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죽는 자유 - 갈라티아서 갈라티아서에 나타난 바오로는 분노에 차 있다. “나의 자녀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나는 다시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 …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갈라 4,19-20) 갈라티아 공동체 역시 사도에게 적대감을 품은 듯하다.(4,16 참조) 서로의 감정이 극에 달한 건, 갈라티아 공동체의 신앙적 열정 때문이었다. 더 잘 믿고, 더 잘 따르고,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 갈라티아 공동체는 노력했다. 다만 그 노력은 살아왔던 삶의 형식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았다. 익숙한 것이 진지한 것으로, 당연시 되었던 것이 진리로 둔갑하기 쉬웠고, 열정 어린 노력은 제 삶의 껍질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더 잘 믿기 위해 노력하는 갈라티아 공동체가 더 배타적이고 더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사도는 분노한 것이다. 사도는 신앙의 열정이 배타적 오기로 변질된 갈라티아 공동체의 모습을 노예에 비유한다.(4,9) 믿는다는 건 타자를 전제하고 타자를 기억하며, 타자를 향한 마음일진대, 믿는 게 오히려 제 안의 욕망에 무릎 꿇는 일이 된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보다 더 참혹한 일은 제 욕망과 믿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된다. 믿는 이의 삶은 늘 죽고 다시 사는 일이 아닐까. 제 만족의 감흥을 신앙의 열매로 착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에 갇혀 있어 듣고 보는 것을 낯설고 불편한 일로 취급한다. 세상이란 곳에 저 혼자 존재하듯, 세상과 벽을 치고 살아 그들의 삶은 편견과 아집으로 찢기고 흩어져 갈 뿐이다. 가끔씩 신학을 하는 이들의 사명을 생각할 때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일에 진지한 것이 세상에선 조롱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얼마간의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세상이 우리 신앙의 언어와 가치를 몰라준다고 떼를 쓰는 건 오히려 다행이다. 그보다 더 비참한 건, 세상이 몰지각하여 신학과 신앙의 진지함을 받아들일 수준이 안된다며 트집잡는 것이리라.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2,19) 사도 바오로는 제 삶의 전통과 제 지식의 탁월함에서 죽었다. 율법이라는 과도한 진지함에서 죽었고 세상의 당위 앞에 저 스스로 쌓아 온 세상의 지식으로부터 죽어갔다. 마치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부활한 예수를 십자가의 예수로 만난 바오로는 십자가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인지하고 실천했다. 그런 죽음은 세상의 조롱을 처참히 겪어내는 죽음이었고, 조롱을 은총으로 바꾸어내는 결기였다. 바오로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2,20) 바오로는 예수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다. 제 일상과 당위에서 죽어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그 자체를 살게 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갈라티아서의 자유는 제 욕망이나 가치의 실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와 한몸을 이루는 자유는 제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초월이었다. 죽고 나서 새롭게 태어난 자리에 예수는 배우고 익히며 지향해야 할 상아탑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주와 같은 넓고 깊은 빈 여백, 그것으로 예수는 남아있다. 그 여백에 무엇을 채우든, 여백은 또 다르게 팽창하고 확대된다. 채워도 채워도 여전히 헐겁게 비워낸 듯 다시 텅 빈 여백으로 바오로는 예수를, 그 예수가 제시한 자유를 만끽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 시켜 주셨습니다.”(갈라 5,1) 그렇다. 해방이다. 예수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꺼내놓고 곱씹으며 정돈해 나가는 신학적 작업의 끝은 해방이어야 한다. 예수를 언급하며 제 삶의 틀과 규정과 가치관을 가다듬는 일은 참으로 민망하다. 예수를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그로,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예수가 그러했다. 사람이면 되었다고.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면 그 사람이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그가 그답게 살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예수는 그렇게 외치다 죽어갔다. 세리든, 창녀든, 작은 이든, 감옥에 갇힌 이든, 예수는 그들이 그들로 존재하는 한 그들이 그들로 살아가게끔 가르치다 죽어갔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6,15) 완전히 새롭게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지금껏 열심하자고 한 모든 행동이 때론 폭력이었음을, 때론 집착이였음을, 그리고 때론 교만이었음을 고백해야만 한다. 목놓아 부르짖고 싶은 것조차 실은 거기에 얽매인 채 살아간 노예의 울부짖음밖엔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백년 살다보니 이제사 부끄러이 깨닫는다. 결국은 난 ‘쓰레기’였다고 고백하는 일(필리 3,8)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싶다. 잠시만 힘을 빼고 깊고 긴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음을, 그것으로 내가 조금씩 죽어가기를, 그것으로 내가 조금씩 자유롭기를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새 창조만이 중요하니까…. [월간빛, 2022년 2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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