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사목교서 ‘성서의 해Ⅱ’ 특집] 요한 1·2·3서 - 사랑으로 드러나는 친교 오늘 우리는 ‘요한 서간들’ 1·2·3서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들은 「야고보서」, 「베드로 1·2서」, 「유다서」와 함께 ‘가톨릭 서간’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요한’이라는 저자의 이름으로 전승되기 때문에 「요한 복음서」, 그리고 「요한 묵시록」과 함께 ‘요한계 문헌’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요한 1·2·3서는 모두 같은 저자에 의해 쓰인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어휘 사용이나 문체, 사상적 흐름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서간들은 사도 요한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요한 복음과 마찬가지로 이 문헌들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아마도 사도 요한, 요한 21,20)의 전통을 계승하는 소위 ‘요한 공동체’에서 탄생한(100년경) 작품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자신을 “원로”(2요한 1; 3요한 1)라고 밝히고 있는 저자는 공동체 내에서 상당한 권위를 지녔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수신인을 따로 언급하지 않는 요한 1서가 요한계 전통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서간이라면, 요한 2·3서는 어느 특정 수신인 또는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며 정통 신앙을 위협하는 이들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이 서간들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 4,3; 2요한 7), “거짓 예언자”(1요한 4,1), “거짓말쟁이”(1요한 2,22), “속이는 자”(2요한 7) 등으로 불리는 이들은 처음에는 요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었으나, 영지주의(靈知主義)적 사고에 갇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살과 피를 통해 육화(肉化)하셨을리 없다고 생각하며 인간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오류에 빠졌던 것으로 보입니다(2요한 7). 게다가 그들은 스스로가 하느님을 잘 알고 또 빛 속에 머물고 있기에 자신들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1요한 1,8)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1요한 2,4.9). 이러한 오류에 맞서 저자는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1요한 1,1), 즉 공동체가 처음부터 전해 받은 정통 신앙을 다시금 굳건히 세우고자 합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1요한 4,2)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1요한 2,2)이 되셨음을 고백할 필요성과 더불어, 이웃과 형제애를 나누는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느님을 아는 그분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1요한 3,14). 이처럼 올바른 신앙을 간직한 채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1요한 3,18; 2요한 1; 3요한 1)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사는 이들이 아니라 빛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빛 자체이신 하느님과 친교(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를 나누게 되는데, 이 친교는 형제들과 나누는 친교로 반드시 확장됩니다(1요한 1,7). 따라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룬다고 말하면서, 즉 자신이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주변의 형제들을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이고, 아직도 어둠 속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1요한 1,6). 하느님 안에 머물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1요한 2,6)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끊임없이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아가페)에 관련된 어휘(ἀγάπη, ἀγαπητός)는 요한의 세 서간에서 무려 서른 한 번 등장합니다. 특히 1요한 4,7-21은 ‘사랑의 대헌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이들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길 바라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늘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야 할 가장 큰 계명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함께 음미해 보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7-11). [2020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인천주보 3면, 정천 사도 요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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