿈치를 잡거나 속이지 말라고 이름까지 바꾸어 주셨지만, 야곱은 천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듯합니다. 그래서 그의 앞날에 불행이 연속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21년 1월 31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15) 야곱이 20여 년 만에 에사우를 만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사우는 야곱을 공격하는 대신 달려가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춘 다음 웁니다. 이 행위들은 성조 시대에 중요하거나 반가운 사람을 만나 인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에사우가 이미 야곱을 용서하였음을 의미하니 야곱이 에사우의 복수로부터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행한 조치는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거나 보상하지도 않았는데 에사우가 그를 용서한 것은 하느님의 조건 없는 용서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에사우를 만난 야곱은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는데(창세 33,3), 이 행위는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문서에도 나오듯이 고대 근동에서 신하가 군주에게 드리는 최상의 예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에사우를 주인으로 부릅니다(창세 33,8). 또한, 야곱이 에사우에게 주는 선물의 히브리어는 조공(朝貢)을 의미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창세 33,10). 이렇게 과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세는 지난날의 앙금을 다 털어버린 듯한 에사우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죄를 지은 야곱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선물을 받지 않겠다는 에사우(창세 33,9)에게 기어이 그것을 주는 것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일로 보입니다. 에사우가 선물을 받는 것은 빼앗긴 축복에 대한 배상을 받음으로써 복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야곱의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듯하지만, 그의 불행은 계속됩니다. 아직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완전히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순간 야곱의 편애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여종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가장 위험한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의 아이들을 그 뒤에, 그리고 라헬과 요셉의 맨 뒤에 세웁니다(창세 33,2). 야곱의 회개를 진심으로 보기 어려운 구절들은 더 있습니다. 야곱은 남쪽에 있는 에사우의 영토 세이르로 가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실제로는 서쪽의 스켐으로 갑니다(창세 33,16-18). 그리고 다시는 에사우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거짓을 일삼는 야곱이 스켐에서 하느님의 복을 받을 리가 없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이렇게 행동한 이유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속이는 자는 다른 사람도 자기를 속일 수 있다고 의심하기에 남을 쉽게 믿지 못한답니다. 야곱은 아직 거짓말쟁이입니다. [2021년 2월 7일 연중 제5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16) 야곱이 스켐에 자리를 잡은 뒤 레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디나가 히위 족장의 아들 스켐에게 겁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에 같은 어머니를 둔 오빠들인 시메온과 레위가 스켐인들을 학살합니다. 이들의 행위를 정당한 보복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부당한 보복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유다 전승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는데, 외경 레위의 유언은 하느님께서 야곱 아들들의 행위를 승인하셨다고 하며, 희년서는 레위의 옳은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그의 후손들이 사제직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특히 하느님과의 계약을 상징하는 할례를 복수의 수단으로 이용한 점과 이 모든 과정에 하느님의 뜻을 한 번도 묻지 않은 것을 비판합니다. 이 끔찍한 사건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창세기 34,3은 스켐이 디나를 사랑했다고 하며, 창세기 34,11-12에서 스켐은 디나를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있는 듯 말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34,23은 스켐이 디나를 겁탈한 진실한 이유가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이었을 밝힙니다. 사실 고대 근동에서 강간은 정략결혼을 위한 책략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시리아법과 히타이트법 등에 따르면 처녀를 강간한 남자는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피해자와 결혼하게 되어있는데, 이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4,28-29은 오히려 야곱의 아들들이 스켐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스켐인들과 야곱 아들들의 재물에 대한 욕망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채워질 때까지 겁탈도 마다치 않고 할례를 살인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도 거침없습니다. 창세기 34,31을 보면 야곱 아들들의 분노가 순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스켐에게만 복수하지 않고 모든 스켐인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잡아가고 재산을 약탈한 것은 분명 정당한 복수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들들의 살인과 약탈을 나무라지 않으며, 디나의 안위에 대해서도 묻지 않습니다. 신성한 할례를 학살의 도구로 이용한 일도 모른척합니다. 오직 이 일로 가문을 위기에 빠뜨린 것만 탓할 뿐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아직 자기중심적이며 하느님의 보호도 믿지 못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2021년 2월 14일 연중 제6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17) 강간 사건의 피해자이자 학살의 빌미가 된 디나는 어떤 말도 적극적 행위도 하지 않고 철저히 수동적 대상으로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세 시대에는 이 비극적 사건의 모든 책임을 디나가 뒤집어썼습니다. 디나가 교만했고 어리석었기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유다 전승 창세기 랍바는 심지어 디나가 남자들을 유혹하러 밖으로 나다니다가 강간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자체는 디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근래에는 이 이야기를 디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주석들도 제법 나오고 있습니다. 디나를 주인공으로 한 「The Red Tent」라는 드라마도 제작되었는데, 이 드라마는 다음의 대사로 시작합니다. “수천 년간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 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내 기억은 먼지에 불과했다. 오로지 내 아버지와 형제들의 이름만 기록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당신들의 성경에 나와 있지만, 내 이야기는 그저 각주에 불과했다. 슬프고 폭력적이지만 거의 잊힌 이야기.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지만 어머니와 딸의 인연은 끊어졌고 남자들의 이야기만 전해졌다.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원에만 관심 있는 남자들은 한 소녀의 인생에는 관심이 없었다. 야곱의 외동딸이었던 바로 나, 디나.” 스켐인들을 몰살함으로써 야곱 가문은 그들과 연맹 관계에 있던 가나안 원주민 부족들의 합공을 받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런데 이 위기는 동시에 큰 기회가 됩니다. 야곱 가문은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우상 숭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종교 혼합주의에 빠져 있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면서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게 됩니다(창세 35,2-4). 그동안 지니고 있던 이방 신상들과 귀걸이들을 버리는 행위는 우상 숭배를 그만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방 신상들은 아마 라헬이 아버지의 집에서 훔쳐 나온 테라핌(수호 신상)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귀걸이는 신들의 모습이 새겨진 것으로 일종의 부적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고고학자들이 기원전 20세기에 만들어진 한 여신에게 봉헌되었다는 글이 새겨진 귀걸이를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이 신상들과 귀걸이들을 마치 죽은 이를 매장하듯이 땅에 묻은 일은 우상 숭배와 완전히 단절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한 것을 상징합니다. [2021년 2월 21일 사순 제1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18) 창세기 35,10에 하느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시는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보통 문헌 가설에 따라 이 부분을 씨름 이야기와는 다른 전승에 속한 것으로 설명합니다만,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이스라엘로 거듭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하시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다. 이어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처럼 야곱에게도 후손과 땅을 약속하시는데(창세기 35,11-12),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사악을 통해 야곱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많은 후손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직후, 베텔에서 에프라타로 가던 길에서 야곱이 사랑한 아내 라헬이 둘째 아들 벤야민을 낳다 산고 끝에 죽고 맙니다. 에프라타는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고장으로 나중에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의 경계가 됩니다. 창세기 35,19은 야곱이 라헬을 묻은 장소가 베텔과 에프라타 사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라헬의 무덤이 유다 지역이던 베들레헴에도 있고 벤야민 지역이던 라마에도 있어 서로 진짜라고 다투고 있습니다. 라헬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이 태어난 사실은 인생에서 겪는 고통이 꼭 하느님의 축복이 거두어졌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죽음조차도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음을 알려줍니다. 라헬이 죽기 전 지은 아들의 이름 벤 오니는 우리말 성경 각주에 ‘내 고통의 아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내 힘의 아들’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바꾼 이름 벤야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른손은 무기를 드는 손이니 벤야민은 ‘내 힘의 아들’과 통하는 이름으로서 아들이 강한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벤야민 지파는 인구수는 작지만, 야곱의 유언(벤야민은 약탈하는 이리 아침에는 움켜쥔 것을 먹고 저녁에는 잡은 것을 나눈다: 창세 49,27)처럼 매우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됩니다. 벤야민 전사들은 특히 돌팔매질에 능했는데, 양손을 모두 사용하여 목표를 머리카락 하나 빗나가지 않게 맞힐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판관 20,16; 1역대 12,2). 그리고 이스라엘 최초의 임금 사울이 벤야민 지파에서 탄생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만일 야곱이 벤 오니를 고통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오해할까 우려해 이름을 보다 명확하게 벤야민으로 바꾼 것이라면, 우리말 성경 각주의 번역은 재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2021년 2월 28일 사순 제2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야곱 (19) 가나안을 포함한 근동 지역에 유례없이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야곱은 생존을 위해 아들 요셉 덕분에 기근을 피한 이집트로 이주합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당신이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창세 46,3). 아브라함과 맺었고 이사악을 통해 계승된 계약을 기억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가나안을 떠나야 하는 것을 이 계약이 파기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큰 민족이 될 것이며, 야곱은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창세 46,3-4). 과연 이 말씀대로 식구 수가 70명(창세 46,27)밖에 되지 않던 야곱 집안이 장정만 해도 60만 명이나 되는 큰 민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탈출 12,37). 그리고 야곱은 이집트에서 죽은 후 가나안으로 돌아와 막펠라의 가족묘에 조상들과 함께 묻히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 말씀은 야곱뿐 아니라 그의 이름 이스라엘을 물려받은 후손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곧, 출애굽 사건의 예언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의 아람어 번역인 타르굼 요나탄에서는 하느님께서 야곱의 후손들을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출애굽 사건을 명확하게 일러주십니다. 창세기 46,4에서 하느님은 이집트에서도 야곱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돌아온 고향을 떠나 또 다시 낯선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을 두려워하던 야곱에게 가장 확실한 위안과 격려가 되는 말씀이겠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도 알려줍니다. 고대 근동인들은 각각의 신에게는 고유한 영역이 있어 그곳에만 머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는 그런 한계가 없다고 하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 모두의 주권을 가지신 유일한 창조주이심을 알려줍니다.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17년의 세월이 흘러 나이 147세가 되었을 때 야곱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관습대로 아들 하나하나를 위한 유언을 마친 뒤 야곱은 자신의 시신을 막펠라 가족묘에 묻어 달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마치 삶의 신맛과 쓴맛을 알기 전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처럼 다리를 끌어모은 자세를 취하고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창세 49,33). 이렇게 성경 인물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을 야곱은 비로소 평화로운 안식에 듭니다. [2021년 3월 7일 사순 제3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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