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순례 - 구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카인과 아벨 태초의 범죄로 인하여 멀어진 하느님과 인간, 땅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갑니다. 사람과 그 아내의 불순종의 죄는 창세기 4장의 카인과 아벨의 때에 이르면 형제 살해로 확대됩니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사람과 그 아내는 카인과 아벨을 낳았고, 카인은 농부가, 아벨은 양치기가 되었습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하느님께 바쳤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하느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지만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카인은 몹시 화를 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카인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는지 성경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저자가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결정이 어떤 것이든 그것에 대한 인간의 바람직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데 더 초점을 둔 까닭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탈출 33,19) 하느님께서 왜 그런 선택을 내리시는지 누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누가 하느님께 이런저런 선택을 내리시도록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저자는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불공평함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카인은 하느님의 선택에 불만을 품고 화를 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죄에 굴복하지 말라고 조언을 하십니다.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7) 여러분이 만약 카인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이런 순간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왜 카인은 하느님께 직접 여쭤보지 않았을까요? 왜 자신의 제물은 받아주지 않으시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까요? 만약 그가 하느님을 신뢰하였다면, 그분이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분임을 믿었다면, 카인은 하느님께 직접 하소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그런 말씀을 직접 드릴 수 있을 만큼 그분을 가깝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화를 내는 그를 찾아오실 만큼 그를 사랑하시는데 카인은 그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죽여 버립니다. 이번에도 하느님께서 먼저 그를 찾아오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스스로를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만 카인은 그것마저 거부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는 서로를 지키고 돌보도록 맺어주신 형제 관계를 거부합니다. 카인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과 땅의 관계는 더욱 악화됩니다. 카인은 저주를 받아 아벨의 피로 물든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아담이 이마에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만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아난 땅에서 소출을 얻을 수 있었다면, 이제 카인은 땅을 부쳐도 수확을 얻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제야 카인은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하느님께 직접 호소합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분인 동시에 자비하신 분이시기에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도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셨고, 그를 죽이는 자는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놀랍기만 한 죄와 심판과 자비의 삼중주입니다. [2020년 12월 27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가톨릭마산 8면, 김영선 루시아 수녀(광주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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