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성경] 저녁 고층 건물들이 그늘을 만들기 시작하는 시간, 해가 자신을 낮추고 촘촘한 밀도의 빛도 긴장을 푼다. 힘센 큰 톱니바퀴에 맞물려 어쩌지 못해 돌아야 하는 작은 이들의 시간을 지나, 삐죽빼죽한 퍼즐 조각이 제자리 꼴을 맞춰내듯 저마다 자기를 찾게 되는 때다. 그런 시간이 있다. 저녁. 내밀함과 고요함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시간. 빛과 어둠, 활동과 휴식의 경계에 놓인 시간이며 숨겨진 날 것의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시간이다. 그래서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시간이며 다독이고 위로하는 시간이다. 한순간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근사한 저녁을 들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 순간은 혼자 있기를 처절히 바라는 시간이다. 우리가 돌아볼 하루 중 다섯 번째 시간인 저녁 모습이다. 저녁을 생각하면, 분명 고요함과 침묵이 떠오른다. 관계 간에 오가는 말들의 향연과 사나운 크락션 소리 난무한 교통체증으로 머물렀다가 어느덧 허무하게 풀리듯 사라지면 감춰져 있던 소리와 생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루카복음서의 마지막 장은 엠마오를 향하던 두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남을 다룬다. 여기서 제자들은 저녁에 “눈이 열린” 사건을 체험한다(루카 24,13-35 참조). 어떻게 눈이 열리게 되었을까?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그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며 그들이 품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음을 토로한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주셨다.”고 한다(루카 24,27). 이상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이미 제자들에게 성경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기도 했거니와 이 가르침의 시간이 물리적으로 엠마오에 가는 시간보다 훨씬 길기에 더 자세한 설명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겪었다면 제자들의 지식은 이미 충분한 상태다. 그들의 가르침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지 않음에도 예수님은 그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가르침을 주신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강권한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 24,29). 해가 저문 저녁에 여행을 이어간다면 큰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일 수도 있고 걷는 동안 받았던 가르침의 감동 때문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제자들보다 더 멀리 가고자 하셨던 예수님이 그들과 머무셨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고 예수님이 빵을 떼어 나누셨다. 이 역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수없이 해오신 일이었다. 특별할 것이 없다. 오히려 눈이 열릴 좋은 지점을 찾자면 군중이 열광했을 법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때가 더 적합하다(루카 9,10-17 참조).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기적도 없다. 예수님은 그저 해오시던 일상적인 일을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빵의 나눔이 주입되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눈이 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회였다. 필연으로 가기 위한 우연의 기회. 예수님 진심의 영역과 제자들 기대의 영역이 서로의 경계에서 마주쳤다. 이미 백만 번도 더 보아 익숙해진 것들이 마치 처음 보는 듯, 눈앞에 하나의 차원으로 밀려와 그대로 덮친다. 힘센 톱니바퀴에 물려있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 말들의 교통체증이 사라지는 저녁에 예수님은 강요 없는 동반을 해주었고 그들은 가라앉아 고요하게 된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생각해온 유능한 예언자는 이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 눈이 열린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큰 퍼즐에 끼워질 삐죽빼죽한 조각이 되는 일뿐이다. [2022년 8월 28일(다해) 연중 제2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노송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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