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성문 앞에 앉은 임금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해당하는 ‘단’에 가면 제1성전기(기원전 10-6세기)의 성문 유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앞에는 임금이나 판관이 앉았을 왕좌가 놓여 있지요. 일견 궁궐이 아닌 성문 앞에 왕좌가 있어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구약 시대 중요한 사람들은 성문 앞에 자주 앉았습니다.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고(창세 19,1),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기 전 성문 앞을 어슬렁거리며 재판하려고 임금을 찾아오는 사람을 볼 때마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으리라며 마음을 사려 하였습니다(2사무 15,2-4).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한 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 마하나임 성문 앞에 좌정하지요(2사무 19,19). 곧 성문 앞 왕좌는 지도자들이 앉아 민생을 돕는 재판의 자리였던 셈입니다. 이런 풍습은 다윗의 조상 보아즈가 한 행동도 이해하게 해줍니다. 보아즈는 베들레헴 성문으로 올라가 원로들을 앉게 한 뒤(룻 4,1-2) 룻과의 혼인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원로들은 경험이 많고 연륜이 깊어 현인으로 존경받았기에 조언자 역할을 맡았고(1열왕 12,6) 재판 소임도 담당하였습니다(곤란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성읍 원로들에게 재판을 청하도록 규정한 신명 22,13-19). 성문 앞에는 시장도 섰습니다. 성안 사람들이 그곳으로 나가 외부인들과 물건을 사고 팔았지요. 아브라함이 그 일례를 보여줍니다. 그는 헤브론 성문 앞에서 사라를 묻을 막펠라 동굴을 구입합니다. 히타이트 사람 에프론에게서요. 그곳에 모여 있던 다른 히타이트인들이 매매를 인증해 주었습니다(창세 23,10.18).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성문 앞에서 재판도 하고 시장도 연 까닭은, 군중이 모일 만한 광장이 성문 앞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 이스라엘인들은 유사시를 대비하여 성읍을 요새처럼 만들고 그 안에서 거주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성 안으로 도피하였습니다(예레 4,5-6). 사정이 이러하니 성 내부는 거주지만으로도 조밀해서 군중이 모일 만한 장소가 없었던 겁니다. 번화한 성문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행위는 부유층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붐비는 곳에 앉아 있으면 바깥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을 수 있으니 그렇게 얻은 정보가 권력이 되었겠지요. 재판 중 법적 문제를 해결할 때도 도움이 되었을 테고요. 증인을 호출하기에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성문 앞이 용이했을 것입니다. 이런 성문의 중요성은 잠언에도 반영됩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성문 어귀에서 백성에게 가르침을 전달하지요(잠언 1,20-23; 8,2-4). 여기서 하느님의 지혜는 여인으로 의인화되고, 성문 앞에서 백성을 지도하는 원로, 곧 현인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단 유적지의 성문 앞 왕좌에는 이렇듯 흥미로운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요? 성지에서 발견하는 유적과 역사는 성경 읽는 즐거움을 한층 높여줍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구약학과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며, 수도자 신학원 등에서 구약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에제키엘서>와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이 있다. [2021년 11월 21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의정부주보 6면,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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