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야기] 복음적 실천을 위한 가난 이제 행복선언의 조건에 해당하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행복선언의 목적 원인(하늘나라, 위로받음, 땅을 차지함, 흡족해짐, 자비를 입음, 하느님을 봄,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은 주님께서 이루어주시는 업적이므로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가장 먼저 살펴볼 내용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어쩌면 가진 게 많은 부자이지만 검소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나실 수도 있겠습니다. 마치 일억 원짜리 승용차를 타고 다닐 만큼 돈이 많지만 나름대로 가난을 실천하기 위해서 천만 원짜리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진짜로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답하기가 조금 애매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나머지 구천만 원 때문입니다. 천만 원짜리 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한 구천만 원인지가 중요합니다. 일억 원짜리를 포기하고 천만 원짜리 승용차를 타면서 나머지 구천만 원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은 참된 복음적 가난이 됩니다. 그런데 만일 구천만 원을 자기 통장에 그대로 남겨두고 단지 자신과 자기 가족들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결코 복음적 가난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마음에는 자신을 높이고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한 만족일 뿐이며, 이웃을 속이는 기만이 됩니다. 재물의 참된 목적을 알지 못하고 목적과 수단을 분간하지도 못한 채 오직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살면서 그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착각에서 오는 즐거움과 만족으로 누군가를 부정하기라도 한다면, 상대에게 무례해지고 분노를 표현하게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가난은 하느님께 공로가 되지 못합니다. 결국 그런 이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될 수 없습니다. ‘가난’이란 말은 언제나 돈을 연상시킵니다. 우리 삶에서 돈은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인데도 많은 이가 돈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돈으로 병들어갑니다. 그 병은 하느님 나라의 생명이 아니라 파멸의 죽음으로 이끕니다. 지인의 어머님께서 자주 하셨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개도 안 물어가는 돈!” [2022년 2월 20일 연중 제7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이승엽 미카엘 신부(선교사목국 신앙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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