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시노드는 지금] 신약성경에서 배우는 시노달리타스
복음화를 통한 자비와 용서, 일치의 삶 권고 - 신약 성경의 서간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로 ‘사랑의 실천’을 가르친다. 사진은 서울대교구 입학 예정 신학생과 일반 봉사자들이 명동밥집에서 배식 봉사를 하고 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종말에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된다. 그날까지 교회는 세상의 유혹을 견디고 하느님의 위로를 받으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순례자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자신이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귀양살이 중이라는 것을 알고, 하늘 나라의 완전한 도래와 자기 임금님과 영광스럽게 결합되기를 바라고 갈망한다. 영광스러운 교회의 완성과 그 완성을 통한 세상의 완성은 큰 시련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769항 참조) 교회는 이런 이유로 늘 쇄신해야 한다. 완성을 향한 지상의 순례 길을 걷고 있는 교회는 교회의 삶의 방식과 운영 방식인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를 통해 복음 선포의 사명과 삶을 쇄신해 왔다. 교회의 삶의 방식이며 운영 방식인 시노달리타스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게 바로 ‘신약 성경’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보편 교회가 지금 모색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 여정의 나아갈 방향을 안내하는 길잡이일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이끌어낼 교회 쇄신의 양상을 포괄하며 함축하고 있다. 한 마디로 신약 성경을 알면 시노달리타스 여정의 종착지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준비 기간을 거쳐 한국 교회 안에서 지역 교회별로 본격 궤도에 오를 시노달리타스 여정을 앞두고 ‘신약 성경에서 배우는 시노달리타스를 간략히 정리했다. 신약 성경 신약 성경은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 14개 바오로 서간, 7개 가톨릭 서간, 요한 묵시록 등 총 27권으로 구성돼 있다. 신약 성경이 쓰인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따라서 신약 성경 전체 내용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를 좀더 세분해 보면 복음서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행전은 교회의 선교 활동을 이끄시는 성령을, 서간은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한 묵시록은 종말에 드러날 계시를 알려주고 있다. 곧 신약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부제는 복음과 선교, 그리고 교회의 삶으로 정리할 수 있다. 주님은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자라신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펼쳐놓고 당신 신원과 사명에 관해 선포하신 첫 번째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신 분이심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참행복 선언(마태 5, 3-10; 루카 6,20-23)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을 대한 복음을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시면서 물질적 가난뿐 아니라 더 넓은 의미의 가난, 곧 영적 가난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첫 자리에 두시고, 하느님 나라가 우선으로 이들을 향해 있음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며, 가장 먼 사람들을 이웃으로 삼고, 어린이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당부하신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고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곧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난하게 사셨다. 배고픔과 목마름과 궁핍을 겪으셨으며, 더 나아가 여러 가난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으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의 첫 자리에 가난한 이들을 두셨기 때문에 교회는 늘 가난한 이들을 우선으로 선택해 왔다. 교회 창립 초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으로 선택하신 예수님을 따라 성찬을 위한 빵과 포도주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선물도 준비해서 모였다. 지금까지 이 아름다운 전통이 계속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헌금’이다. 복음서는 시노달리타스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가난’에 주목할 것을 제시한다. 복음서는 인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신 주님의 너그러우심을 본받아 연대의식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복음과 선교 사도행전은 주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복음을 맨 먼저 예루살렘에 사는 유다인들에게 선포한 다음 유다 지방, 사마리아,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전하였음을 보여준다. 곧 그리스도교가 맨 처음 유다인만의 교회였으나 성령 강림과 인도로 유다인과 이방인이 통합된 교회로 전환된 다음 이방인 세계로 향한 본격적인 선교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방인의 사도’로 불리는 바오로 사도 역시 전교 여행 내내 도시에 들어갈 때마다 언제나 먼저 유다인 회당을 찾아가서 유다인에게 복음을 선포한 후 이방인들을 선교했다. 사도행전은 이 복음 선교 여정에서 교회의 첫 번째 시노달리타스를 살아가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 과정을 상세히 증언한다.(사도 15장, 갈라 15장 참조) 예루살렘 사도 회의의 주요 내용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다교 할례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굳이 유다교의 관습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우상과 관련된 것을 멀리하도록 신자들에게 권고했다. 이는 교회가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 모여 성령의 목소리를 식별하는 것을 통해 교회의 삶의 양식과 운영방식을 밝힌 첫 사례이다. 사도행전은 시노달리타스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복음화의 여정을 주목할 것을 제시한다. 교회 창립 시기 복음이 가장 먼저 예루살렘의 유다인에게 전해졌듯이 그리스도인들이 회개를 통해 새롭게 복음화될 것을 요청한다. 새로운 복음화는 첫째,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더 온전하게 응답하도록 돕는 것이다. 둘째,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의 요구대로 살지 않는 이들에게 신앙의 기쁨을 되찾는 회개, 복음대로 살려는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또는 여전히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복음의 기쁨」 14항 참조) 사도행전은 시노달리타스 여정에 있는 교회에 먼저 구성원부터 복음화할 것을 권고한다. 아울러 교회의 할례로 상징되는 교조주의적 태도나 지나친 호교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모든 이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열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 신약 성경의 서간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로 ‘사랑의 실천’을 가르친다. 사랑은 주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이다. 서간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사랑’ 곧 윤리 덕목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서간들 특히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교회 안에서의 삶, 신앙인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새로운 삶이고,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에페 4,23-24; 콜로 3,10 참조))라는 것이다. 잃었던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간들은 새로운 창조 안에서의 삶, 곧 신앙인의 삶으로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일치’를 제시한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내적으로 일치하고(1코린 12장 참조), 외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체험한 자비와 용서를 살아가는 것이다. 신약 성경의 서간들은 시노달리타스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표현되는 ‘자비와 용서의 삶’ 그리고 ‘일치의 삶’을 요청한다.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일치의 삶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세례를 통해 받은 하느님의 은사이다. 신약 성경의 서간들은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는”(2티모 1,6) 것을 통해 교회가 시노달리타스를 살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해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2월 2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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