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의 12 순간들 (8) 유배와 영적 도약 구약 시대에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은 단순히 인간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신들의 전쟁이기도 했다. 신들이 자신들을 위해 싸워주고 계신다 여겼고, 그랬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든 승리의 공을 신에게 돌렸다. 만일 두 나라가 싸워 한 나라가 이겼다면, 그것은 또한 그 나라 수호신의 힘이 더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그곳에서 일어난 열 가지 재앙들은 단순히 모세의 지팡이에서 일어난 기적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과 이집트 신들과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신, 하느님께서 승리하신 사건이었다. 그랬다. 백성들이 생각한 하느님은 유일신이 아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들 중에 가장 강한 신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무너졌다.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도 모두 파괴되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바빌론에 가보니 바빌론의 신전, 마르둑의 거처는 정말 대단했다. 하느님의 집은 마르둑의 것에 비하면 작은 천막에 지나지 않았다. 유다인들은 고민한다. 하느님은 정말 가장 강한 신인가 하느님은 마르둑보다 힘이 약하신 것 아닌가? 하느님은 패하셨는가? 그때였다. 이 혼돈 속에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진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이사 44.6) 백성들은 드디어 깨닫는다. 하느님은 패하신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 세상에 하느님 말고 다른 신은 없었다. 이 분이야말로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유일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끄신다. 자신들의 패배도, 성전의 파괴도, 바빌론으로의 유배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느님과의 계약을 깨뜨린 자신들을 일깨우기 위해, 바빌론을 이용하여 '극약 처방'을 내리신 것이었다. 백성들은 영적 도약을 이뤘다. 이 깨달음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들은 바빌론 신전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신앙을 잃거나 마르둑을 섬기게 되었을지 몰랐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도 수없이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혼란과 시련 속에서 백성들은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 위기 속에서 그들은 더욱 하느님께 매달렸다. 나라도 없고 임금도 없고 성전도 없고 제사장도 없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더 하느님 가까이에 있었다. 집을 떠나니 보였다. 이 세상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이, 그동안 자신들이 일삼았던 우상숭배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고 순수해졌다. 유배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었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귀한 꽃을 피웠다. 하느님의 섭리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그분의 큰 그림 안에서는 삶의 시련마저도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니 말이다. [2022년 5월 22일 부활 제6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정남진 안드레아 신부(용소막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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