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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고해성사는 영성체만을 위한 절차가 아니다-----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카테고리 | 7성사
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18 조회수4,940 추천수0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고해성사는 영성체만을 위한 절차가 아니다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2008년에 경향잡지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요약편)”을 통해 우리가 믿는 교리를 공부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성찰하였다. 이어 2009년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비추어 개인주의적이며 기복적이고 관성적인 우리의 신앙생활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지난해에 이어 박동호 신부의 글을 읽으며 우리의 삶과 신앙의 연결고리를 이어보자.
 
 
연재를 시작하며
 
평화방송의 신앙상담을 하면서, 본당에서 교우들을 만나면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이 훨씬 많지만, 아쉬운 몇 가지 문제 현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현세생활과 신앙의 괴리 현상, 교리에 대한 오해, 형식적이며 기계적인 신앙과 신심 행위 따위가 그것들이다. 이 지면을 통해 사목현장에서 발견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살펴 보면서 성찰의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들이 행하는 고해성사를 들춰보고자 한다. ‘고해의 비밀 엄수’라는 민감한 내용이긴 하지만, 상당 부분우리의 실제 모습이라 여기기에 다루어보았다. 다만 순전히 필자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아래의 내용을 일반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
 
 
신부님, 주일미사를 빼먹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하면서 자책하며 무력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자책하는 이유는 사목자로서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고, 무력감을 느끼는 이유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체념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고해실에 앉아있다 나올 때가 바로 그때다. 짧은 시간이지만 다음과 같은 상념에 사로잡혀 벗어나기 어렵다.
 
하느님과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죄가 어찌하여 한결같이 “주일을 빼먹었습니다.”와 “나한테 아픔을 준 사람을 죽도록 미워하였습니다.”뿐일까?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이 고백할 죄가 그것만이라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무질서와 불의, 그리고 그에 따른 수많은 이들의 고통은 도대체 누가 일으킨 것일까? 그리스도인은 그에 대해서 무죄한가?
 
이땅의 그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당과 대형 교회를 채우고 또 채우며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을 찬미찬양하고 세상 구원을 갈망하고, 그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예불하며 성불(成佛)을 희망하는데, 어찌하여 그 수많은 그리스도인과 불자가 애를 쓰며 정성스럽게 가꾸는 이 사회는 나날이 혼란스럽고, 분열하고, 갈등하며, 무질서함을 향해 치닫는가? 상념은 이어진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 무질서와 혼돈의 피해자일 뿐인가?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침묵하고 계신가? 우리 신앙인의 지극정성을 외면하시는가? 또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시는가? 혹시 “하느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가 동상이몽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짧은 상념을 접고, 무력함과 자책을 다음으로 미룬다.
 
만일에 누군가 우리 신앙인의 태도를 놓고 그것은 ‘중대한 오류’이며, 더 나아가 ‘추문’이라는 심한 말로 비판한다면 혼란스러움을 넘어 분노와 모욕감마저 느낄 것이다.
 
당신들의 신앙생활은 당신들이 그토록 공경하는 예언자들이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당신들이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분께서 “중대한 벌로 경고하셨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도대체 우리의 어떤 모습이 그토록 ‘중대한 오류’이며 ‘추문’이냐?”고 따지고 싶을 것이다. “도대체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떻기에 예언자들이 비난했고 예수님께서 중대한 벌로 경고하셨냐?”고 언성을 높일 것이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교회라면 또 어찌할 것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혔다. 그 내용이 조금 길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질책하는 소리로 들리기에 불편하고 부끄럽지만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불편한 진실’이라고나 할까.
 
 
불편한 진실
 
“공의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천상 국가와 지상 국가의 시민으로서 복음의 정신에 따라 현세의 자기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하도록 권고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고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때문에 자기의 현세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바로 신앙을 통하여 각자 부름 받은 그 소명에 따라 현세 의무를 더더욱 이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또 이와 반대로, 종교 생활이란 다만 혼자서 하는 예배 행위와 어떤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뿐이라고 여겨, 현세 활동은 종교생활과 전혀 다르다는 듯이 스스로 현세활동에 몰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똑같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사이의 저 괴리는 현대의 중대한 오류로 여겨야 한다. 이러한 추문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자들이 격렬히 비난하였고, 더더욱이나 신약에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대한 벌로 경고하셨다. 따라서 한편으로 직업적 사회적 활동과 다른 한편으로 종교 생활을 서로 부당하게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 자기의 현세 의무를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인은 이웃은 물론 바로 하느님에 대한 자기의무를 소홀히 하고 또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위험에 빠뜨린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목수 일을 하셨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인간적, 가정적, 직업적, 학문적 또는 기술적 노력을 종교적 가치와 결부시켜 활력에 찬하나의 종합을 이루어 자기의 온갖 현세활동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다”(사목헌장, 43항).
 
이 문헌에서 사용한 표현은 과격하다 할 정도로 직접적이다. “진리에서 벗어났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현대의 중대한 오류”, “비난”, “경고”, 따위의 표현은 그래도 점잖은 편이다.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공의회 사목헌장의 선언은, 비록 구원이 하느님의 절대 주권에 속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지만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무서운 소리로도 들린다.
 
현세 의무와 종교적 가치의 결합은 구원에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 결합은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 곧 사람이 수행해야 할 필요충분조건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전념해야 할 종교적 가치, 도덕적 의무가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뿐이며,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미워한 것’뿐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 되는 전제조건이 있다. 평일에 흘린 땀의 결실을 주일에 하느님 앞에 갖다 바쳤을 때, 첫째로는 그리스도와 결합시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둘째로는 그래서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제물로 떳떳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하셨다. 주일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하느님께 봉헌한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께 결합시킨 우리의 삶이 (표현이 부적절하지만) 심하게 오염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망치는 것이 아닌가! 만일 하느님께 바친 우리의 제물이 (구약의 예언자들이 질책하듯이)하느님을 역겹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주일미사는 거룩함을 훼손하려고 작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주일의 경신례(敬神禮)는 그 자체로 거룩하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떳떳한 제물로서 자신의 삶을 봉헌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할 수도 있다. 평일에 흘린 땀의 결실이 하느님 앞에 온전하게 떳떳하지 않기에, 경신례(미사)를 시작하면서 온 회중이 정화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 교회는 그 정화의 작업을 진정한 통회와 고해성사를 통해 실천한다. 다음의 내용이 우리의 신앙태도를 묘사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정화가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편의주의적이라는 지적은 과히 잘못된 진단이 아니다.
 
 
하느님, 내 기도(?) 들어주소서!
 
월요일에 사기를 쳐서 이웃에게 손해를 입히고, 화요일에 투기를 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수요일에 뒷돈을 주고받아서 질서를 어지럽히고, 목요일에 자신의 눈앞의 이익을 위해 불의에 동의하고, 금요일에 내 일이 아니라며 부정과 부조리에 침묵하며, 토요일에 구조악과 사회악은 필요악이라 믿으며 일신의 영달에만 몰두했다고 치자. 그리고 주일에는 주님의 집을 찾아 뉘우친다.
 
“그 모든 일은 이 무질서하고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 또는 “그런 행위와 태도는 세상살이에 필요한 기술이거나 능력일 뿐, 하느님과 저 사이에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세상의 것들입니다. 당연히제 종교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일들 입니다.”
 
아니면 “본심은 아니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워낙 바빠서 그리고 때로는 너무 피곤하고 게을러서 주일미사를 가끔 빼먹었습니다. 앞으로는 꼬박꼬박 미사에 나오겠습니다.” 하고 말이다.
 
하느님께 두 손 모아 경건하게 기도하는데, 그 기도란 것도 사실은 “세상에서누릴 수 있는 온갖 복을 다 주시고, 세상에서 피하고 싶은 온갖 불행에서 저를 지켜 주십시오.” 정도로 요약된다. 그러고는 주일에 빠지지 않았고, 십일조를 바쳤고, 헌금도 했으니 그 기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싶어한다.
 
우리나라의 그리스도교(개신교 포함)는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며, 지나치게 기복적이며, 지나치게 내세지향적이라는 부끄러운 지적이있다. 또 우리나라의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와 같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지적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현세의 사회질서와 종교 생활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종교생활을 할 뿐이며 공동선과 사회정의 따위는 세상의 일이며 종교의 영역이 아니라고 믿는다. 하느님께 구하는 복이라는 것도 현세의 온갖 이익의 종합에 불과하다.
 
고해실에서 사회의 공동선을 파괴한 행위들에 대한 뉘우침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하느님의 뜻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허물어뜨린 행위들에 대한 통회는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내세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도 현실에 대한 집착이나 현세 사물질서에 대한 무책임과 다를 바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은 그렇게 신앙인의 요구를 들어주는 공급자이며 신앙인은 수급자에 불과하며, 그 공급과 수요를 맺어주는 것이 재물이기에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라 한 것이 아닐까. 하느님의 축복(현실의 온갖 이익)과 인간의 재물을 거래하는 것이 아닐까.
 
 
공동선을 향한 고해
 
고해실에서 사회의 공동선을 파괴한 행위들에 대한 뉘우침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현세의 온갖 욕망 충족이야말로 삶의 목적이라 여기며, 하느님의 축복이 스며있는 아름다운 이 세상을 어지럽힌 행위들에 대한 참회는 이루어질 수 없는가? 이땅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욕보이고, 하느님의 뜻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허물어뜨린 행위들에 대한 통회는 이루어질 수 없는가? 일신 또는 가족의 영달만을 구하며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의 신음소리에 귀를 막은 그 많은 행위들을 뉘우치며 재를 뒤집어쓰며 단식을 할 수는 없는가?
 
사회정의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함부로 훼손하고, 인간의 존엄함을 하찮게 여기거나 심지어 이웃에 고통을 안기며 창조질서를 어지럽힌 것에 대한 뉘우침의 소리는 어디서 들을 수 있는가?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그토록 신신당부하신 말씀,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의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지 마라.”는 그 말씀에 뼈저리게 뉘우치는 목소리는 어디서 들을 수 있는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받아들이신다(사도 10,35 참조).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섬기도록 하셨다”(교회헌장, 9항).
 
주님, 당신과 당신 백성께 등을 돌린 제가 회심(悔心)하고, 회심(回心)하며, 그리고 회두(回頭)까지 하게 하소서. 아멘.
 
[경향잡지, 200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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