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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바오로의 회심과 선교 이야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15 조회수2,814 추천수0

[구역반장 월례연수] 바오로의 회심과 선교 이야기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반대하고, 박해하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예수님을 위해서 한 생을 바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고, 그가 지닌 복음 선포의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으며, 그는 이방 민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방인들의 사도’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도 바오로였습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바오로의 회심 - 다마스쿠스 사건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그분을 뵙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난 이후에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 체험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습니다. 그 체험의 중심에 바로 다마스쿠스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오로가 다마스쿠스에서 겪은 사건을 ‘회심’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회심’이라는 단어로 체험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심’은 죄의 상태를 깨닫고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도덕적 회심의 의미와, 율법이라는 신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신념으로 옮겨진 가치 이동으로만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자신도 이 사건을 ‘회심’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다마스쿠스 사건은 ‘회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 복음과 사도행전은 ‘회심’에 대해서 ‘사고방식의 변화’(마르 1,15 참조)와 ‘돌아감’(사도 3,19)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바오로가 다마스쿠스 사건을 ‘회심’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체험한 것을 단순하게 ‘사고방식이 변화’나 ‘돌아감’으로 표현하기에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공관 복음과 사도행전과는 달리 요한 복음은 ‘회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요한 복음은 회심이라는 표현을 대신하여, ‘예수님께로 가다’, ‘그분께로 오다’, ‘그분께로 가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회심이 지닌 돌아감과 변화보다는 예수님을 향한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회심의 본질적인 요소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오로가 체험한 다마스쿠스 사건은 이러한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바오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모독하고 박해하였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또한 박해하고 학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1티모 1,12-13 참조).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가 온전한 변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사도의 자격이 없음에도 주님을 뵈었다고 고백합니다(1코린 15,10 참조). 그는 하느님 은총의 힘이 아닌, 율법과 사회적 지위에 의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 체험으로 그는 회심을 넘어서는 온전한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체험한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전해주고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6) 바오로 자신이 증언하는 체험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그에게 당신 아드님을 계시하여 주시고 파견하셨다는 사실이 서 있습니다. 이 체험을 통해서 그는 예수님을 뵐 수 있었고(1코린 9,1 참조),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비추시어 그리스도의 부유함과 생명을 밝게 깨닫게 해주셨음을 고백하게 됩니다(2코린 4,6 참조).

 

 

바오로의 어둠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빛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빛을 체험하고도 오히려 소경으로 사흘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사도 9,8-9 참조). 성경에서 소경이 된다는 것은 죄로 방황하는 인간을 상징한다는 점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사도 13,9-11 참조). 그렇다면 바오로가 소경이 되었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바오로의 체험은 조금은 다르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참된 빛을 체험하였습니다. 그가 소경으로 보낸 사흘의 시간은 진리의 빛을 통해 자신이 지녔던 내면의 어두움과 마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쓸모없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참된 빛의 힘을 지니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마주했던 빛은 그가 보았던 어떤 빛보다 더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빛보다 더 강하고 밝은 빛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빛 앞에서 다른 빛들은 빛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어둠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오로의 방향성

 

바오로는 이 어둠의 시간을 보낸 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여겨왔던 바오로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위해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변화를 맞이하였을까요? 다마스쿠스 이전과 이후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바오로는 자신의 삶에 굉장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자신감의 중심에는 이스라엘의 전통과 율법이라는 큰 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체험 이전의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적인 것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필리 3,4-6)

 

법과 규정에 충실했던 바오로의 모습입니다. 그는 이것을 ‘육적인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이 바로 바오로가 소중하게 여겼던 가치이며 보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오로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의 진술에서 바오로 자신만이 주어로 등장합니다. 그는 율법을 잘 알고 그것을 철저하게 지켰을지 몰라도 그의 삶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가득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자신만으로 가득 찼던 바오로는 예수님을 체험하고 변화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7-8)

 

‘나’라는 자아로 가득했던 바오로, 그런 바오로가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주어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는 자신의 가치를 모두 내던집니다. 하느님을 이야기하였지만, 하느님을 옳게 알지 못하였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빛을 통해서 완전한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는 빛 앞에서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이 의미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전까지 자신의 눈으로, 생각으로, 판단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바오로가 지금까지 추구하며 살아온 그 방향성이 잘못된 것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 것이 아니며, 윤리적 변화도 아닙니다. 그가 진리에 대해서 크게 착각하고 살아왔음을 알게 되는 깨달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된 진리를 마주하면서 그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빛을 통해서 예수님을 마주하였고, 빛에 의해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마주하였고, 이를 통해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논리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서론, 본론, 결론의 논리적 형식을 갖춘 잘 정리된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논리적 전개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다마스쿠스 사건은 바오로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여정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하였으며, 동시에 그에게 하나의 사명을 주었습니다(갈라 1,15-16 참조). 바로 다른 민족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한편에서는 그가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이 ‘틀린 것’이며 ‘거짓된 것’이라는 말씀이 들려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에게 ‘모든 것의 위임’이 이루어집니다. 죄인에게 용서와 자비가 주어지고, 당신의 말씀을 맡기시는 신뢰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이 모든 일을 자신의 노력에 의한 성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마스쿠스의 길 위에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온전하게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이며 선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첫째가는 죄인이었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다고 고백합니다(1티모 1,16 참조). 바오로의 삶은 이 체험을 통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하느님을 모르던 상황에서 하느님을 앎으로 방향성이 전환됩니다. 그 전환은 그를 온전하게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복음 선포의 사도로 변화됩니다.

 

 

바오로의 선교

 

그가 선교한 모든 것을 살펴보기는 어렵겠지만 마지막 설교의 한 구절을 통해서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선교에 임하였는지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가 선교를 통하여 섬긴 대상을 우리는 교회 공동체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가 다닌 선교 여정과 그가 남긴 서간들은 그를 교회 공동체의 종으로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오로가 섬긴 대상은 공동체가 아닌 주님이었습니다. 그가 행한 것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행위였습니다. 그는 온갖 굴욕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머금고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선교 여정 안에서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고 자신의 계획과 예상대로 진행되는 일이 없었음을 수없이 체험하였습니다. 그 시간은 그에게 온갖 굴욕, 시련, 모함과 고통으로 가득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바오로의 눈물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의 본문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사도 20,31)

 

“나는 매우 괴롭고 답답한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2코린 2,4)

 

바오로는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통, 고뇌 그리고 실망의 순간에 격한 감정 속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눈물이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지닌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곧 사람들을 향한 애정과 열정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함이 그에게 항상 기쁨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습니다. 바오로의 선교 여정은 우리에게 그가 겪은 어려움을 알려줍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 바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이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종이 되신 그리스도, 겸손하게 온갖 굴욕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 안에서 사시도록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면서 자신을 보호하지도, 방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 위에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였을 뿐입니다.

 


다마스쿠스 체험에서 복음의 선포자로

 

다마스쿠스 체험에서 그의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큰 기쁨과 내적 평화를 얻었습니다(2코린 7,4 참조). 그 기쁨은 어떤 자질이나 인간의 노력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평화와 기쁨은 그가 평온함 속에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그는 항상 감사의 자세를 지녔습니다. 기쁨과 내적 평화의 모습이 지닌 열매가 감사함입니다. 그는 항상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8) 비록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그는 감사하며 지냈습니다.

 

셋째, 그는 하느님을 향한 찬미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를 청원이 아닌,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찬양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기쁠 때 찬양하기는 쉬울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려운 순간과 고통의 때는 어떨까요? 바오로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소명

 

그는 다마스쿠스 체험을 통하여 전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단순한 가치관의 변화, 윤리적 삶의 변화로 그치지 않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한 온전한 변화였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바오로의 변화는 단순한 외적 회심의 결과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체험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세상에 선포하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온갖 어려움에도 기쁨과 평화를 잃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우리에게 바오로와 같은 체험이 있었는지요? 하느님의 선물이며 은총인 그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변화로 나아갔는지요? 그 체험은 나를 어떠한 모습으로 이끌었나요?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를 부르시고 사명을 부여하신 것과 같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9IF94hsjBo8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1년 9월호, 박형순 신부(인천교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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