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톺아보기] 시편, 저마다의 사연 - 시편 1편, 2편 : ‘어느 길’, ‘누구 편’ 트로트가 대세입니다. 트로트를 들으며 자란 세대는 아니지만 간혹 길거리에서 듣게 되는 요즘 트로트는 그 음악의 대명사처럼 느껴지던 느끼함과 올드함에 새로운 옷이 입혀 진 듯 합니다.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곡을 들어보면 그저 ‘유행가!’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노랫말 속에 사람과 인생에 대한 깊고 깊은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한(恨)의 정서를 품은 트로트에는 분명 가요에는 없는 그 어떤 감칠맛이 담겨있음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트로트가 가진 끈질긴 생명력은 곡조가 지닌 간드러지는 맛깔스러움과 그 노랫말에 담긴 애틋함이 세대를 연결하고 시대를 위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듯 세대를 연결하고 시대를 위로하는 노래는 성경에도 있습니다. 바로 고대 이스라엘의 기도이며 노래인 시편입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있는 150개의 시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느님께 애원하고 하소연하며 절규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회개하고 구원을 체험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삶의 자리에서 나온 이 노래에는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고 눈물겨운 탄식에서부터 기쁨과 환희에 이르기까지 인간 경험의 다양한 측면이 녹아있습니다. 시편에는 출생과 죽음, 기쁨과 즐거움, 수고와 노고, 취침과 기상, 질병과 치유, 상실과 절망, 위로와 확신 등 나름의 깊이와 높이를 가진 삶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실존의 모습 그대로를 하느님께 표현해 놓은 것이지요. 시편은 그 첫 시작을 “복되어라!/행복하여라!”라는 축복의 말로 출발합니다. 150개나 되는 기도의 첫 시작이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전체의 서론에 해당한다고 알려진 시편 1편과 2편은 동일한 단어와 내용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편 1편은 ‘행복하여라!’는 말로 시작을 열고 시편 2편은 ‘행복하여라!’는 말로 끝맺음을 합니다. 처음과 끝 구절이 같은 단어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시편 1편과 2편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단어는 ‘묵상하다’입니다. 이 표현은 시편 1편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 시편 2편에서는 하느님의 주권을 반대하는 세상 군주들의 불평 어린 ‘술렁거림’, ‘쑥덕거림’으로 나타납니다. 시편 1편이 각 개인의 삶에 대한 것이라면 시편 2편은 세상 민족들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시편 1편은 율법을 묵상하는 삶에 대한 서술이고 2편은 하느님을 만물을 통치하시는 왕으로 묘사하는 시편입니다. 이렇듯이 서로 다른 듯 보이는 두 개의 시(詩)이지만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어 있는 이 시편들은 율법의 인도에 따라(1편)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며(2편) 사는 삶, 즉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복된 삶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전체 시편의 문을 여는 시편 1편에는 여러 가지 대조가 등장하는데, 우선 복 있는 사람과 악한 사람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악인은 윤리적, 도덕적 죄인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오만한 사람, 기고만장한 사람을 뜻합니다. 반면 참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는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귀띔해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은 침묵 가운데 마음속으로 고요히 말씀을 되새기는 의미보다는 훨씬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묵상’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하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다’, ‘사색하다’는 뜻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더 근원적인 의미로 ‘나지막이 중얼거리다.’, ‘신음소리를 내다.’라는 뜻입니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의미보다는 소리와 더 많은 관련이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묵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자의 으르렁거림과 구구거리는 비둘기 울음소리, 천등의 우르릉거리는 소리에도 ‘하가’를 사용했습니다. 곧 ‘중얼중얼’ 소리 내어 읊조리는 것이 성경의 묵상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치 꿀벌이 꿀을 찾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듯이 또는 사자가 먹잇감을 포획한 후 뼈다귀를 뜯으며 그르렁 그르렁 만족스러운 소리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웅얼웅얼’ 읊조리며 온 몸에 말씀을 새겨 넣는 것이지요. 눈깔사탕이라는 크고 단단한 사탕을 기억하시는지요? 사탕이 어찌나 큰지 입에 가득한 사탕 때문에 또렷하지 않은, 그저 웅얼거리는 말밖에 할 수 없던 기억이 있습니다. 크고 단단한 눈깔사탕이 다 녹을 때까지 달짝지근한 미각을 자극하던 사탕을 오래오래 입 안에 굴렸던 것처럼 하느님 말씀으로 옹알이를 하며 그 맛을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시편 1편에서 또 한 가지 살펴볼 것은 복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모두 저마다의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알찬 것(시냇가의 나무, 열매)과 쭉정이(바람에 흩어지는 겨)로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이처럼 복 있는 사람과 악한 사람, 그리고 그들이 맺는 삶의 열매를 대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선택’ 앞에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편 1편은 시편 세계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어느 길’에 설 것인지를 질문하고 시편 2편은 ‘누구 편’에 설 것인지를 물으며 선택의 단상에 우리를 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길을 선택하시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시렵니까? [월간빛, 2022년 1월호,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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