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위의 7687번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서의 내용에 본인이 동의하기 때문에 올린 것입니까?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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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소순태 | 작성일2014-03-24 | 조회수1,521 | 추천수0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예" 혹은 "아닙니다" 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답변주실 것을 꼭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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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4년 3월 29일] 게시자 주: 다음은 "200주년 신약성서"에서,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아무런 소제목이 없는, 요한 복음서 20,1-10에 대한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서"에 주어진 해설과 주석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 해설과 주석들은,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새 번역 성경"에서 "부활하시다" 라는 소제목이 붙은, 요한 복음서 20,1-10에 대한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의 전통적 해석과 정면으로 배치되므로, 결코 신뢰하거나 혹은 동의하지 말 것을 권고드립니다:
(발췌 시작) 빈 무덤 발견 ㅡ 예수 부활
이 대목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시몬 베드로와 "애제자"에게 그 사실을 알린 일(1-2절)과 그 두 제자가 예수의 빈 무덤을 확인 한 일(3-10)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발현사화(11-18절)에서 계속 언급된다. 이런 맥락 가운데 두 제자에 관한 내용이 삽입된 셈이다. 공관복음(마르 16,1-8//)과 일치하는 점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빈 무덤에 대한 목격 증인으로 언급된 내용이다.
공관복음에는 다른 여자들도 보도되는 데 비해,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2절: "우리는 ...") 가운데 혼자가 아니었음이 전제될 뿐이다. 베드로가 예수의 무덤에 갔다는 내용도 루카복음에만 보도된다(24,12). 따라서 "애제자"에 관한 내용(2-5.8-9절 참조)은 요한복음의 독자적 전승으로서 나중에 삽입되었다는 추정을 배제할 수 없다. 그 제자의 믿음(8절)과 예수의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의 몰이해(9절)는 상충되고, 바로 이 점이 그 추정을 반증한다.
대조적이고 상반되는 표현, 즉 "보다"(1.5.6.8절)와 "모르다"(2절) 또는 "깨닫지 못하다"(9절)란 표현은 빈무덤사건이 신비스러운 일로 전해져 왔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 두제자가 에수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서 그 무덤을 떠나 집으로 갔다는 내용(9-10절)으로 인해 빈무덤 사건이 곧 예수의 부활신앙의 근원은 아니었음이 명시된다.
* "사람들이 무덤에서 주님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분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빼돌렸다는 당시 유다인들의 소문(마태 28,13-15 참조)과는 달리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가져가 버렸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다른 대목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13.15절 참조). 물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부활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주님"이란 존칭에 대한 이해 13,13 주석 참조).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 없다는 사실을 두 제자에게 알림으로써 급히 무덤에 가서 확인토록 했을 따름이다.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에 찾아간 이가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가 아님을 시사한다. (마르 16,1-3// 참조). 일부 사본에는 "우리" 대신 "나는"으로 되어 있으나(13절 참조) 본문비판의 원칙에 따라 전자에 더 신빙성을 둔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마르 16,1// 참조)과 달리 무덤에 찾아간 동기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공관복음처럼 예수의 시신에 도유하러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장례 때 이미 도유했기 때문이다 (19,40). 아마도 슬픔 때문에 곡하러 갔을 것이다(11,31 참조).
* 둘은 같이 달렸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앞서 달려 무덤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몸을 굽혀서 염포들이 놓여 있는 것을 들여다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않았다." : 예수와 "애제자"의 관계가 시사된 듯하고(13,23-25; 19,26-27; 21,7.20-23 참조). 베드로의 권의 있는 위치(6,69; 21,15-19 참조)와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서 역활(1코린 15,4-5 참조). 곧 위계질서 가 반영된 듯하다. 아무튼 경주로 표현되듯이 베드로와 "애제자"의 어떤 경쟁임은 분명하다. 아마도 저자는 "애제자"가 베드로에게 모든 우선권을 내주지만 베드로보다 크지도 작지도 않다고 말하고자 "애제자"를 전면에 내세운 듯하다(13,23-25; 19,26-27; 21,20-23 참조).
* 그러자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보니, 염포들이 놓여 있었고, 또한 그분의 머리를 덮었던 수건은 염포들과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 : 이 빈무덤사화의 전개과정에서 돋보이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눈으로 본 대상들이 점점 극적으로 고조되며 묘사된다는 점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임구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애제자"는 무덤 안에 놓인 "염포들"을 보았으며, 베드로는 "염포들"과 "수건"을 보았다.
이런 묘사는 저자의 의도가 담긴 문학적 기교로 여겨진다. 즉, 베드로의 권위와 역활이 반영되며 (5절 주석 참조), 그들이 눈으로 본 대상들은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일종의 표징으로 여길 수 있다. 부활한 예수는 새로운 천상적 실존을 취했기 때문에 "염포들"이나 "수건"을 남겨놓고 무덤을 떠나간 것이다. "염포들" 옆에 "수건"이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는 묘사는 "애제자"가 믿음을 가지게 된 맥락(8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생한 라자로의 얼굴이 수건으로 감겨져 있었다는 묘사(11,44) 와 비교할 때, 예수는 소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표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 그제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 빈무덤사화의 절정이다. "애제자"는 무덤 안에 들어가 정황을 보자 즉시 예수의 부할을 믿게 되었 다는 것이다(21,7 참조). 무덤 안의 정황은 예수 부활의 표징이요. 동시에 증언의 역활을 하게 된 셈이다.
* 사실 그들은 아직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 빈 무덤 또는 예수 부활에 대한 두 제자의 불신이나 놀라움을 전체한(루카 24,11-12 참조) 이 설명은 현 문맥에서 "애제자"의 믿음(8절)에 상충되지만, 내용상 그 믿음을 역으로 더욱 강조하는 역활을 한다(간접적으로는 베드로의 믿음도 함축된다). 그러나 막달라와 베드로는 빈 무덤을 보고도 아직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으로 언급된 맥락에서 볼 때, 이 구절은 오히려 저자의 전승자료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애제자"에 관한 언급은 추가된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1-10절 제목주석 참조).
"성경"은 여기서 성경 말씀 전체를 가리키고(2,22; 10,35 참조) 인용된 말("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은 공관복음의 선포적 수난예고(마르 8,31//))와 관련된 말로서 특히 루카복 음의 빈무덤사화(24,7)와 맥락을 같이한다.
루카복음은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이 성경에 이미 기록된 대로라고 보도한다(24,25-27.44-46 참조: 1코린 15,4). "그들은 아직도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란 말은 후대 신학적 성찰과 예수 부활을 통해 얻게 된 새오룬 성경 이해를 시사한다(2,22 주석 참조). 루카복음도 흡사한 말을 한다(루카 24,45)
* 그래서 제자들은 다시 자기들의 집으로 물러갔다." : 제자들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예수 부활이 시사된 빈무덤사건과 매우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9절과 함께 원래 전승으로 보는 한. "애제자"가 예수의 빈 무덤을 보고 믿게 되었다는 것(8절)이 오히려 어색한 감을 준다. 부활신앙은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보고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이 구절에는 믿음에 관한 보도가 없었을 것이다. 즉, 원래 전승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남아 있었고(11절 참조), 아직 믿음에 이르지 못한 베드로만 집에 간 것으로 보도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이상, 발췌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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