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하느님의 진노와 모세의 중재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공경 탈출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을 상징하는 금송아지 이야기에 앞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말씀을 다 하신 다음, 당신 손가락으로 쓰신, 돌로 된 두 증언판을 그에게 주셨다.”(탈출 31,18) 여기서 ‘증언판’이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했다는 신명기의 말씀에도 나와 있듯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천할 것을 명하신 계약을 새긴 돌 판을 말합니다. “그분(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령하신 당신의 계약을, 곧 십계명을 너희에게 선포하시고 그것을 두 돌 판에 써 주셨다.”(신명 4,13) 이렇게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손가락으로 계명을 새겨주셨지만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의 부재(不在)를 견디지 못하고 아론에게 말하였습니다. “일어나,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탈출 32,1) 모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로 자신들을 이끌 신을 만들어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아론은 들어주었고, 이에 그들은 송아지상 앞에서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탈출 32,4) 그렇게 만든 수송아지 신상(神像) 앞에 제물을 쌓은 뒤 선포하기를, “내일은 주님을 위한 축제를 벌입시다.”(탈출 32,5) 하였고, 실제 다음날 일찍 일어나 번제물을 올리고 친교 제물까지 바쳤습니다. 오늘날에도 힌두교에서 보는 것처럼 소를 신성한 동물로 여기고, 종파에 따라서는 신으로 숭배하는 경우가 있듯, 일찍부터 가나안과 이집트에서 소는 풍산과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근동의 기념 기둥에는 풍산과 파종의 신이었던 ‘바알’이 힘센 황소 위에 서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계명을 받아든 그때, 백성은 벌써 그 계명 첫머리의 말씀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탈출 20,3-4) 바로 우상숭배를 금지한다는 계명 말입니다. 탈출기에서 우상숭배 금령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것은 이렇게 십계명의 금령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아울러 북이스라엘이 실제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역사적 사실도 경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합니다. 그 역사적 사실이란, 솔로몬의 신하로서 예언자 아히야의 예고대로 유다와 벤야민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받들어진 예로보암의 잘못입니다.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하브암이 그 뒤를 이어 남쪽 이스라엘인 유다 임금이 되었을 때의 일이죠. 그때 북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던 예로보암은 백성들이 남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일이 심히 신경 쓰였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의 주님의 집에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올라갔다가 자칫 유다임금인 르하브암에게 마음이 기울까 염려하였던 것이지요. 고심한 끝에 금송아지로 신상들을 만들어 하나는 ‘베텔’, 다른 하나는 ‘단’ 성소에 둔 예로보암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1열왕 12,28) 성경은 이렇게 잘못된 길을 걸었던 예로보암의 행실에 대해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죄가 되었다.”(1열왕 12,30) 하느님의 자리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기다니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저지른 잘못일까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견디지 못하고 끝없이 무언가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섬기기가 너무 힘들어 억지로라도 보이는 것을 만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들 아닌지요?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그 무엇도 하느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진노를 풀어드린 모세 “저들은 내가 명령한 길에서 빨리도 벗어나,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고서는, 그것에 절하고 제사 지내며,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 하고 말한다. …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탈출 32,8-10)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모세를 통해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시겠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노예살이에 짓눌려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내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신의 사명에 끝까지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게 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탈출 32,12-14)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그들에게 이렇게 큰 죄악을 끌어들였습니까?” 모세의 질책에 아론의 대답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 백성은 원래 악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데다가, 자신들을 이끌고 있던 모세라는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니 자신들을 이끌 신을 만들어 달라고 나를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금붙이를 달라 해서 불에 던졌더니 이 수송아지 형상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요지의 답을 한 것이지요.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백성을 끝까지 생각하는 모세와 비교할 때. 자신에게 닥친 위기와 곤궁만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결국 많은 백성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말았던 아론의 판단과 행동은 경솔하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나라에도 이런 자세로 인기와 여론에 집착하거나 자리보전에 연연한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아론처럼 말만 앞서거나 여론에만 솔깃해하는 무책임한 사람 말고, 우직하게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모세와 같은 봉사자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편, 주님을 위한 직무 모세는 하느님께서 새겨주신 두 증언판을 들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는 수송아지를 섬기고 있는 백성들을 보고 화가 나서 들고 있던 돌 판들을 산 밑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증언판을 산산조각낸 모세는 백성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태워 가루로 빻아 물에 뿌리고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진영 대문에 서서 “누구든지 주님의 편이거든 나에게로 오너라.” 하였고, 이에 모여든 레위의 자손들에게 명하였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각자 허리에 칼을 차고, 진영의 이 대문에서 저 대문으로 오가면서, 저마다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여라.’”(탈출 32,27) 그날 백성 가운데에서 삼천 명가량이나 쓰러졌습니다. 모세는 레위인들이 가족들을 버리고 하느님을 위해 투신한 대가로 주님을 위한 직무, 곧 사제직을 맡았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이어 모세는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탈출 32,31-32)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일러 준 곳으로 백성을 이끌어라. 보아라, 내 천사가 네 앞에 서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징벌의 날에 나는 그들의 죄를 징벌하겠다.”(탈출 32,33-34) 여기서 말하는 ‘책’은 인구 조사 때에 만들어진 명부로서, 하느님의 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은 더 이상 하느님의 백성에 들지 않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주님의 편에 서는 자들을 모으고 그렇지 않은 자들을 벌한 모세의 중재로 백성들은 그 죄를 용서받고 계속해서 약속의 땅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제직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교회에 봉사하는 직무입니다.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의 편에서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들을 이끄시고, 그들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소서!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9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