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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그리스도인(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구원 - 퍼옮김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이삼용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23 조회수3,193 추천수0 신고

1. 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과거의 교회입장

 

불과 2000여년 전에 출현한 그리스도 교회는 100만년 내지 200만년

으로 추산되는 기나긴 인류역사에 비해 극히 짧은 역사에 속합니

다. 그럼에도 그리스도 교회는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스스로 절대

적 진리의 종교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교회는, 인간이 구원되려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고백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

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출현 이후에는 늘" 교

회 밖에서는 아무런 구원이 없다"는 정식이 교의화 되어 가르쳐져

왔습니다.

 

 3세기에 이미 치쁘리아누스는 그러한 사실을 가르쳤는데, 즉 교회

는 인간이 구원되려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고백

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442년 플로렌스공의회

에서 선포된 교의는 이러한 입장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공의회는 "’우리 주이시며 구세주의 말씀으로 설립된 로마 성교

회는’ 가톨릭 교회 밖에서 존재하는 사람들, 즉 이교인뿐만 아니라

유다인도, 이단자도, 열교자(裂敎者)들도, 만일 이들이 죽기 전에

가톨릭 교회에 들어오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고 오히

려’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 영원한 불에 빠지

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고백하고 선포한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은 가톨릭이라는 문에 들어서지 않고는 결코

구원되지 못한다는 강력한 경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어찌보면

너무도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표현이며 자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신자는 물론 타종교인 무신론자들은 구원

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던 배경도 결코 간과할 수

는 없습니다. 즉 이러한 타종교에 대한 부정은 유대인이나 회교도

들의 존재가 교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도 교회는 그 속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을 잃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또 타종교에 대한 우위를 주장함으로써 타종교의 도전을 막아보려

는 의도에서,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에서 교회를 보호하려는 의도에

서 그러한 입장을 끝내 고수했던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이후의 구원문제

 

이러한 타종교와 무신론자에 대한 배타적인 관념들은 중세를 지나

도록 지속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차츰 완화되었으며 마침내

타종파와 타종교 그리고 타세계관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고 교회 안팎으로부터 평가받고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에 이르러서는 많은 변화를 보게 됩니다.

 

이 공의회는 "성서와 성전(聖傳)에 의거하여 나그네 길에 있는 이

교회가 인간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

도 한 분만이 우리의 중재자시요 구원의 길이시며, 이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 것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교회는 한편으로는 구원을 받는데에 있어 교회의 필요성을

가르치면서 다른편으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명백히 가르

칩니다. 즉 하느님은 이교인에게도 충분한 은총을 부여하시고, 이

은총은 교회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도 도달될 수 있다고 가르

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비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부분적으로 내린다는 주장을 부인하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만인을 위해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사실 교회는 이미 중세 때부터’열세(熱洗:열망의 세례)에 대한 가

르침을 통해서 비 그리스도인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해 왔습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구원에 있어서 교회의 필요성을 가르

치는 한편, 교회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 또한 명백히 천명하고 타종

교와 타세계관과의 허심탄회한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자세를 보

여 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교회는 극복할 수 없는 오류의 처지에서

자기 탓 없이 교회 밖에서 생활하는 인간에게 구원 가능성을 배제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그들에 대하여 긍정적인 최

종 판결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일은 아직 없습니다. 성서에서도 신

약이나 구약 그 어디서도 타종교에 관하여 절대적으로 명료한 판결

을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상황 속에서 비그리스도인의 구원문제와 비그리스도교

적 집단-타종교 및 무신론 등의 구원의미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체계

있게 구명(究明)한 신학자가 바로 K.라너 입니다. 그는 60년대 초부

터 ’익명의 그리스도인’ 또는 ’익명의 그리스도’론이라는 학설을 통

하여 이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의

이론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3.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

 

 이 이론의 근거는 우선’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 즉 누구나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라너는

인간은 자신이 구태여 의식하지 않아도 또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그 행위가 하느님게 지향되도록 창조된 존재라고 합니다. 즉 인간

이 어떤 완전성(선하게 살려는 의지, 올바른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려는 의지)에로 나가기 위한 모든 행위들 속에는 이미 그렇게 되

도록 유도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전제되고 그 모든 행위는 바로

그분께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여러가지 은총

과 사랑 속에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 주시는데 그러한 행위

의 절정은 바로 당신이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며 인

간은 바로 이러한 은총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라고

합니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구원되

었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구원을 위해서는 하느님 은총이 필요한데 비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잠재적 신앙행위(완전성에 나아가기 위한 모든 행위속에 하

느님의 능력이 전제되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 향하게 됨)를 통해

신앙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때 인간은 누

구나 잠재적으로 이미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믿어야 할 것들을 자신의 의지나 자유,의식 보다 앞서 존재

하는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너는 여기서 ’하느님의 계시인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곧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을 말하며 이 받아들

임은 참된 이웃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참된 이웃사

랑은 함축적으로 하느님을 긍정하며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포함하고 있고 이 ’이웃사랑’은  바로 ’하느님사랑’ 이라는 것입니

다. 여기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

하는 것이 되는가를 쉽게 설명해 봅시다.

 

하느님은 분명 지극히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선 자체이시기에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게,올바르게 생각

하고 또 살아가는 심성을 지니게 마련입니다.(콩을 심으면 콩이나

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오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

께서 주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

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

랑이 되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받

아들이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은 그리스도

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

한 의미로서 라너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비그리스도인도 결국 함축

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라너는 타종교와 무신론자들 속에서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보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여기서도 기본적인 전제는 바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 즉 모든 이가 구별없이 구원되기를 바

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타종교나 무신론자들도 제외되지 않

습니다. 즉 어떤 종교이든 한 시대에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하

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하는 정당한 종교는 있게 마련이고 거기

에 소속되어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옛날 조선시대를 보면 당시에는 그리스도교가 존재하지

않았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인간이 살아가

는 올바른 길을 가르쳤던 대표적인 정당한 종교는 유교였습니다. 물

론 당시에도 신의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속적인 신앙

도 있었고 그들 나름대로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의 개념은

아니지만 ’천지신명’이라고 해서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뭏든 당시에 근간을 이루었던 종교는 바로 유교였습니

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도덕과 윤리가 있었고 올바른 사람의 도

리가 있었으며, 그 도리를 따라 일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갔던 사

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것인가? 구원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하느님을 믿지않았

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인가?

 

라너는 복음이 한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에로 도달하기 이전까지는

이 사람은 ’하느님의 뜻과 허용에 따라서’ 자기가 생활하는 사회에

서 지배적인 세력을 지닌 종교안에서 구원이 제공된다고 보고 있습

니다. 결국 비록 당시에 하느님의 복음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더

라도 당시에 지배적인 세력을 지닌 종교(유교 )안에서 구원이 제공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종교의 이상과 소속된 사람들의 심성은 선하고 올바른 삶을 지

향하고 있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매

순간 보다 나은 삶 즉 초월을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것이므로 그들

은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매순간 끝없이 대상으

로 삼고 살아가는 그 존재 즉 초월자는 바로 하느님이시고 그분은

태초이래 유일한 초월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라너는 무신론 속에서도 익명의 그리스도교를 보고 있습니다.

이 무신론은 어떤 이론이나 교의가 아닙니다. 단지 자신을 무신론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부터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는 구체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여기서 무신론자란 하느님의 존재를 배제하고 그

리스도를 인류의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들의 그러한

태도와 원인, 동기는 다양합니다. 라너는 이러한 유형을 네가지로

보는데 그중에서 양심을 따르는 결단 속에서 신적인 체험들을 자유

롭게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올바로 해석되지 않고 불확실한 처지에

서 사는 사람들에게 무죄한 무신론을 보며,신적인 체험이 잘못 해

석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결단 속에서 양심을 거스르면서 거절하는

사람들은 구원이 배제되는 탓이있는 有罪한 무신론이 된다고 규정

합니다. 이 내용을 예를 들어가며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공자,맹자 시대 이후에는 신개념보다는

도덕과 윤리가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근대에 들어서면

서 공산주의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 에서는 신의 존재를 인

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의 예와같은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을 신개념이 올바로 해석되지 않고 불확실한 처지에

서 사는 사람들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은 하느님의 존재도 모르

기 때문에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무죄한

무신론자들 이며 이 무신론을 ’익명의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유죄한 무신론은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을 향한 심성을 갖

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유죄한 무신론이

란, 바로 ’스스로 이런 양심을 거스르면서 하느님 존재를 거절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들은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 무신론자가 자기 자신을 적극적

으로 받아들이느냐 않느냐의 여부입니다. 그가 설령 명시적으로 알

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참으로 무조건적인 신의, 절대적 진실성,

타인의 복지를 위한 몰아적 헌신과 이와 비슷한 인간의 기본행동을

알고 있다면, 그는 하느님께  관하여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무신론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지칭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라너의 이러한 이론은 여러가지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비

그리스도인의 구원가능성을 가르치는 교회의 입장과 부합하고, 성

서와 교리전통에 상응한 학설이라고 일단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

면 이제는 교회의 공식적 입장이라 할 수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

회의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먼저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2항 에서는 여러 종교를 언급하면

서 이러한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것을 아무것도 배척하

지 않음과, 그네들의 가르침이 가톨릭의 그것과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는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의헌장 16항에서는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

로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며 동시에 의식적으로 하느님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종교문제

를 회피하여 양심의 명령을 거스릴 때에는 탓을 면할 길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공의회는 여러 가르침을 통하여 타종교인들에 대한 구원

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 뿐만

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고, 성령께서는 하느님 께서만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신비에 참여할 가능성을 주

셨음을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탓이 없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당신만이 아시는 길로’신앙에로 이끄실 수 있음을 믿어

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

은 구원의 문제는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즉 구

원은 하느님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고

없고를 결정하여 말할 수는 없으며 그 누구도, 하느님 외에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양심

에 입각하여 정말 성실하고 부끄러움 없이 모범적으로 산 사람들에

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교의를 말씀드린다면 "가톨릭 이외의 사람들도 구원받는다"가 아니

고 "가톨릭 이외의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5. 제기될 수 있는 의문점들

 

자, 이제 비 그리스도인의 구원문제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가 되셨

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즈음에서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고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의 측면에서 볼때,  비

록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자신이 정말 부끄러움이 없이 올바로 살

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구원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다

면 구태여 그가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그냥 그대로

옳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는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구태여 다른 사

람들에게 전교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

다.

 

어떻습니까? 이제 이 문제가 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 제 예상이

맞았군요. 그렇다면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지요? 그러면

이 문제를 쉬운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 된다면 구태여 성당에 다닐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인간은 누구나 능력의 차이를 갖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학원

을 몇군데 다니며 기를쓰며 공부해도 3류 대학에 밖에 갈 수가  없

는데, 반면 어떤 사람은 자기할 것 다  하면서 공부하는데 늘 수석

을 하고 일류대학에 진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통 인간은 자

신의 노력에 따라 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더우기 타인

의 올바른 도움을 받는다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음도 사실입

니다.

 

 간단한 예로 운전면허를 생각해 봅시다. 여기  계신 분 중에서 운

전면허를 갖고 계신분이 분명 있을텐데, 보통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이  자동차학원 입니다. 그곳

에서 운전도 배우고  간단한 정비지식도 배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돈을 들여가며 학원에가서 그것을 배웁니까? 돈도 아까운데  책

을 구입하여 스스로 배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먼저 학원으로 달려갑니다. 그것은 단시일내에 가장 정확하

게 배우고 신속하게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서 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자신  혼자 올바르게 살아

가려고 노력하는것은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살아가면서

잘못된 것이나 혹은 올바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도

를 받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혼자 노

력하는것 보다 훨씬 쉽지 않겠습니가? 바로 그러한 길을  제시해주

는 곳이 교회이며, 잘  살려고하는 의지를 굳게  해주어 보다 쉽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협력자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운전

연습을 혼자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쉽듯이 교회를

통하여 지켜나갈 도리를 배우고 자신의 노력만이 아닌 하느님의 도

우심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면 훨씬 쉽지 않겠습니까?  

 

2) 그렇다면 신앙을 갖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되는가?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즉 학원

에 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는 없는것입니다.

학원에 등록만 해놓고 게으름을 피우며 잘 다니지도 않고 공부하고

연습하는것을 소홀히 한다면 그런 사람은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어

렵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의 이 의견에 동의하시지요? 예. 그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물어보건 부인할 수  없는 기정사실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무조건

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일반 사회에서도 그러하듯이 신자가 되면 권리도 생기지만 나름대

로 의무사항이 생깁니다. 물론 그것이 교회법과 계명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강요의 의미를 지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자 개

개인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올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는  안내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것들을

잘 지키며 올바로 살아가야만 구원에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학원에 열심히 다녀야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것처럼.... 이

해 잘 되시지요?

 

3) 비그리스도교인도 구원될 수 있다면 구태여 전교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하느님은 어떤 사람들이 구원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드렸지요? 예.

아주 잘 기억하고 계시군요. 선한 사람들만이나 아니면 죄인들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이들이  구원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구원의 길을 다른이들에게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고여있는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항상 신선함

을 유지할 수 있듯이 하느님의 복음말씀도 한곳에 머물러 있게되면

그것은 하느님의 원의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죽은 말씀이 되

고 맙니다. 나 자신만이 구원되는것 보다는  모든사람들이 복된 말

씀을 듣고 함께 구원되어 하느님 나라를 하루속히 앞당긴다면 그것

보다 바람직한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위에서 말씀드린 것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

니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것이 더 유익

하고 또 그 길을 모든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우리는 주님의 가르

침대로 전교에 힘쓰는 것입니다.    

 

4) 만일 타 종파에서도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도입하여 익명의

불교 혹은 유교인 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결국 종교는 하

나라고 말할수 있거나 아니면 종교가 필요없다고 볼수도 있지 않는

가?

 

예.좋은 질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중요한 사실들을 다시한번 인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머리 속

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비그리스도

인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가 가장 정당한 종교라는 사실 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는 자연

종교이지만 그리스도교는 계시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전제로

다음의 예를 잘 들으시면 이 문제는 어느정도 쉽게 이해가 갈수 있

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초월자이신 하느님께 도달하는 최후의 목적지를 부산이라고 가정하

고 그 출발점을 서울이라고 해 봅시다.

 

그 사이에는 많은 길이 있는데 그중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도착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바로 고속도로 입니다.

이 고속도로를 하느님께서 인간들이 당신에게 도달하도록 직접  만

들어 놓으신 계시종교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편  국도는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자연종교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부산으로 갈때 (평상시 길이 막힌다거나  특별한 경우가 아닌경우)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이용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고속도로

입니다. 그러나 지방도로나 국도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부산에 도착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속

도로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다소 늦고 불편함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것을 정리해서 말씀드린 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시를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유일한 계시종교 이기에 하느님께

도달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하느

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고 반면에 그 길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길을 이용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완전함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이 완전함의 차원은 종교마다 다릅니다.그러나 그

것은 결국 올바른 삶을 향하고 있기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렇게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타종교인)

도 구원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즉 계시

종교이기 때문에 가장 정당한 종교가 되는 그리스도교 내에 구원이

있지만(고속도로를 통한 부산도착) 타종교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맞

는 것들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그것에 충실한 사람들에게도 (국도나

지방도로를 통한 부산도착)구원이 배제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한번 확실하게 강조하지만 구원의 결정

은 인간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결정한다는 것입니

다. 즉 그것은 인간의 영역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영역이라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비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을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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