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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구역반장 월례연수: 사랑과 친교를 위하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6-12 조회수1,476 추천수0

[구역반장 월례연수] 사랑과 친교를 위하여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창조 영성의 핵심 사랑과 친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요한 13,6)

 

성목요일에 거행되는 세족례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손수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그 모습에서 끝까지 가는 사랑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과 공동체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해와 용서, 섬김과 봉사, 존중과 책임, 나눔과 돌봄 등 여러 구체적인 방법으로 표현되는 사랑은 이는 세상과 공동체 속에서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부서지고 단절된 상황을 치유하고 나아가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담론이자 동력입니다. 요한 복음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고 그래서 아드님을 보내주셨다고 하고(3,16 참조), 요한의 첫째 서간도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전합니다(4,10 참조).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인간중심적 사랑, 인간만을 위한 사랑을 뜻하는 것일까요?

 

 

피조물의 본성인 사랑

 

“하늘의 새들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 …… 들짐승과 집짐승들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다니 3,80-81)

 

이탈리아의 아시시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탄생지이자 세계 평화의 도시로 유명합니다. 그곳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이 같은 기원을 가졌음을 깨달았으며, 그래서 모두를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자연과 피조물들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사랑과 창조의 신비를 본 것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묘사하며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자연 만물은 하느님께서 지으셨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분께서 하신 일이라 이야기합니다(집회 43,13-33 참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창조는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넘치는 계획과 결단에 의한 것이며 그래서 모든 피조물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녹아있고 새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말 못하는 식물도 사랑한다는 말과 정성에 감복하고 크고 작은 동물도 애정과 관심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사랑은 모든 피조물들의 본성입니다. 모든 자연과 피조물, 인간은 사랑으로 친교를 이룹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공동의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찬미받으소서, 17-61항)

 

 

단절과 파괴에 대한 성찰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10)

 

참담하게도 우리는 파괴된 친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른 댓가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합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아벨의 피가 울부짖습니다. 여기서 죄의 두 가지 원형 즉 교만과 폭력이 드러납니다. 죄와 벌에 대한 기원을 성찰한 이 이야기는 죄의 원인인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욕심, 그 결과인 관계의 단절과 파괴를 그려냅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자연과 사회가 파괴되는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입니다. 급속한 과학 발전과 눈부신 경제 성장은 인류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온갖 사회문제, 불평등, 불공정과 같은 문제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자연은 어떠합니까? 환경파괴와 기후 위기, 생물 다양성의 감소와 같은 재앙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제어할 수 없는 우리의 욕심과 욕망, 이웃과 사회, 자연에 대한 착취와 무관심이 있고 그로부터 수많은 피조물과 자연, 이웃들의 고통과 아픔이 비롯됩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섬김과 봉사, 존중과 책임, 나눔과 돌봄, 사랑이 결여된 상황, 바로 회복되고 치유되어야 할 폭력과 죽음의 문화를 곳곳에서 마주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성찰과 신앙이 주는 빛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우리에겐 근본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인간과 세상, 삶과 자연, 피조물,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현대사회는 성장과 발전의 연속이었고, 아메리칸 드림, 코리안 드림과 같은 물질만능적 신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입니까? 단언컨대 하느님과 복음이 없이 물질과 쾌락뿐이라면 그것은 하느님 나라도, 그분께서 원하시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 창조를 완성하는 무엇입니까? 그분이 바라시는 창조의 본질인 사랑은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바로, 섬김과 봉사, 존중과 책임, 봉사와 돌봄입니다. 루카 복음의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 12,6)는 이야기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람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피조물의 존귀함을 상기시키며 우리를 ‘생태적 회개’로 초대합니다. 생태적 회개(Ecological conversion)란 신앙의 결실들(사랑, 섬김과 봉사, 존중과 책임, 봉사와 돌봄)이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드러나도록 마음과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찬미받으소서」, 217항 참조). 이것은 우리가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탁월함을 무책임함, 개인적 영광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받은 하느님 은총이 다른 피조물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도 펼쳐지길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찬미받으소서」, 220-221항 참조).

 

 

창조 회복을 위한 제언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창조의 목적과 본질이 사랑이듯, 인간과 사회의 바탕도 사랑입니다. 이는 자기중심적인 기복적 신앙을 넘어 세상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통해 ‘함께 더불어 살아감’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또한 경계를 긋고 분리하고 배타적으로 적대함이 아니라 복음적 중심으로 세상 속에서 환대하고 돌보고 사랑하며 사람과 공동체 안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하며 그리하여 우리가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모든 형제들」, 35항 참조). 사도 바오로의 위대한 예언은 인간과 세상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가치인 사랑의 신비를 아름답게 선포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1코린 13,4-5 참조) 창조 질서의 회복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역할에 대해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실천적이며 미래지향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인간의 선한 행동과 사랑을 통해 더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세상도 하느님이 필요하지만 하느님께도 당신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일꾼이 되시겠습니까?

 

1)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228항)

2) 우리는 서로 이웃과 세상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의식해야 함(229항)

3) 온전한 생태계는 폭력, 착취, 이기주의를 타파하는 데서 시작됨(230항)

4) 사회와 세상 안에서 돌봄의 문화가 스며들게 해야 함(231항)

5) 사랑과 돌봄의 문화는 강력한 영적 체험의 장이 되기도 함(232항)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05L9KYvS3Vg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2년 6월호, 이주형 세례자요한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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