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신앙교리성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생활
참여 문제에 관한 교리 공지
Doctrinal note on some questions
regarding the participation of catholics
in political life
2002. 11. 24.
[차 례]
I. 지속적인 가르침
II. 현재의 문화적 정치적 논쟁의 주안점
III. 현세 질서의 자율성과 다원주의에 대한 가톨릭 교리의 원칙
IV. 특별한 측면에 대한 고찰
V. 결 론
신앙교리성은, 평신도평의회의 의견을 들은 뒤,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생활 참여 문제에 관한 교리 공지라는 이 문서를 발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이 공지는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과, 특히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 생활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가톨릭 신자 정치인들과 모든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다.
I. 지속적인 가르침
1. 지난 20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 일에 참여해 왔다. 그러한 방식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인들의 정치 생활 참여였다. 초기 교회의 한 저자가 말하였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한다.”1) 교회는 성인들 가운데서 정치와 통치에 헌신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겼던 수많은 사람들을 공경한다. 그 가운데서도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된 토마스 모어 성인은 순교로써 “인간 양심의 양도할 수 없는 존엄”2)을 증언하였다. 토마스 모어는 온갖 심리적 압박을 받으면서도 타협하기를 거부하였으며, “합법적 권위와 제도에 대한 변함 없는 충실성”을 결코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돋보였다. 그는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써 “인간이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정치도 도덕에서 분리될 수 없다.”3)는 것을 가르쳤다.
오늘날과 같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국가 운영의 참여자가 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4) 그러한 사회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 새롭고 더욱 완전한 방식으로 정치 생활에 참여하기를 요구한다. 사실, 모든 사람은 국회의원과 정부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 투표를 하거나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공동선에 이익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정치적 해결과 입법적 선택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5) 민주주의 생활은 모든 사람이 “다양하고 보완적인 형태와 차원, 임무, 책임 안에서”6) 적극적이고 책임 있고 헌신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7)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준수하며 국민의 의무를 완수하면서 현세 질서에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주입할 고유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현세 질서의 본질과 정당한 자율성8)을 존중하고, 각자의 고유한 능력과 책임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협력한다.9)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러한 근본 가르침에 따라서, “평신도들은 ‘정치’ 참여를 결코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곧 경제, 사회, 입법, 행정, 문화 등 수없이 많은 여러 분야에서 조직적으로 제도적으로 공동선을 증진시켜야 하는 것이다.”10) 여기에는 공공 질서와 평화, 자유와 평등, 인간 생명과 환경에 대한 존중, 정의와 연대 같은 공동선의 증진과 수호도 포함된다.
이 ‘공지’는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참여 문제에 관한 교회의 완전한 가르침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관해서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핵심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이 공지의 목적은 다만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부합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사회 참여와 정치 참여를 고취시키는 몇 가지 원칙들을 상기시키고자 할 뿐이다.11) 최근의 긴박한 세계적 사건들로, 모호하거나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견해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서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명백히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II. 현재의 문화적 정치적 논쟁의 주안점
2. 오늘날의 시민 사회는 세기말 현상인 새로운 시대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복잡한 문화적 과정을 겪고 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발전은 인간 존엄에 더욱 걸맞은 삶의 조건에 도달한 인류의 진보를 보여 주는 것이다.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책임 의식의 증대는 명백히 공동선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징표이다. 그러나 한편, 사회의 일부 경향들이 입법화를 통하여 조장하고 있는 실질적인 위험들을 외면할 수 없으며, 그것이 미래 세대에게 미칠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 일종의 문화적 상대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성과 자연 도덕법의 원칙들의 쇠퇴와 붕괴를 부추기는 윤리적 다원주의의 개념화와 옹호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더욱이, 그러한 윤리적 다원주의야말로 바로 민주주의의 조건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것을 흔하게 들을 수 있다.12) 그 결과, 국민들은 그들의 도덕적 선택에 대하여 완전한 자율성을 요구하고, 입법자들은 이러한 선택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허울 아래 마치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인생관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듯이, 일반적인 윤리 원칙들을 무시하고 일시적인 문화적 도덕적 경향을 따르는 법률을 제정한다.13) 그와 함께 관용의 가치를 은근 슬쩍 들먹이면서, 가톨릭 신자들을 포함한 많은 국민에게 인간과 공동선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바탕으로 ─ 민주주의에서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 사회와 정치 생활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20세기의 역사는 상대주의의 오류와 더불어, 인간 본성에 뿌리박은 도덕법, 곧 인간과 공동선, 국가에 대한 이해를 좌우하는 도덕법은 없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한 이들 국민들이 옳았음을 증명해 준다.
3. 그러한 상대주의는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과 자연 도덕법과 양립할 수 있는 다양한 정치적 의견들 가운데서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공동선의 요구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을 선택하는 합법적 자유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정치적 자유는 인간의 선에 대한 모든 개념이 동등한 가치와 진리를 지닌다는 상대주의적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 ─ 정치란 주어진 역사적, 지리적, 경제적, 기술적, 문화적 배경 안에서 참된 인간적 사회적 선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구체적인 당면 과제와 다양한 상황에 따라,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정책과 해결책이 제시된다. 하느님께서 각 개인의 자유롭고 책임 있는 판단에 맡기신 현세적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정치적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더 나아가 단 하나의 해결책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앙이나 도덕법이 요구할 때에는 현세적 문제들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을 제시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14) 그리스도인들은 “현세 사물의 관리에서 서로 다르지만 정당한 의견들을 인정하여야”15) 하는 한편, 도덕적 상대주의를 반영하는 다원주의의 개념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것으로 간주하여 거부하여야 한다. 민주주의는, 사회 생활의 토대이며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는 참되고 견고한 윤리 원칙의 바탕 위에 세워져야 한다.
구체적인 정치 활동 차원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양한 정당들이 있을 수 있으며, 가톨릭 신자들은 특히 의회를 통하여 자기 나라의 공공 생활에 이바지할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있다.16) 이는, 사회 질서 확립과 관련한 일부 선택이 우연한 것일 수도 있고, 동일한 근본 가치를 실현하거나 보장하는 데에 이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 다양하며, 정치 이론의 기본 원칙들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고, 정치 문제의 대부분이 전문적인 복잡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원칙들이나 본질적 가치들을 선택할 때 모호한 다원주의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현세적 선택의 합법적 다양성은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생활 참여의 기원으로서,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사회적 가르침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가톨릭 평신도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그들의 정치 생활 참여를 평가함으로써, 그러한 참여로써 현세적 실재에 대하여 일관된 책임을 지도록 하여야 한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정치적 선택과 관련한 국민들의 직접 참여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바탕을 둘 때에만 그것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17)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생활 참여도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증거뿐 아니라 신자들의 일치와 내적 결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국가의 바탕이 되고 있는 민주주의 구조는 인간 중심성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면 매우 취약해질 것이다. 인간 존중만이 민주주의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권 수호는 개인이든 단체든 국민이 국가의 생활과 통치에 적극 참여할 수 있게 하는 필수 조건이다.”18)라고 가르친다.
4. 과거 세대들이 결코 직면한 적이 없는 문제들을 포함하여 오늘날 일련의 복잡한 문제들은 여기에서 파생한다.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진보는 인간의 양심을 동요시킬 뿐 아니라 근본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윤리 원칙들을 존중하는 해결책을 요구한다. 또한 문화의 형성과 사회적 행동이 인간의 삶과 미래에 미칠 영향은 중시하지 않은 채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을 공격하는 법률안들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인간 생명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이와 관련한 모든 사람의 책임을 사회에 환기시킬 권리와 의무가 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의 변함없는 가르침을 펴시면서 입법 기구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은 인간 생명을 공격하는 모든 법에 “반대해야 할 중대하고 명백한 의무”가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셨다. 그들은 모든 가톨릭 신자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법들을 옹호하거나 그러한 법들에 찬성하는 투표를 해서는 안 된다.19)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이미 시행하고 있거나 표결에 부쳐질 낙태 허용법을 뒤엎거나 폐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과 관련하여 발표하신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에서 말씀하셨듯이, “고의적 낙태에 대해서 완전히 개인적으로 반대한다는 것이 잘 알려진 선출된 관리가, 낙태에 찬성하는 그러한 법이 일으키는 해악에 제한을 가하고, 그러한 법이 일반 여론과 공중 도덕 차원에서 만들어 내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감소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제안들을 지지하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다.”20)
이러한 맥락에서, 올바른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과 도덕의 근본 내용에 위배되는 정책이나 개별법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완전히 일치되어 있으므로 몇몇 특정 요소를 분리시켜 가톨릭 교리 전체에 해를 주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교회의 사회 교리 가운데 한 가지 측면인 정치적 참여만으로 공동선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가톨릭 신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가톨릭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진리가 선포되고 실천될 수 있도록 정치 생활에 참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정치 활동이 예외와 타협, 타락을 허용하지 않는 윤리 원칙과 맞부딪칠 때 가톨릭 신자의 참여는 더욱 분명해지고, 책임감을 띠게 된다. 근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윤리적 요구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절대적 선과 관련된 도덕법의 본질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낙태와 안락사(윤리적으로 정당한 결정인 과도한 치료를 하지 않는다는 결정과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에 관한 법들이 그러한 경우이다. 그러한 법들은 임신[受精]에서 자연사까지 생명의 기본권을 옹호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배아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하여야 할 의무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와 함께, 가정도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일부일처혼에 기초하여 보호되고 육성되어야 하며, 현대의 이혼법에 맞서 가정의 일치와 안정을 보호하여야 한다. 다른 형태의 동거가 결코 혼인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법으로 인정받아서도 안 된다. 자녀 교육과 관련한 부모의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세계 인권 선언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마찬가지로, 소수민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현대적 노예 형태(예를 들면 약물 남용, 매춘 등)의 해방도 고려하여야 한다. 그에 더하여, 종교의 자유와 경제 발전에 대한 권리도 있다. 이러한 권리는 “모든 개인과 가정과 단체의 권리와 그 권리 행사가 인정”21)받게 하는 인류의 연대와 보조성의 원리, 사회 정의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인간과 공동선에 이바지한다. 마지막으로, 평화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일부 평화주의적이고 관념론적인 견해들은 때때로 평화의 가치를 세속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관련 문제들의 복잡성을 무시하는 단순한 윤리적 판단이 문제가 되는 경우들도 있다. 평화는 언제나 “정의의 결과이며 사랑의 결실이다.”22) 평화는 폭력과 테러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철저한 거부와 모든 정치 지도자의 지속적이고 깨어 있는 참여를 요구한다.
III. 현세 질서의 자율성과 다원주의에 대한 가톨릭 교리의 원칙
5. 다양한 감수성과 문화를 반영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그러한 문제들에 접근하기에 합법적일 수 있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다원주의 원칙이나 정치 생활에 참여할 평신도의 자율성을 내세워, 근본적인 윤리적 요구들을 손상하거나 훼손하고 공동선에 해를 끼치는 정책들을 절대로 지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신앙 고백의 가치’가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윤리 계명은 인간 본성 자체에 뿌리박고 있으며, 자연 도덕법에 속하기 때문이다. 윤리 계명은 그것을 수호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은 이러한 윤리 계명들을 언제 어디서나 확인하고 옹호한다. 그것은 교회가 인간과 시민 사회의 공동선에 관한 진리에 봉사하는 것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책들은 바로 인간의 존엄과 참된 인간 발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가치의 원칙에 의존하여야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6. 흔히 ‘가톨릭 평신도들의 정치 참여의 정당한 자율성’에 대한 호소는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각자의 양심에 따라 사회의 공동선을 증진하는 것은 ‘신조주의’나 종교적 불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가톨릭의 도덕 교리에서, 정치나 사회 영역이 도덕성의 영역에서는 구애를 받는다 하더라도 종교와 교회의 영역에 대해서는 구애를 받지 않고 정당한 자율성을 가진다는 것은 가톨릭 교회가 달성해 왔고 인정해 온 가치이며, 현대 문명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다.23)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종교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을 혼동함으로써 빚어지는 위험들을 여러 차례 경고하셨다. “종교의 영역과 정치 사회의 영역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마땅히 고려하지 않고 특수한 종교적 규범을 국법으로 삼거나 삼으려 할 때에는, 극도로 불안한 상황이 야기됩니다. 실제로, 종교법과 시민법을 동일시할 경우 종교의 자유를 질식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 더 나아가서는 양도할 수 없는 다른 인권들을 제한하거나 부정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24) 모든 신자는 (신앙 고백, 예배, 성사 거행, 신학 교리, 종교 권위자들과 신자들 사이의 교류와 같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활동들은 국가의 책임 밖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국가는 국가 질서와 관련된 문제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활동들을 간섭해서도, 또 이러한 활동들을 요구하거나 금지해서도 안 된다. 국민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고 공무를 배분하는 일이 국민들의 종교적 신념이나 활동에 좌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과 모든 국민이 성실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합법적인 수단에 따라 사회, 정의, 자유, 인간 생명 존중에 관한 도덕적 진리를 증진하고 수호할 권리와 의무는 그 밖의 다른 인간 권리들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교회가 이들 진리의 일부를 가르친다는 사실은, 그러한 진리에 헌신하는 국민들의 참여의 정치적 합법성이나 정당한 ‘자율성’을 축소시키지 않으며, 그러한 진리들을 인식하는 데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담당하는 합리적인 연구나 승인의 역할과도 무관하다. 비록 특정 종교가 그러한 진리들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율성’은 무엇보다 인간의 사회 생활에 관한 자연스러운 지식에서 얻는 진리들을 존중하는 사람의 태도를 말한다.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 생활에서 실천하는 고유한 자율성을 교회의 도덕적 사회적 가르침에서 벗어난 원칙의 주장과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의 교도권은 이 영역에 개입하여 정치력을 행사하거나, 있을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가톨릭 신자들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말살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보다, 교회는 그 고유한 임무에 따라, 신자들 특히 정치 생활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양심을 가르치고 밝혀 주어 그들의 활동이 언제나 인간의 완전한 발전과 공동선에 이바지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교회의 사회 교리는 개별 국가들의 정부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가톨릭 평신도들이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는 자기의 양심 안에서 도덕적으로 일관성을 지녀야 할 의무와 관련된 것이다. “평신도의 실존에 두 가지 병립된 생활은 있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그 가치와 요구를 지닌 이른바 ‘영신’ 생활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 생활과 노동, 사회적 관계, 정치, 문화 생활 등 이른바 ‘세속’ 생활이 따로 있을 수는 없다. 바로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그 모든 실존과 활동 영역에서 열매를 맺는다. 실제로, 평신도 생활의 매우 다양한 모든 영역이 하느님의 계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모든 영역이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봉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계시되고 구현되는 ‘역사적 자리’가 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모든 활동, 모든 상황, 모든 구체적 책임 ─ 예컨대, 노동의 숙련과 연대성, 가정 안에서 사랑과 헌신, 자녀 교육, 사회 봉사와 정치 생활, 문화 분야에서 진리 추구 등 ─ 은 ‘믿음, 바람, 사랑의 끊임없는 실천’(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사도직 활동」[Apostolicam actuositatem], 4항)을 위하여 하느님의 섭리로 마련된 기회들이다.”25) 정치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양심에 따라 생활하고 행동하는 것은 정치와 동떨어진 견해나 일종의 신조주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활동을 통하여 더욱 정의롭고 인간 존엄과 더욱 일치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구체적으로 이바지하는 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제안은 자유롭게 논의되고 검토된다. 개인의 양심에 대한 존중을 근거로, 양심에 따라 행동할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의무가 그리스도인을 정치 생활 참여의 적합성에서 떼어 놓는다고 여기면서, 그리스도인이 공동선에 대한 신념에 따라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합법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편협한 세속주의의 죄를 짓는 셈이다. 그러한 입장은 그리스도교의 공공 생활이나 정치 생활 참여를 모두 거부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자연 윤리 자체의 가능성마저도 거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합법적 다원주의나 다름없는 도덕적 난맥상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더욱이 그리스도교의 주변화는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나 민족 간의 일치를 위해서도 좋은 징조가 아니다. 사실, 그것은 문명의 정신적 문화적 토대 자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26)
IV. 특별한 측면에 대한 고찰
7. 최근 몇 년 동안, 가톨릭의 원칙들 위에 세워진 몇몇 기구들이 근본적인 윤리 문제에 관한 교회의 도덕적 사회적 가르침과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정치 세력이나 운동을 지지한 경우가 있었다. 그리스도인 양심의 기본 원칙에 위배되는 그러한 활동들은 스스로를 가톨릭이라고 규정하는 기구나 단체들의 자격에 걸맞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부 국가들의 몇몇 가톨릭 정기 간행물들도 가톨릭 신자들이 누리는 정치적 자율성의 개념을 잘못 해석하거나 위에서 언급한 원칙들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정치적 선택에 대하여 모호하거나 부정확한 시각을 나타내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요한 14,6)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가톨릭 전통의 가치와 내용을 새롭게 요구하는 복음의 문화를 건설하는 데에 더욱 큰 노력을 기울이도록 요구받고 있다. 가톨릭 문화의 일종의 분산화를 막기 위해서 현대 문화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톨릭의 정신적, 지적, 도덕적 유산의 열매를 제시하는 것이 오늘날의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나라의 정치 생활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이룬 문화적 업적과 성숙한 경험은, 최근 역사에서 완전한 실패와 허점을 드러낸 정책들과 비교하여 어떠한 ‘열등 의식’도 불허한다. 가톨릭 신자들의 사회 참여가 단순히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사실을 축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기본적인 차원에서, 신앙과 도덕에서 비롯된 견해들을 받아들이고 정당화하고 실행할 수 있는 문화가 없다면, 그러한 변화는 언제나 빈약한 토대에 의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역사적 차원에서 사람들이 불완전하고 급격한 변화를 겪기 쉬운 상황 속에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식해 왔다.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엄격한 틀을 강요하고자 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유토피아적 시각을 가진 정치적 입장과 활동을 거부하여야 한다. 그러한 시각은 성서 신앙의 전통을 하느님이 부재하는 일종의 예언적인 시각으로 전환시켜,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을 헛되게 하거나 재해석하는 단순한 지상적 희망을 지향하게 함으로써 종교를 악용한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진정한 자유란 진리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진리와 자유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흥망을 함께한다.”27) 진리를 말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 사회에서는, 참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방식이 줄어들고 방종과 왜곡된 개인주의로 빠져들게 되며, 인간과 전체 사회의 선익이 보호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8.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여론에서 흔히 올바로 인식되지도 정립되지도 못한 진리 하나를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곧 양심의 자유에 대한 권리와 특히 종교 자유에 대한 권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Dignitatis humanae)에서 가르치듯이, 종교 간의 또는 인간이 만든 문화적 제도 간의 존재하지 않는 평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존엄에 기초한 것이다.28) 바오로 6세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의회는 결코 종교 자유의 권리가 갖는 근거를, 모든 종교와 모든 가르침은 잘못된 가르침까지도 어느 정도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 자유의 권리는 인간이 참된 종교를 추구하거나 신봉할 때 양심을 억압하려고 하는 외부의 제한에 굴복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인간의 존엄에 기초를 둔다.”29) 그러므로 양심의 자유와 종교 자유에 관한 가르침은 종교적 무차별주의와 종교 상대주의를 비난하는 가톨릭 교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30) 오히려 완전히 일치한다.
V. 결 론
9. 이 공지에 담겨 있는 원칙들을 통하여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상기시켜 준 것처럼, 그리스도인 생활의 일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신앙과 생활, 복음과 문화 간의 일치에 빛을 비춰 주는 것이다. 공의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정신에 따라 현세의 자기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하도록 권고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고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때문에 자기의 현세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바로 신앙을 통하여 각자 부름 받은 소명에 따라 현세 의무를 더더욱 이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 인간적, 가정적, 직업적, 학문적, 기술적 노력을 종교적 가치와 결부시켜 …… 자기의 온갖 현세 활동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다. …… 그 종교적 가치의 드높은 질서 아래에서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지향하게 된다.”3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2002년 11월 21일의 알현에서 신앙교리성 정기 총회가 인준한 이 공지를 승인하셨으며, 그 발표를 명령하셨다.
로마 신앙교리성 사무처에서
2002년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차관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대주교
<원문 Doctrinal note on Some Questions Regarding the Participation of Catholics in Political Life: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 4(1777), 2003년 1월 22일자, 5면>
1.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간」(Epistola ad Diognerum), 5,5;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2240항 참조.
2. 요한 바오로 2세, 자의 교서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함」(Quibus Sanctus Thomas Morus Gubernatorum, Politicorum Virorum Ac Mulierum Proclamatur Patronus), 1항: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93(2001년), 76면.
3. 같은 곳, 4항.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31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1915항 참조.
5. 사목 헌장, 75항 참조.
6.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 42항: 「사도좌 관보」 81(1989년), 472면. 이 교리 공지는 평신도들의 정치 생활 참여와 관련된 것이다. 교회의 주교들은 사회 질서에 관한 윤리 원칙들을 제시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러나 정당에의 실질적인 참여는 평신도들에게 유보되어 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60항). 성직자성, 「사제의 직무와 생활 지침」(Directory on the ministry and life of priests, 1994.3.31.), 33항 참조.
7. 사목 헌장, 76항.
8. 같은 곳, 36항 참조.
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사도직 활동」(Apostolicam actuositatem), 7항;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36항; 사목 헌장, 31.43항 참조.
10. 「평신도 그리스도인」, 42항.
11. 지난 두 세기 동안 교황 교도권은 사회 질서와 정치 질서에 관한 주요 문제들에 관하여 언급해 왔다. 레오 23세, 회칙 Diuturnum illud: 「사도좌 관보」 14(1881-1882년), 4면 이하; 회칙 Immortale Dei: 「사도좌 관보」 18(1885-1886년), 162면 이하; 회칙 Libertas proestantissimum: 「사도좌 관보」 20(1887-1888년), 593면 이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사도좌 관보」 23(1890-1891년), 643면 이하; 베네딕토 15세, 회칙 Pacem Dei munus pulcherrimum: 「사도좌 관보」 12(1920년), 209면 이하; 비오 11세, 회칙 「사십주년」(Quadragesimo anno): 「사도좌 관보」 23(1931년), 190면 이하; 회칙 Mit brennender Sorge: 「사도좌 관보」 29(1937년), 145-167면; 회칙 「하느님이신 구세주」(Divini Redemptoris): 「사도좌 관보」 29(1937년), 78면 이하; 비오 12세, 회칙 Summi Pontificatus: 「사도좌 관보」 31(1939년), 423면 이하; Radiomessaggi natalizi 1941-1944; 요한 23세, 회칙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사도좌 관보」 53(1961년), 401-464면;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사도좌 관보」 55(1963년), 257-304면; 바오로 6세,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사도좌 관보」 59(1967년), 257-299면; 교황 교서 「팔십주년」 (Octogesima adveniens): 「사도좌 관보」 63(1971년), 401-441면.
12.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 46항: 「사도좌 관보」 83(1991년), 850-851면;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 101항: 「사도좌 관보」 85(1993년), 1212-1213면; 이탈리아 의회에서 한 연설, 5항: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2002년 11월 15일자 참조.
13.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 22항: 「사도좌 관보」 87(1995년), 425-426면 참조.
14. 사목 헌장 76항 참조.
15. 같은 곳, 75항.
16. 사목 헌장, 43.75항 참조.
17. 같은 곳, 25항 참조.
18. 같은 곳, 73항.
19. 「생명의 복음」, 73항 참조.
20. 위와 같음.
21. 사목 헌장, 75항.
22. 「가톨릭 교회 교리서」, 2304항.
23. 사목 헌장, 76항 참조.
24. 요한 바오로 2세, 1991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평화를 원하면 모든 사람의 양심을 존중하라”, 4항: 「사도좌 관보」 83(1991년), 414-415면.
25. 「평신도 그리스도인」, 59항.
26.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청 외교단에게 한 연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2002년 1월 11일자.
27.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90항: 「사도좌 관보」(1991년), 75면.
2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Dignitatis humanae), 1항: “먼저, 거룩한 공의회는 인간이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하느님께서 직접 인류에게 알려 주셨음을 천명한다. 우리는 이 유일한 참 종교가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 안에 있음을 믿는다.” 그렇다고 교회가 다른 종교 전통들에 대하여 가지는 참된 존중심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그들 종교 전통 안에도 ‘진리와 선의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16항;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Ad Gentes), 11항;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 2항;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 55항: 「사도좌 관보」 83(1991년), 302-304면; 교황청 신앙교리성,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 2.8.21항: 「사도좌 관보」 92(2000년), 742-765면 참조.
29. 바오로 6세, 추기경 회의와 로마 고위 성직자들에게 한 연설: Insegnamenti di Paolo VI, 14(1976), 1088-1089면.
30. 비오 9세, 회칙 Quanta cura: 「사도좌 관보」 3(1867년), 162면; 레오 13세, 회칙 Immortale Dei: 「사도좌 관보」 18(1885년), 170-171면; 비오 11세, 회칙 Quas primas: 「사도좌 관보」 17(1925년), 604-605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2108항; 「주님이신 예수님」, 22항 참조.
31. 사목 헌장, 43항; 「평신도 그리스도인」, 59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