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모세의 탄생과 소명 위대한 탄생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겨 길렀다.”(탈출 2,1-2) 탈출기는 1장 후반에서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죽여라’ 한 파라오의 명령을 언급함에 이어 중요한 인물이 탄생하였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역청과 송진을 바른 왕골 상자에 뉘어져 강가 갈대 사이에 있던 아기는 마침 목욕하러 왔던 파라오의 딸의 눈에 띄어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친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잘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슷한 고대 근동의 한 임금에 관한 전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한 여사제가 비밀리에 아들을 낳았으나 계속 기를 수가 없어, 역청을 바른 왕골 바구니에 그를 넣고 강에 띄워 보냈는데, 그 아들이 신들의 세계에 이르러 ‘이쉬타르’라는 여신의 사랑을 받아 위대한 인물이 되었고, 그가 바로 고대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했던 아카드의 사르곤 임금이라는 것이 이 전설의 내용입니다. 이와 비슷한 탄생설화를 가진 모세도 당연히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당하게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파라오의 딸이 가진 따뜻한 사랑을 이용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는 파라오에 맞서기 위해 그 딸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우리가 따뜻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대한다면, 그러한 나는 하느님 섭리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 계획의 사도(使徒)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탈출 2,10) 모세는 이집트식 이름의 축소형으로서 ‘~의 아들’ 혹은 ‘~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어 ‘모세’(Mosheh)는 발음상 ‘밖으로 끌어내다’라는 뜻을 지닌 ‘마샤’(Mashah)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라는 이름은 탈출기의 기록대로 ‘물속에서 끌어낸 자’, ‘백성을 이집트에서 끌어낸 자’라는 뜻에 어울리게 붙여진 이름인 듯합니다. 미래의 부르심을 위한 준비 왕족의 삶을 살았던 모세는 백성의 억압받는 처지를 이해하며 성장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일찍부터 준비시켜 이루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모세는 파라오에게 맞설 사람으로 어릴 때 파라오의 궁전에서 자라났고, 그 후에는 백성의 처지에 공감할 사람으로 궁전에서 쫓겨나 살았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그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다.”(탈출 2,11-12) 일찍부터 자신이 히브리사람임을 알고 있었던 모세는 동포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자라났습니다. 그러기에 동포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일이 있은 다음 모세는 이제 미디안으로 달아나 낯선 땅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외국인으로 사막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몸으로 이집트에서 신음하는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와 아픔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소명을 맡기기 위해 준비시키신 일이겠지요.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볼까요? 마치 내 자신이 홀로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나요? 한없이 내 자신이 초라해지고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는요? 그러할 때 그러한 시간을 통해 나를 준비시키는 하느님의 섭리를 느끼시나요? 그러한 시련의 시간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 주신 축복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처지를 아시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탈출 2,24-25) 고역에 짓눌려 부르짖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탄식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그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는 말은 탈출기의 표현대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이 겪는 고통을 알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이렇게 당신 백성의 처지를 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일찍부터 준비시키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의 소명(召命)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9-10) 모세는 파라오에게 나아가 그와 담판을 벌리고, 또 노예살이에 짓눌려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내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섭리로) 벌써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겪는 고통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소명을 주시며 하신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마음을 잘 알기에 모세는 그 고통에 점점 더 민감해져 갔습니다. 하느님의 마음과 비슷하게 되니 그 고통을 모르는 척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지요. 모세는 하느님을 뵙고 그분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은 나름대로 어떤 소명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마음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공감(共感)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응답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마음에 둔감하지 않으니 그 말씀을 즐겨 듣고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마음을 어떻게 느끼고 있고, 그 말씀을 어떻게 따르고 있는지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모세는 자신의 소명이 백성들을 위해 파라오에게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탈출 3,11) 하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한 것이지요.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어릴 적부터 궁정에서 자라며 파라오를 가까이서 보아 온 모세였지만 감히 파라오 앞에 설 자신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이집트인을 죽였고, 그 일을 전해 들은 파라오로부터 쫓기는 처지가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나약한 처지에 있었던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탈출 3,12)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소명을 맡기셨다는 표징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 그 자체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니 이제 모세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이고, 바로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지금 이 자리의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부족함으로 의기소침해져 있을 나에게, 때로는 죄책감으로 도무지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나에게, 또 때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라 하루하루를 힘겨워할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아무 걱정을 하지마라.”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힘을 냅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4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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