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성경] 밤 어둠의 시간. 밤. 칠흑색 유성 페인트로 거칠고 어지럽게 사방을 전부 덧대어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한처음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시간. 낮의 하찮은 것들이 저마다 자기 색과 빛을 내고 있다고 애써 목소리를 높이는 시간. 그 덕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소리가 비교적 또렷해져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되는 시간. 온천지가 훤해 시원스레 볼 수 있는 낮이 아니라, 눈앞이 컴컴해 허둥대며 허우적거리기 바쁜 밤에서야 ‘볼 수 있다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아이러니한 시간. 밤이다. 매일의 삶에서 밤은 중요하다. 일터에서의 미팅, 수많은 대화와 쏟아지는 작업, 하얀 와이셔츠 칼라에 때와 땀자국이 선명해지고 뭉툭한 작업화는 흙먼지로 층층이 뒤덮이는, 공공연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낮의 수많은 일들과 거리를 두고, 이제 고요함과 편안함을 말하는 것들에 몸을 묻고 잠을 청하는 개인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다음 날 건강한 활동을 위해서라면 일정 시간의 안정적인 잠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밤은 때때로 고상하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낮 동안 일어났던 정의롭지 않은 사건들이 밤의 굽이굽이마다 잠복해 있다가 모기처럼 잠을 불편하게 만든다. 잘 수도 잡을 수도 없다. 어떤 밤에는 희망과 절망, 이성과 감정 사이의 저울질 놀이에 지쳐 선잠이 들기도 하고, 어떤 것을 잊기 위해 무엇인가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런 밤의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내적인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재발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침묵과 들음으로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사색가뿐만 아니라 쇼핑과 집안일, 주방일과 다림질로 시간을 다 보내는 듯 보이는 주부 역시 내적인 영역이 있다. 똑같은 일이나 말을 반복하는 노동자나 주말에 클럽에 가야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청년, 공원에 손자들을 데리고 와서 놀아주거나 노인정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노인 역시 내적인 영역이 있다. 세상 모든 이가 빠짐없이 내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세상 모든 이가 빠짐없이 그 내적인 영역에서 갈등을 겪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저마다 필요와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 필요와 한계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항상 채워 넣어야만 하는 빈 상태로 느끼기에 이를 채우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성경은 수많은 밤을 묘사한다.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그 순간과 장소에 하느님은 말씀을 통하여 어둠에서 빛이 나오게 하시고 물에서 땅이 나오게 하셨다. 모든 밤들에 기원을 제공한 하나의 밤, 곧 ‘창조의 밤’이다(창세 1장 참조). ‘약속의 밤’도 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천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셀 수 없이 많은 별로 수 놓인 밤에 별들의 수를 세어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장수와 후손, 땅의 약속으로 초대하신다(창세기 15장 참조).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밤, 하느님의 천사는 이스라엘의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린다. 이 밤은 절규의 소리가 들리는 밤이기도 하고 자유를 향해 허겁지겁 출발하는 밤이기도 하다. 모든 밤들 중에 가장 긴 해방의 밤이다(탈출기 12장 참조). 인간 역사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밤도 있다. 어두운 밤 속에서 목동들과 마리아와 요셉은 그윽한 눈으로 구유에 누워있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밤. 우리를 그분과 같아지게 하시려는 구원과 사랑의 밤이다(루카 2,8-20 참조). 성경은 밤에 단지 어두움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창조와 약속, 해방과 구원 역시 이 밤에 일어났음을 말한다. 필요와 한계의 긴장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밤에 늘 하느님께서 개입하신다. 곧 필요와 한계의 경계선을 뛰어넘도록 하느님은 우리를 그 칠흑 같은 밤에 초대하신다. [2022년 11월 6일(다해)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노송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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