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베텔과 야곱이 본 환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베텔이라는 옛 성읍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꿈에서 천상의 계단 환시를 본 곳입니다(창세 28,1-22). 형 에사우에게서 장자권과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뒤 야곱은 하란에 있는 외숙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려고 길을 떠났는데요, ‘루즈’라는 곳에서 하룻밤 쉬다가 천사들이 하늘 계단을 오르내리는 환시를 보게 된 것입니다. 잠에서 깬 뒤 그는 베고 자던 돌을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성읍 이름을 베텔로 바꿔 붙입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집’을 뜻하는데요, 천사의 무리가 하늘 계단을 오르내리던 진귀한 장면을 지명에 담으려 한 듯합니다. 흥미롭게도 옛 유다 문헌(『창세기 라바』 68,12)에서는 이 천사들을 두 무리로 구분하였습니다. 땅으로 내려오는 천사들은 야곱이 가나안을 떠날 때 동행할 이들이고, 올라가는 천사들은 가나안에서 야곱을 지켜주던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곱의 수호 천사들인 셈인데, 지금은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길이니 이제껏 지켜주던 이들이 올라가고, 가나안 밖에서 동행할 천사들이 내려온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풀이는 시편 91,10-12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하느님은 천사들에게 명령하셔서 당신을 의지하는 이들을 모든 길에서 지켜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문이 듭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불의하게 장자권을 차지한 죄인을 주님께서 왜 특별히 보호하시고 그에게 천사들을 보내셨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특별히 야곱에게만 혜택이 주어진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수호 천사가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야곱은 대표격이지요. 사실 야곱은 비열하게 장자권을 차지한 죗값을 톡톡히 치릅니다. 우선 어머니의 보호 속에서 집에 있기 좋아하던 그가(창세 25,27) 피난 길에 올라 장장 이십 년 동안 외숙의 집에서 타향살이했다는 점(31,38)에서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야곱은 사랑하는 어머니 레베카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야곱이 사랑한 아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간 일도 그가 받은 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을 속인 방법이 의미심장하지요. ‘염소’를 잡아 그 피를 요셉의 ‘옷’에 적신 뒤 그의 죽음을 가장합니다(37,31-32). 이는 야곱 자신이 아버지 이사악을 속였던 방법과 비슷합니다. 야곱은 형이 사냥 간 틈을 타 ‘염소’를 잡고 고기를 준비한 뒤 에사우의 ‘옷’을 입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27,1-29). 그러니 자신이 지은 죄가 아들을 통해 고스란히 되돌아온 셈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스스로도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47,9). 그런데 우리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요? 하느님은 인간이 지닌 악을 선으로 바꾸어 이끄시고, 저마다의 모난 부분을 갈고 닦아 세상의 모자이크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비열하게 타인을 등치던 야곱도 단련시키셔서 에사우에게 용서를 청하게 만드셨습니다(33,1-11). 지금은 베텔에 돌무더기만 남아 있지만, 그 위로 빛나는 하늘은 당시 천사들이 오르내린 천상의 계단을 상상하게 합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구약학과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며, 수도자 신학원 등에서 구약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에제키엘서>와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이 있다. [2022년 6월 12일(다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의정부주보 6면,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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