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이 스스로 착각하신걸까?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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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병민 | 작성일2014-12-20 | 조회수1,596 | 추천수2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코 1,15]
예수님은 분명히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도 이천년전에 말씀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혹시 하느님 나라의 임박을 기대하시면서 스스로 착각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이것이 착각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 메시지는 신뢰를 상실하고 큰 손상을 입게된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성경의 역사관과 시간관의 특징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성경적 시간관과 역사관의 첫 특징은 시간을 순전히 양적으로만 파악하지 않는데 있다. 시간은 내용에 따라 측정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시간인가에 달려 있다. 시간을 내용에 따라 이해하는 이러한 시간관에 의해, 현재와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관한 메시지가 좀 더 이해된다.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를 위한 시간이다.
즉 현재라는 시간은, 도래할 하느님의 다스림을 맞아 결단을 내려야할 상황이라는 사실로 그 질이 규정된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미래를 장악하고 있는 권능이다. 이 권능은 지금 결단을 촉구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현재 안에 힘차게 작용하고 현재를 온전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시간관에 의해 예수의 메시지를 해석함으로써 아직 도달하지 않은 하느님의 다스림의 참된 미래적 특징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성경의 역사관과 시간관의 두번째 특징에 유의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임박 기대와 재림이 지체되는 것 사이의 긴장은 결코 신약성경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즉 그것은 구약성경의 장구한 기간 동안을 일관한 긴장이다. 그래서 마르틴 부버는 역사는 일정한 계획에 따라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역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주고 받는 대화중에 일어난다고 한다. 하느님의 언약은 인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 언약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방식은 인간의 결단, 즉 그의 신앙이나 불신에 달려있다고 한다.
결국 하느님의 다스림이 다가왔다는 예수의 메시지는 결단을 촉구하는 하느님의 제안이다.인간은 이 제안을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진지한 제안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을 기대한다. 장차 임하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에는 남아있는 언약이 있었다. 그의 메시지는 희망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 희망은 예나 지금이나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 희망은 하느님께서 정말 “모든 것 안에 모든 것”[1코린15,28]일 그 때 가서야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참고 : 그리스도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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