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반장 월례연수]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 : 새로운 삶의 시작 수난 마르코 복음이 전해주는 수난 이야기는 어두운 분위기 가운데 시작되어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점차 고조됩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올리브산으로 가시어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흩어지리라.”(14,27)고 성경의 말씀을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겟세마니에 가셔서는 기도 중에 공포와 번민에 휩싸여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14,34) 그리고는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14,36 참조). 단 한시간도 함께 깨어 있지 못하는 제자들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된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14,49). 이에 제자들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보이는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달아납니다(14,50). 마르코 복음에서만 전해주는 알몸으로 달아난 제자는 제자들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유기된 예수님의 모습을 더욱 상징적으로 부각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첫 제자들은(1,18-20) 참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10,28) 그분을 따랐지만, 이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완전히 버리고 맨몸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한편에서는 어떻게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번뇌과 고통 가운데 십자가를 멀리해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이는 구약에서 이어받은 죽음에 대한 기본 관점을 고려하지 않은 데서 기인합니다. 창조신학에서 볼 때 인간은 자기 삶에서 하느님의 현존에 참여하여 죽지 않게 창조되었지만, 태초의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상실하고 죽음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사고방식 안에서 죽음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였고,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적’(1코린 15,26)이었습니다. 따라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님에게도 죽음과의 투쟁은 크나큰 시련의 과정이었고 피하고 싶은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 이후에도 ‘죽음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1코린 15,26).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히시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최고의회에서 끌려가 신문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을 뒤따라간 베드로는 마당 뜰에서 불을 쬐고 있다가 대사제의 하인들로부터 신문을 받게 됩니다. 이 두 인물의 모습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사제의 계속된 신문에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고통받는 주님의 종(이사 53,7 참조)을 통해 이미 예언된 것처럼 침묵을 통해 성부께 대한 확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14,61)라는 대사제의 질문에 “그렇다.”(14,62)고 대답하십니다. 성부께 대한 확신에 찬 대답은 결국 거부당하고 대사제는 이를 신성모독으로 단정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께 대한 모욕과 조롱은 고통받는 종을 묘사한 이사야서의 예언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그분이 받으신 조롱과 모욕은 메시아로서 받으셔야 할 고난이었고,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사제의 질문에 굴복하지 않는 반면, 대사제의 하인들의 질문에 베드로가 취한 행위는 전혀 딴판입니다. 주님께서는 긍정하시고, 제자는 부인합니다. 베드로는 하인의 말을 부인하고 도망치려 하고,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정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는 모습(14,71 참조)에서 베드로는 제자로서의 위치를 내팽개쳐 버리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배반을 목격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14,28)라고 한 약속과 관련하여 베드로를 제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결국에는 순교의 길을 걷게 될 베드로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한 모든 이에게 일말의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어 마땅하다고 저주한 직후, 그분을 빌라도에게 넘겨 로마법에 따라 재판을 받게 합니다. 대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던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요구합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의 행위와 신원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기울이지 않고, 군중들을 만족시키려고 그들의 요구에 쉽게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줍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받은 두 재판은 모두 조롱으로 끝이 납니다. 최고의회의 종교재판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조롱했고, 로마 재판은 왕으로 조롱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인상적인 것은 누구로부터도 변호받지 못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누구의 변호도 받지 못하는 그 장면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아주 간결하게 묘사됩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15, 34)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숨을 거두시는 모습은 예수님의 처절한 죽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 본 로마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고 고백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조롱을 당하셨던 예수님을 마침내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존하면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의 신비를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이나 구해 보라는 야유를 들었지만, 오히려 구원은 오직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에 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는 무덤에 모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연결됩니다. 부활 부활을 두고서 네 복음서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각각 조금씩 상이하지만 공통적으로 당혹감과 적대감에서 자연스럽게 믿음으로 연결되는 인물들의 체험과 반응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질문을 받습니다. 부활을 둘러싼 그날의 여러 체험과 반응들 가운데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체험한 제자들과 여인들이 두려움과 공포, 당혹스러움에서 부활로 건너갈 수 있었는가? 부활 이야기의 첫 장면에서 주역은 여인들, 곧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먼 발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고(15,40 참조) 그분이 묻히시자 안식일이 지나 가장 먼저 무덤으로 갑니다(16,1 참조).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던 제자들과는 달리 당시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이라 간주되었던 여인들이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목격한 이들이 되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으로 가면서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내 줄까요?”(16,3)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옮겨진 돌을 발견하는 장면은 인간의 무능과 하느님의 권능을 잘 대비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부활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셨고, 그 앞에서 부활을 저지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무기력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제 무덤에서 한 젊은이를 만난 여인들은 못 박히신 예수님이 되살아나셨고,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전에 말씀하신대로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거기서 예수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말을 전하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는 최후의 만찬 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 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14,28) 즉 예수님의 삶과 사명이 십자가에서 멈추고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공생활 중에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가르치셨던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제자들 앞에 연속적인 존재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로 입증되었고, 그분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며, 거기서 다시 그들을 만날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수난으로 ‘흩어졌던’ 이들은 제자로서 첫 부름을 받았던 곳으로 돌아가도록 다시금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여인들의 반응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계획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뻐 뛰어간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달아났고, 겁에 질리고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의 이 함구는 여전히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의 이유를 아직 누구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삶 안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은 두려움과 걱정이 따르는 일임을 드러내줍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자기중심적인 마음과 관망하려는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이는 부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으면서도 주저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여인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여인들과 제자들을 저절로 믿음으로 이끌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과 제자들의 두려움, 주저함 그리고 불신도 부활하신 주님을 가로막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레나에게 눈에 보이게 나타나셔서 그녀가 천사의 지시를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16,9 참조). 그 후에는 시골로 내려가는 제자들 중 두 명에게 다른 형태로 나타나 불신을 극복하고 다른 제자들에게 돌아가 당신의 부활을 알리도록 용기를 주십니다(16,12 참조). 그리고는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다시금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맡기십니다(16,14-18 참조). 이는 복음 선포의 근본 요소가 인간적인 장점이나 능력 혹은 부족함에 달려 있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이고 선물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는 한때 믿음이 흔들려 스승을 부인하였지만,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전함으로써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발현 이야기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묻히셨지만 하느님께서 그분을 부활시키셨고 이 사실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선교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으시어 이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도들과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당신의 일을 수행하도록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한때 가졌던 의심들(16,13-14)은 이제 완전히 극복되었고, 그들은 밖으로 나가 어디서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16,20). 당신 약속에 성실하신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신 이후에도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통하여 구원의 말씀, 복음이 퍼져 나가게 하셨습니다(16,20).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i9lJiI1YTJg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1년 3월호, 김세진 신부(사목국 행정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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