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역사, 신앙, 그리고 사랑 - 요한1서 요한 1서는 표현과 내용에서 요한복음의 것과 비슷한 부분을 많이 공유한다. 태초, 로고스, 사랑, 빛 등이 그렇다. 그럼에도 요한 1서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문제의 부각을 알린다. 이른바 ‘적그리스도’(1요한 2,18)의 등장이다. ‘적그리스도’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 종파들 간의 삿대질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너네 종파는 적그리스도야!’라는 비난으로 등장하는 게 ‘적그리스도’라는 표현이다. ‘사랑’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선보이는 요한계 문헌의 정통적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이러한 천박한 수준의 비난을 굳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요한 1서는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고 명확히 밝힌다.(1요한 1,1) 제 체험과 삶 속에 전해진 신앙적 가치를 되짚어 보는 것이 요한 1서다. 역사 속에 육화한 하느님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핵심적 가치라고 인식하는 요한 1서는(1요한 4,2) 신앙한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와 삶과 사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천명한다. 요한계 문헌이 쓰여졌을 때 ‘영지주의적 사상’이 세상을 지배했다고 한다. 신앙 역시 영지주의적 영향을 비켜갈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원론적 관점을 견지하는 영지주의적 사상은 신앙 안에서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을 분리시키고 천상의 신과 지상의 예수를 구분지음으로써 참된 하느님이 인간 역사 안에서 함께 숨쉬고 살아가셨다는 사실을 애써 기피한다. 요한 1서가 강조하는 예수의 육화 역시 영지주의적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라 단정한다. 문제는 이런 이원론에 기초한 신앙관이 아니다. 어떠한 이단이라도, 어떠한 정통 신앙의 왜곡이라도 정통 신앙의 가치를 굳건히 간직하는 노력 앞엔 아침 이슬마냥 부질없는 것이니까. 더 큰 위험은 정통 신앙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게으름이나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한 배타적 자세에 있다. 요한 1서는 자주 이런 표현을 남긴다. “이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1요한 2,3.5;3,16.19;4,2.13;5,2)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말하자면 본디 원천이 되는 신앙에 대한 환기를 필요로 한다. 사실 ‘적그리스도’ 역시 공동체 밖에서 자행된 신앙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서 시작된 완고함과 편협함의 결과다.(1요한 2,19) 예수를 믿고 따르고 다시 믿는 것을 되뇌이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은 신앙인에게 소중하고 필연적인 것이되 편협한 자기 암시나 최면에 갇힐 위험성 역시 내포한다. 예컨대 하느님을 믿으면 ‘죄지을 수 없다.’는 편협한 해석이 그러하다.(1요한 1,6.8.10)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한 속죄제물로 바쳐졌다.(1,7;2,2;4,10;5,6) 그리하여 우리는 죄가 없다는 논리가 실제로 요한 1서를 읽은 공동체 안에 횡행했던 모양이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신앙적 가르침이 일상의 삶 자체가 순수 100%의 순수함 그 자체라고 오역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성찰의 결핍 때문이다. 제 삶의 자리에 예수가 왔고, 그로 인해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글자 그대로 사실이다. 다만 그 사실이 제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반추해보는 것은 전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책무이자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신앙인의 상태가 아니라 삶의 소명이어야 한다.(1요한 3,23;5,2이하) 요한 1서는 그 소명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복기를 통해 인지되고 실천된다고 말한다. 죄가 사라진 자리에 신앙인과 예수가 조우하는 게 아니라 일상적 죄에 대한 인식과 처절한 자기 반성 안에 예수는 여전히 우리의 속죄제물이자 변호인으로 함께하시는 것이다.(2,1-2) 요한 1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세속적’이라는 단어 하나로 단죄하고 비난하며 저만의 거룩함과 저만의 의로움에 갇힌 무지한 맹신에 대해 비판한다. 신앙인은, 그리고 그 신앙인이 모인 교회라는 곳은 ‘마지막 때’를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2,28) ‘마지막 때’는 저 세상, 저 멀리 있는 천상의 유토피아적 개념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서로 사랑하고 사는 것, 내일에 대한 환상적 가르침에 혹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아파하는 이들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고 실천하는 일이 ‘마지막 때’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4,17-21) 코로나19라는 인류사적 사태 앞에 종교의 무용성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신앙 공동체의 위기는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진즉 시작된 교회의 폐쇄적 자세 때문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올바른 삶’과 ‘구별된 삶’을 외치며 도덕주의와 그 실천을 종교나 신앙으로 여기는 교회의 강퍅한 아우성은 이미 세상의 올바름에 자리를 뺏긴 지 오랜 듯하다. 오히려 세상이 더 잘 살고, 세상이 더 바람직하며, 세상이 더 따뜻한 일을 할 때가 많으니까 말이다. 탈세속의 배타적 진지함이 세속과 끝장나 버린 종교를 만들어갔고, 거기서 예수의 육화는 그 빛과 신선함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그래서 참된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세상과 역사에 뒤쳐져 감금된 ‘적그리스도’가 아닌지 다시 묻게 된다.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종교의 비종교화를 언급했다. 어쩌면 예수의 육화를 가장 적절히 이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성당에 가야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성당과 세상의 벽을 허물고 세상살이가 곧 신앙의 장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게 정통 신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온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신 예수를 믿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은 우리 역시 온 세상을 사랑으로 불러주고 아껴주고 보듬어 주는 일이리라. 사랑없는 것이 죄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어둠 속 악마의 일이다. 사랑에는 경계도 잣대도 조건도 필요치 않다. 요한 1서의 정통 신앙은 종교가 없는, 그럼으로써 온 세상이 종교가 되는 일을 미리 설계하고 계획한 듯하다. [월간빛, 2021년 11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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