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마카베오시대의 대사제직?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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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5-09-26 | 조회수1,479 | 추천수0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마카베오 시대의 대사제직 정태현 신부님의 책 성서 입문 상권: 성경의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강요된 헬라주의는 유다인들의 거국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안티오코스 4세가 보낸 사절이 예루살렘 북서쪽 벳 호론과 리따 사이의 성읍 모데인에 도착하여 그리스 신들에게 제사를 바치라고 명령하자, 하스모니아 가문 출신 마타티아스가 이를 거부하였다. 어떤 유다인이 임금의 명령에 따라 이교 제사를 바치려 하자, 마타티아스는 칼로 그를 쳐 제단 위에서 죽이고 임금의 사절도 살해하였다. 항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66년 마타티아스가 죽자, 가장 용감한 셋째 아들 유다가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시리아군과 대적하였다. 유다의 별명은 '망치'라는 뜻의 마카베오였다. 여기서 마카베오 가문, 마케베오 항쟁이라는 이름들이 생겨났다. 유다가 죽은 뒤에 마타티아스의 막내 아들 요나탄이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요나탄은 현명하고 작전에 능숙한 지휘관이었다. 요나탄이 유다군을 지휘하는 동안 셀레우코스 가문은 내부 정쟁에 휘말려 유다 인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다. 요나탄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본디 유다인들이 차지한 땅을 되찾 고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년 예루살렘의 대사제 알키모스가 죽고 그 후계 자리가 비게 되었다. 157년 시리아는 요나탄과 평화 조약을 맺고 그가 요르단 서쪽 미크마스에 들어와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예루살렘에서 13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미크마스에서 요나탄은 판관 또는 지방 행정관 으로 지냈다. 153년 요나탄은 데메트리오스 1세와, 그의 정적이자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며 왕권을 쟁취하려는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와 동시에 평화 조약을 맺는다. 요나탄은 그 둘을 대동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이 있는 언덕을
차지하고 시리아 주둔군을 아크라 요새에서 물러가게 한다. 알렉산드로스 발라스는 152년 요나탄에게 대사제직을 부여하고 데메트리오스 1세를 축출한 뒤, 요나탄 을 코일레 시이라의 영주 (스트라태고스)와 지방 장관(메리드아르케스)으로 임명한다. 이렇게 아스모니 아 가문을 이어받게 된 대사제직은 로마가 팔레스티나를 점령할 때까지 내내 지속되었다. 그런데 하스모니아 가문에서 일반 사제직은 허용되었으나 대사제직은 격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하스 모니아 가문의 대사제직을 둘러싸고 유다인들 내부에서는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요나탄 재임 기간에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가 이미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요나탄이 죽자 요나탄의 지휘권은 곧바로 마카베오 형제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시몬에게 넘어간다. 하스모니아 왕조는 마카베오 다섯 형제의 마지막 인물 시몬에게서 시작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하스 모니아는 마카베오 형제의 아버지인 마타티아스의 증조부이다(「유다 고대사」12,263). 본디 이 이름은 헤스몬 또는 하쉬모나라는 지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스모니아는 마카베오기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요세푸스의 책과 탈무드에서는 자주 눈에 띈다. 시몬은 명실공히 유다의 정치· 종교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다인들과 사제들은 이러한 내용에 동의하였 다. '참된 예언자가 나올 때까지 시몬이 계속 그들의 지도자와 대사제가 된다. 그는 백성의 총독과 성소 의 책임자가 되어, 엄무를 담당할 이들과 이 지방과 무기와 요새를 관리할 이들을 임명할 권리를 갖는다. 시몬은 성소의 책임자가 되어, 모든 이는 그에게 복족하고 이 지방의 모든 문서는 그의 책임으로 작성한 다. 그는 자주색 옷을 입고 금 죔쇠를 찬다.' "(1마카 14,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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