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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이집트 탈출의 목적과 하느님의 이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05-19 조회수3,669 추천수0

[하느님 뭐라꼬예?] 이집트 탈출의 목적과 하느님의 이름

 

 

이집트 탈출의 목적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소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탈출 3,12) 이 말씀 안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고자 하는 목적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 백성을 단순히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해방함을 넘어 하느님을 예배하게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에서의 탈출은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 파라오를 섬기는 종살이에서’ ‘이제 하느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자유의 삶으로’ ‘건너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도록,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희망하고 들 수 있도록 초대된 사람입니다. 그러한 나이기에 억압된 과거로부터 출구를 찾지 못하거나, 반복되는 일상에서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해방하시고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께 도움을 간청하면서 ‘예전의 나 자신에서의 탈출’과 ‘새로운 나 자신으로의 건너감’을 시도해 봅시다. 나 자신의 파스카를 말입니다!

 

 

하느님의 이름 ‘있는 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라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있는 나다. ….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탈출 3,14)

 

모세 당시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신(神)을 지칭할 때는 ‘엘’(El)이나 ‘엘로힘’(Elohim)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전혀 다른 의미의 이름을 계시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나는 있는 나다’라는 뜻의 ‘야훼’(יהוה, YHWH)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나는 이름이 없다’ 혹은 ‘나는 곧 나이니, 그것 말고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은 없다’시면서 이름을 밝힘에 대하여 회피하거나 거부하신 말씀이라기보다, ‘나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행동하려고 한다’, 혹은 ‘내가 누구인지는 지금보다도 나중에 밝혀주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이름으로 이해함이 더 바람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 ‘나는 있는 자이다!’라는 뜻의 ‘야훼’라는 말로 당신을 부를 호칭만이 아니라, 당신이 ‘있고’(有) ‘현존’(現存)한다는 당신의 ‘존재’와 ‘생명’을 밝혀주신 것이고, 또 단순한 존재를 넘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활동하는 존재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탈출 3,15)라는 표현이 바로 ‘조상들과도, 그 후손들과도 늘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잘 나타내고 있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계시된 하느님의 이 이름을 과거 실제로 ‘야훼’라고 발음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계시된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대신 ‘아도나이’(אדני, 주님)라고 부른데다, 히브리어를 쓸 때는 대개 모음 없이 자음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야훼’라는 발음은 중세의 유다 학자들이 יהוה라는 자음에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의 모음부호를 결합하여 상상으로 만든 발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야훼’가 옳은가, ‘여호와’가 옳은가 하는 것은 쓸데없는 논쟁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불에 타는데도 타지 않은 떨기’ 속에서 알려주셨다는 것은 그 이름의 신비스러운 면을 잘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신비로우신 하느님의 이름이 이집트의 탈출과 관련되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당신 백성들에게 알리신 위대한 행위가 바로 ‘이집트에서의 탈출’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겠다.’ 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언제나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하느님’, ‘우리를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으로 계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지요.

 

내 인생의 삶이 마치 사막의 삶과도 비슷하게 메마르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할 때, 황량한 사막에도 여기저기 물이 솟아나는 오아시스가 지친 나그네에게 휴식처가 되듯이, 주님께서 자칫 사막같이 메마를 수도 있는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며 당신의 샘물로 나를 이끄시고 계시다는 생각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있는 나’이시지만, 나 자신은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한 있을 수 있는 나’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오직 ‘나 자신으로서만 있는 나’이기도 합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하느님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하느님께 조금씩 나아가야만 하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랍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나를 떠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갑시다. 하느님께 당신 아닌 그 무언가에 속박되어있는 나 자신을 맡겨드립시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주시는 진정한 자유를 잃어버리고 억압된 상황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나를 구해 주시길 청합시다. 죄로 인한 억압에서, 중독으로 인한 억압에서, 미움이나 분노로부터의 억압에서 주님, 저를 구해주소서! 참된 자유와 평화를 향해 제가 탈출하게 하소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이름 ‘야훼’의 뜻을 이해하도록 돕는 구절이 있으니, 예언자 호세아의 아내 ‘고메르’가 세 번째로 아이(둘째 아들)를 낳자 주님께서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의 이름을 ‘로 암미’라고 하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지 않다.”(호세 1,9) 하느님께서 ‘불충하고 타락하고 정의롭지 못한 이스라엘은 더 이상 당신의 백성이 아니라는 상징’으로 ‘나의 백성이 아니다’는 뜻의 ‘로 암미’라는 이름을 예언자의 아이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이름에 비해 본다면, ‘야훼’는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다’는 뜻의 하느님을 이름을 한층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할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계시고, 또 나를 위해 계십니다. 나를 위해 하느님이 계시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고, 불평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느님은 우리만을 위해 계시지도 않고, 또 나만을 위해 계시지도 않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계시는 분이시고, 나만이 아니라 너를 위해서도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 활동하시고, 또 ‘너 안에’, ‘타인 안에’, ‘이웃 안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알아 뵙고, 그분의 원의를 따라 잘 살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 백성을 살펴보시는 하느님

 

탈출기 2장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역에 짓눌려 부르짖는 탄식을 들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상한 배려의 말씀을 이제 3장은 하느님 자신이 하신 구원의 약속을 시작하면서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탈출 3,16)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 동사 ‘찾아가 – 보다’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어떤 대상을 방문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가서 그들이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셨다는 것이지요.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시키겠다, 구해내겠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꿇어 경배”(탈출 4,31) 하였습니다. 나는 어떤가요? 하느님께서 나의 고난을 알아주시기를 바라고 있나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살펴보시기를, 내가 먼저 간절히 원해야 할 것이고, 나와 함께 있고자 하시는 그분께 내 마음의 문을 열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처럼, 하느님은 나 없이 나를 창조하셨으나 나 없이 나를 구원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5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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