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반장 월례연수]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서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시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참 하느님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올바르게 깨닫기 위하여 공관복음(마태오·마르코·루카 복음)의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일곱 가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하느님 말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당신의 제자들과 군중에게 가르쳐주신 분이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와 그밖의 많은 가르침을 비유로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 5-7장 산상설교의 말씀을 통해 참행복을 비롯한 당신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전해주시며 구약 성경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가르침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당신의 가르침대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그분의 인간적 현존과 함께 현세에서 실현되는데, 이 나라는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실현되는 나라이며, 가난한 이와 병자와 죄인같이 소외된 인간을 찾아 치유하고 용서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기쁨(마태 13,44 참조) 안에서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음을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실재입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고 있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것입니다(마태 12,28 참조). 예수님께서는 참행복에 관한 설교를 통해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 행복과 평화를 누리는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리라는 기쁜 소식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진정한 평화와 충만한 행복을 원한다면 그것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찾아야합니다. 참행복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맡겨 드리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하느님의 축복이자 약속입니다. 참행복 선언은 새로운 세계상과 인간상을 밝게 비춰주고, 열어줍니다. 산상설교에서 예고하는 기쁨은 우리가 하느님을 근거로 살아가며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 그때부터 새로운 척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현실적인 행복을 뜻합니다. 참행복 선언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신원과 정체성을 알려주는 척도이며, 예수님의 뒤를 제대로 따르기 위한 지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은 하느님 나라와 사랑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우리의 협력이 필요한 곳이며, 하느님의 뜻이 펼쳐지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행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시작됩니다. 2. 하느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으로서 많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공관복음서는 네 종류의 기적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바로 ① 병을 고친 이야기, ② 악령을 쫓아낸 이야기, ③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 이야기, ④ 자연 현상에 관한 기적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기적 행위를 ‘뒤나미스’(힘있는 행위 또는 능력)라고 일컫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그러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여러 악을 근절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숭고한 활동을 상징하며, 죄와 육체적 또는 정신적 질병과 자연재해, 죽음 등의 모든 것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악의 작용으로 제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십니다(마르 6,5ㄱ; 8,11-13; 15,31-32; 마태 4,5-7; 루카 4,9-12; 23,8-9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 당신의 기적으로 사람을 벌한 경우도 없습니다. 3. 소외 받고 고통 받는 이들을 찾아 돌보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육체적 · 정신적으로 소외받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그들을 돌보시고 필요한 치유와 돌봄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특별히 유다인들의 율법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는 이들과 창녀와 세리와의 만남도 피하지 않으심으로써 모든 이들을 하느님의 구원 대상으로 품어 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가시어 그들 스스로 사랑받고 있음을 일깨워 주시며 새롭게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먼저 초대하셨고(루카 14,12-14 참조), 나인이라는 고을에서는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면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함께 나누셨습니다(루카 17,11-17 참조). 예수님의 연민은 회개하고 믿음을 지닌 이들을 향해 있었고, 예수님의 구원은 모든 이에게 주어졌습니다. 4.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그리스도(메시아)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은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줄 힘있는 메시아, 정치적인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직접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인 그리스도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이 세상에 이미 와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고자 하는 사랑의 특성대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사랑으로 오셨고,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분은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 죽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들어 높이고 구원하고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바치는 이 사랑의 행위를 영원히 현존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면서 또한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도록 초대하십니다. 5. 기도하시고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분 예수님의 일상생활 중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기도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기도하십니다. 사도들을 부르시기 전에(루카 6,12 참조), 빵의 기적을 행하시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실 때(마태 14,19; 15,36; 마르 6,41; 8,7; 루카 9,16 참조), 영광스러운 변모의 순간에(루카 9,28-29 참조), 귀먹은 반벙어리를 낫게 하시고(마르 7,34 참조), 베드로의 신앙 고백 전에(루카 9,18 참조), 기도하는 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에(루카 11,1 참조), 그리고 제자들이 각자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마태 11,25 이하; 루카 10,21 이하 참조) 등 복음서는 중요한 사건과 함께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광야나 산으로 올라가셨으며(마르 1,35; 6,46; 루카 5,16; 마태 14,23 참조), 이른 새벽에 일어나셨고(마르 1,35 참조), 온밤을 지새워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마태 14,23.25; 마르 6,46.48; 루카 6,12 참조).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만찬 중에, 게쎄마니 동산의 고통 중에(마태 26,36-44 참조),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도(루카 23,34.46; 마태 27,46; 마르 15,34 참조) 예수님께서는 기도 안에서 당신의 소명을 온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유혹을 극복하고, 가장 힘겨울 때 하느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예수님처럼 기도드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6.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특별히 인간적으로 피하고 싶으셨던 십자가 죽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묵묵히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게 되었고, 하느님의 뜻에 의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십니다. 그리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세와 순명을 배우시고 수난의 길을 가는 힘을 얻으시며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니라 당신’ 안에서, ‘당신’인 아버지 하느님께 ‘나’를 온전히 내맡기시며 인간적인 저항을 받아들여 변화시키셨습니다. 십자가, 끔찍한 것을 받아들임, 자신의 모든 존엄성이 벗겨지는 수치스러움, 불명예스러운 죽음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순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7.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 예수님께서는 미리 말씀하신 대로(마태 16,21 참조)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흩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서 빈 무덤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어 성부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분명하게 증언합니다(마르 16,6; 루카 24,34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스승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실망과 충격을 받아서 모두 흩어집니다. 제자들은 안식일 다음날, 아직 동이 채 뜨기도 전에 먼저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져왔을 때에도 믿지 않았고(루카 24,11 참조),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을 보았다고 생각하였으며(루카 24,37 참조), 토마스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성경과 교회가 전해 주는 부활의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한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특별히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여정에 동참했던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모든 교리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육신과 인성 전체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 것이며, 인간의 구원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사랑의 친교로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확인해 주는 사건입니다. 그분을 믿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 안에서 부활하리라는 초월적인 희망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nF0GUtYuk8E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1년 4월호, 안승태 신부(사목국 가톨릭청년성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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