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 : 마태오 복음을 중심으로
탄생(마태 1,1-25), 아기로 오신 예수님, 임마누엘 로마 유학 생활 중,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하신 성탄 밤 미사 때의 일입니다. 저는 사제석에 앉아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 성탄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교황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미사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전례를 마치고 성찬의 전례를 시작 할 즈음에 어디선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응애!” ‘전 세계 교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님께서 거행하시는 거룩한 성탄 밤 미사인데, 난데없이 아기의 울음소리라니…’ 제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좀 어떻게 해야 하지 않나? 도대체 아기 엄마는 뭐하고 있나? 근위병이라도 달려가서 그 아기를 얼른 성당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하지 않나?’ 마음속에 떠오르는 갖가지 분심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아기의 울음소리는 전혀 잦아들지 않았고 성찬례 내내 대성당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한가지 생각이 번쩍 제 머리를 스쳤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느님께서 정말 이렇게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 오셨구나!’ 성찬례 끝 무렵, 저를 깨닫게 해 준 이 생각은 제게 크나큰 기쁨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성탄 밤 미사에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잔잔히 울려 퍼지는 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참으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 예수님(1,23)을 만날 수 있었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 마태오 복음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로 시작합니다. 유다인들은 위대한 임금이었던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가 나오기를 간절히 고대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부터 성조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모든 민족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성취해 줄 구원자를 희망했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오랜 기다림과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실현됩니다. 정통성과 혈통이 매우 중요시되었던 유다 사회에서 아브라함과 다윗, 여러 족장과 왕들을 거쳐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 이 족보(1,1-17)는 하느님의 구원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의 정체를 잘 드러내 줍니다. 특별히 족보에서 언급된 네 명의 여인들(구약에서 ‘죄인’이며 ‘이방인’으로 등장하는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밧 세바)을 통해서 우리는 유다인과 이방인, 죄인과 의인, 곧 모든 이들을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섭리(구원의 보편성)와 이를 완수하시는 예수님의 사명을 미리 떠올리게 됩니다. 동시에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역사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발견하고, 마침내 우리는 그것을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1,18-25)에서 확인합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자 ‘의로운 사람’ 요셉은(1,19 참조) 남몰래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마도 요셉이 겪었을 고민과 걱정,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로부터 요셉은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1,20) 사실 창세기 3장에서 죄를 지은 인간이 하느님께 드린 첫 말마디는 ‘두려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 죄를 지은 인간은 필연적으로 두려움과 외로움, 불안에 허덕이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러, 신약 성경의 첫자리를 차지하는 마태오 복음서의 시작에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구약에서 인간이 하느님께 처음으로 드린 말씀이 ‘두려움’에 관한 것이었다면, 신약에서는 하느님이 천사를 통해서 인간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두려워하지 마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극복하는 하느님의 명령 “두려워하지 마라.”의 근거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1,21) …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1,23) 하느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바로 주님께서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임마누엘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임마누엘’ 덕분에 이제 우리는 그 어떠한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인간을 참으로 사랑하시어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으로 충만하신 ‘예수-임마누엘’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상의 온갖 두려움을 이깁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1,24-25) ‘의로운 사람 요셉’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두려움 없이’ 천사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돕고, 성가정을 지키고 보호하며, 하느님 구원 사업의 조력자로서 본인의 임무를 다합니다. 이러한 요셉의 모습은 마태오 복음 2장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이처럼 마태오 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과 탄생에 관하여 전합니다. 마태오 복음 1장을 묵상하면서, 문득 각자의 삶 가운데에서 마음 속에 울려 퍼지는 아기 예수님의 울음소리에 한번 귀기울여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7세기 독일의 가톨릭 사제이자 시인이었던 안겔루스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 1624~1677)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천 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 해도 그대 안에서 태어나시지 않는다면, 그대는 영원히 길을 잃고 헤맬 뿐입니다.” 우리 안에서 ‘지금 오늘’ 다시 새롭게 태어나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마땅히 예수-임마누엘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모든 이들을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우리 또한 ‘두려움 없이’ 충실히 응답하며 주님과 함께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월간빛, 2022년 5월호,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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