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회, 새 이스라엘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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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7-02-13 | 조회수3,237 | 추천수0 | 신고 |
[성경과 가톨릭교회 교리서] 교회, 새 이스라엘 “교회가 뭔가요?” 이렇게 질문하면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다니는 곳’ 등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와 연관 지어 대답합니다. 하지만 성당 건물, 교회 건물 같은 건축물을 두고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라는 말의 한 부분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ecclesia)’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말 ‘?κ(엑 : ?로부터, 밖으로) - καλε?ν(칼레인 : 부르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불러 모음’을 뜻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백성의 집회를, 구약에서는 하느님 앞에 모인 선택된 백성들의 집회를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말은 장소보다는 ‘모임’과 그 ‘구성원’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敎會)’라는 우리말 번역도 ‘가르침(敎)에 따른 모임(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부름 받아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이 교회에 대하여 「가톨릭교회 교리서」(이하 ‘교리서’)가 가르치는 것과 교리서가 인용하는 성경구절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에 대한 교리서의 가르침 ‘교회’에 대해 교리서는 인류의 빛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이시며, 교회는 - 교부들이 즐겨 사용한 비유처럼 - 이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달과 같다고 규정합니다. 교회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748-750항). 이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진 시나이 산의 집회를 계승한 모임으로서(751-752항), 양 우리, 하느님의 밭, 하느님의 건물, 하늘의 예루살렘, 어린양의 신부 등의 상징들로 이해되었습니다(753-757항). 교회는 성부의 심오한 계획 안에서 성자 그리스도께서 세우셨으며, 성령을 통하여 나타나 영광 중에 완성될 ‘불러 모음’입니다. 교회는 ‘만물의 목적’이라고 불릴 만큼 창조 때부터 준비된 것이며, 특히 아브라함을 부르고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선택하심으로써 그 준비가 구체화됩니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 떼를 모으시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사도들을 뽑으심으로써, 무엇보다 십자가를 통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심으로써 교회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성령께서 이 교회를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시도록 파견됨으로써 교회가 그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758-769항). 역사 안에 있으나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는 가시적이면서도 영적 실재인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의 신비이며, 보이지 않는 은총을 간직하고 나누기에 구원의 보편적 성사입니다(770-780항).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이라는 그리스도의 직분에 참여합니다(781-786항).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자 신부로서 그분과 깊은 일치를 이루며, 지체의 다양성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향한 당신의 통치권을 펼치시도록 봉사합니다(787-796항). 또한 교회는 성령의 성전으로서 숨은 원리인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해 참으로 유익한 모든 활동과 직무를 수행하고 은사를 꽃피워 갑니다(797-810항). ‘교회’에 대한 교리의 근거가 되는 주요 말씀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이해한 바를 교리로 체계화시키는 이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확립해 갑니다. ‘교회’에 대해 교리서가 인용한 성경구절 가운데 일부를 정리해 봅니다(왼쪽 표 참조). 이러한 ‘교회에 대한 교회의 이해’는 한 사람이 성찰한 결과물이 아닙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이자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의 이해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 아래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함께’ 이를 선포합니다. 열두 성문과 열두 초석 교회와 관련된 이러한 주제들 중 ‘교회, 새 이스라엘’이라는 주제는 묵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를 통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있었습니다. …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있었습니다” (묵시 21,12.14). 이 구절에 나오는 ‘도성’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서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로 등장합니다(묵시 21,9-10). 곧, 새 예루살렘은 태초부터 계획되고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의 때에 등장하여 영광 중에 완성될 교회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의 성문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있고, 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이 점은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과 열두 사도를 기초로 하는 어린양의 신부 교회가 어떠한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교회는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집회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우리는 교리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말은] 그리스 말 구약성경에서 하느님 앞에 모인 선택된 백성들의 집회, 특히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율법을 받아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진 시나이 산의 집회에 자주 사용된 용어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초기 공동체는 스스로를 ‘교회(Ecclesia)’라고 부름으로써 자신들이 그 집회의 계승자임을 자처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극변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백성을 교회로 ‘불러 모으신다’”(교리서, 751항).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보는 관점은 교회헌장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막을 헤매던 혈족 이스라엘이 이미 하느님의 교회라고 불렸던 것처럼, 현세를 거닐며 미래의 영원한 나라를 찾고 있는 새 이스라엘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린다”(9항). 교회, 새 이스라엘 교회는 단순한 장소나 단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부름 받아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는 바로 새 이스라엘입니다. 새 이스라엘이란 구원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고유한 위치를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더 큰 공동체, 곧 이방인들인 우리들까지도 초대된 보편적인 공동체를 뜻합니다. 교회가 새 이스라엘이기에,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은, 모세와 이집트 탈출 사건은, 약속의 땅을 쟁취하고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짐은, 예언자들의 호소는, 그리고 바빌론 유배와 유배로부터 돌아오는 사건은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에 적힌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생각할 때, 이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모임으로는 여기지만, 새 이스라엘이라는 성서적 전망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진정 구약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모임이기에 모든 구약과 신약을 끌어안고 있고, 태초부터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계획하신 공동체이기에 만물과 모든 시간을 품고 있는 ‘새 이스라엘’입니다. * 고성균 세례자 요한 - 도미니코수도회 수사. 단순하고 즐겁게 형제들과 어울려 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의 사명에 작은 도움이 되고자 노력한다. 현재 한국 도미니칸 평신도회 영적 보조자 소임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5월호, 고성균 세례자 요한 수사] [사도신경 해설 43]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1) 교회에 대한 믿음 신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 다음에 즉시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성삼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교회에 대해서도 “저는 믿나이다.”라 고백한다. 교회도 믿음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교회를 하느님처럼 믿을 수는 없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다. 교회는 전지전능하지도 영원하지도 무한하지도 않다. 교회가 믿음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는 차원에 있어서 다르다. 신앙 고백문에서도 교회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 하느님과 그 외아드님과 성령에 대한 믿음의 고백과 서로 다르다. 그 구별을 표현하자면, 교회‘를 믿는다.’와 하느님‘께로 믿는다.’로 구분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은 성령에 대한 고백에 포함된 것이다. 신경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세례 예식 중에 영세 지망자는 “당신은 성령을 거룩한 교회 안에서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스도교인이 믿는 대상은 하느님이고 성령이며, 또 교회는 성령이 활동하시는 장소라는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교회에 대한 신앙 고백은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가 되게 하시는 ‘성령을 저는 믿나이다.’라는 내용이다.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들에는 서열이 있다.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믿음의 진리가 있는가 하면, 이 진리로부터 연유되는 부수적이지만 반드시 믿어야 할 진리가 있다. 하느님에 관한 진리가 본질적인 것이라면 교회에 대한 진리는 부수적이고 연역적인 진리이다. 부수적이라 해서 믿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목적 자체’로 하느님을 믿는 것과 ‘하느님을 근거로 해서’ 교회를 믿는 것처럼 구분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을 때 ‘목적 자체로’ 믿지만, 교회를 믿는다고 할 때는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근거로 하여’ 교회를 믿는 것이다. 교회에 이어져 나오는 믿음의 대상들 ‘성인들의 통공’, ‘죄의 용서’, ‘육신의 부활’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믿음의 대상인 것은 하느님이 구원을 위하여 세우신 신앙 공동체 곧 구원의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느님 구원사업의 결실로 세상에 태어났고 구원의 기관으로 구원을 위하여 봉사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느님이 세상 한가운데 역사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결실이기 때문에 믿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들을 ‘불러 모으신’ 신앙 공동체이기에 우리가 믿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구원의 공동체로서, 믿음의 대상이므로 교회에 능동적으로 소속되어야 한다. 교회가 믿음의 대상이므로 교회는 건물이나 단체처럼 ‘어떤 것’이 아니라 생명체나 인격체와 같은 것이다. 교회에 대해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교회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교회는 단순히 신도들이 모여 이루는 집단이나, 그 안에 모여 함께 찬양과 기도를 바치는 성당 건물이나, 가시적인 조직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된 인간 존재에 비유될 수 있다. 가시적 부분들(성당, 신도, 예식, 제도, 규범)과 보이지 않는 부분들(은총, 말씀, 생명, 사랑, 친교)로 구성되어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께서 가시적인 인성과 불가시적인 신성 두 가지 본성을 지니신 것과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선택 그리고 하느님과의 친교 및 신도들 간의 통교이다. 이런 불가시적이고 본질적 요소들로 인해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믿음의 대상이 된다. 예수님이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그 어머니와 친지들이 찾아왔다. 도착 전갈을 듣고 그분은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다.”(마르 3,35)고 선언하셨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또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 혈연 공동체’다. [2009년 3월 15일 사순 제3주일 가톨릭마산 9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44]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2) 교회의 설립 “누가 언제 교회를 세웠느냐?”는 질문에 대해 쉽사리 “예수님이 생전에 교회를 설립하셨다”고 간단히 대답한다. 그 근거로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에게 새 이름을 주고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시는 성경 대목(마태 16,13-20)을 내세운다. 생전의 예수님이 교회를 설립하셨다는 이 대답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성자 그리스도에 국한하여 응답한 대답이라 정확히 맞는 답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 승천 후 제자들이 뜻을 모아 사명수행의 편의상 한 순간에 창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긴 역사 안에서 준비되어 왔으며, 마침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작품만은 아니다. 그분의 삶 및 사명수행과 더불어 출현한 것도 아니다. 전 구원 역사에 걸쳐 계획, 준비되고 창립되었고 또 완성을 향해 성장 발전하고 있다. 계획부터 완성까지 다섯 단계를 거쳐 설립되고 성장한다. 그 단계들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첫째, 교회는 세계 창조의 계획 때 이미 하느님의 마음속에 있었다. 하느님은 창조 때부터 모든 피조물이 가족처럼 당신을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바라셨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노아의 가족들의 구원 등은 가족을 구성하여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염원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세상 안에 죄가 들어와 하느님의 대 가족을 분열시키고 파괴하였으므로 하느님은 한 개인과 한 민족을 뽑으셨다. 둘째,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부르고 뽑으셔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점차 나타내시고 약속과 그 성취를 통해 그 계획을 구체화하셨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구출하시고 약속의 땅을 향해 인도하시면서 그 도중에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이집트 탈출과 옛 계약의 체결이 교회창립의 기초준비였다. 셋째, 하느님의 약속대로 아드님이 세상에 와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고 복음 선포를 하시면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주변에 모으셨다. “나를 따라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이들을 가까이 두시면서 무리를 형성하셨다. 열두 제자들을 주축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작은 무리’를 이루시고(루카 12,32) 또 이 공동체에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셨다. 생전의 예수님은 이 ‘메시아 공동체’를 위해 일정 조직과 질서의 규범 뼈대를 만드셨다. 제자들을 훈련시켜 선교현장에 파견하기도 하셨으나 아직은 ‘선교 공동체’가 되지 못했다. 성령께서 강림하셔야 했다. 넷째, 성령강림은 교회가 태어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면서 세상을 떠난 예수님의 ‘빈자리’를 메우러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사도로 변모시키자 비로소 교회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났다. 성령과 더불어 태어난 교회가 세상 안으로 들어가 선교활동을 펼침으로써 교회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도구로서 역사 안에서 성장을 개시하였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하느님 나라를 위해 교회는 수고하며 성장해 나가고 있다. 다섯째, 종말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 교회도 완성된다. 그 나라의 표징 및 도구인 교회는 완성된 하느님 나라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그날을 향해 교회는 순례자로 성부의 말씀과 성자의 성체와 성령의 은사로부터 활력을 얻으며 전진한다. 교회는 성부께서 계획하고 준비하셨으며, 성자께서 그 기초를 놓으셨고 성령께서 탄생시켰으므로 성삼위의 공동작품이다. [2009년 3월 22일 사순 제4주일 가톨릭마산 9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45]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3) 교회의 본질 ‘교회’란 말은 ‘하느님이 불러 모으신 집회’라는 뜻이다. 이 교회의 본질은 그것을 설립한 분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성부에 의해 계획, 준비되어온 것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이고, 성자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에 의해 태어난 것으로서 ‘성령의 성전’이다. 교회는 창조 때 하느님의 마음속에 품어져 있었고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점차로 준비되어 왔으므로 성부의 작품 곧 하느님의 백성이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던 도중에 시나이 계약을 체결하고 율법을 선사하셨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느님께서 인류와 새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태어난 선택된 민족, 왕다운 사제, 거룩한 백성이다. 이 백성의 구성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으며, 성령에 의해 거룩해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교회 안의 모든 이가 동등하다. 교회는 계약 체결로써 하느님과 생명 관계를 맺고, 하느님께 속한 백성이므로 하느님의 모든 선물을 얻어 누리는 상속자가 되고 또 하느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다. 한편 계약의 선물인 율법과 복음의 법을 지킴으로써 계약의 준수에 충성을 다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말씀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 안에서 말씀과 행동, 곧 생애 동안 구원사업을 펼치는 중에 차츰 체계화되었고, 파스카 사건을 거쳐 형성되었으므로 성자의 작품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의, 또한 공동체와의 관계를 ‘일치’ 또는 ‘한 몸’으로 표현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나는 착한 목자이며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0,14)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듯 제자들과도 하나라고 단언하셨다. 교회는 십자가 위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인해 태어났다(요한 19,34). 하느님이 잠든 아담의 옆구리 갈빗대로 그의 짝 하와를 태어나게 하셨듯이 십자가 위에서 죽음의 잠을 자던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교회를 만드셨다. 흘러나온 피와 물은 교회의 두 가지 기둥인 성체와 세례를 상징한다. 교회는 세례에 의해 시작되고 성체에 의해 양육되고 성장하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다.”(에페 1,23)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 홀로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의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온다. 주님의 만찬은 교회와 그 여러 가지 예배의 중심이다. 교회는 온전히 주님과 함께 있으며, 온전히 주님 것이다. 교회는 함께 모여 식사함으로써 친교에 이르며, 또 이 친교로 세상 안에서 봉사할 힘을 얻는다. 교회는 감사하며, 기념하는 ‘성찬 공동체’다. 교회는 성령강림으로써 마침내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냈으므로 성령의 작품 곧 ‘성령의 성전’이다. “여러분이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모릅니까?”(1코린 3,16) 성령은 신앙인들 안에 계셔 그들을 하느님께로 들어 높히고 거룩하게 한다. 성령으로 인해 거룩해진 신도들 안에 그분이 계시므로 교회는 성령의 거룩한 거처다. 성령은 여러 면에서 교회의 존립 기초, 생명 원리, 활동 능력이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 생활하며 유지되고 인도된다. 교회의 모든 원천과 존재, 유지가 성령 덕택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이지만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으며 각 고유 역할이 있듯이, 성령은 각 신도에게 고유한 역할과 은사를 부여하면서 다양한 그들을 하나 되게 하신다. 성령께서 신도들 각자에게 봉사에 필요한 은사들을 주시므로 교회는 은사로써 섬기는 ‘은사의 공동체’이다. [2009년 3월 29일 사순 제5주일 가톨릭마산 9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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