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와 자동파문,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총상태의 회복'과 '치유'에 관련한 내용이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낙태후 치유 사목'을 해오신 '존 딜런' 신부님께서 쓰신 "희망으로 가는 길"(가톨릭 출판사 발행)에서 발췌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서울대교구 가정사목부에서는 낙태후 치유 프로그램인 "희망으로 가는 길"이 진행중입니다. ♤ 일 시 : 매월 세번째주 화요일 오후2시 ♤ 장 소 : 가톨릭회관 3층 강당 ♤ 문 의 : 727-2069 ~71
은총의 도구 역사적으로, 가톨릭 공동체는 신앙의 3 가지 기본적 통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총'을 끊임없이 만나 뵈었다. 그것은 '성서'와 '성사'와 '교회'이다. 낙태아의 부모를 위한 화해와 온전함의 가장 가치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신앙생활의 그러한 차원들에서이다. 하느님 말씀을 통해 드러난 구원역사에 대한 묵상과 기도는 낙태체험 부모를 위한 매우 중요한 치유 방법이 될 수 있다. 성서를 통하여, 그들은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치유하시고 용서하시는 주님, 용서하시고자 먼저 말을 건네시는 주님,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 내놓으시는 구원자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성서를 읽음으로써 그들은 여러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통탄할만한 잘못과 죄에 매어 있었으나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낙태 체험자들은 시편과 같은 성서 말씀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이 많이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힘과 내적 통찰과 위로의 근원이 된다. 사목자는 이냐시오 성찰과 기도 방법이 유용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즉, 성서의 특정 장면을 영상화시키고 하느님을 만나뵙는 이러한 성서의 순간들 안으로 자신을 데려다 놓는 것이다. 결국, 만일 그들이 성서의 다양한 인물들을 자신과 평행선상에 놓고 묵상한다면, 성서는 강력한 치유 방법이 될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베드로, 바오로, 라헬, 성모 마리아 등 성서의 인물들의 삶과 그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묵상하는 것은 낙태 체험자들이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요약하면, 각 상담 시간동안 낙태된 아기와 함께 하는 기도는 가치있을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사항이다. 어떠한 종류의 기도도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낙태라는 십자가를 하느님 자비와 용서에 대한 보다 넓은 믿음과 희망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초대한다. 나는 각 상담 시작과 끝에서 기도할 것을 권고한다. 만일 부모가 기도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다면, 사목자는 그들 대신 기도해 주어야 한다. 기도에는 상담 시간동안 나누었던 내용들이 포함된다. 여기서 사목자는 그들과 하느님과의 관계와 그들의 기도 스타일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상담 시간동안, 일부 사목자들은 자신이 상담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 기도한다. 그들과 함께 하는 기도는 이중효과를 낼 수 있다. 즉, 그것은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용기를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기도의 모델로도 작용한다. 하느님 현존을 자신의 삶 속에서 인식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카운셀러는 그와 비슷한 인식을 피상담자에게 불어 넣어 줄 수 있다. 만일 카운셀러가 하느님 현존에 대한 열려있는 믿음을 고백한다면, 피상담자는 그러한 믿음에 영향받아 그와 비슷한 믿음을 발달시켜 나가기 쉬워진다. 사목 카운셀러로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당신은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단지 심리학적 기술이나 테크닉으로 잘 훈련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Richard P. Vaughan, S.J., Basic Skills for Christian Counselors (New York: Paulist Press, 1987), pp.39f.) 가톨릭 교회에서 성사는 공동체가 하느님 은총을 만날 수 있는 최우선적 수단이 되어왔다. 따라서 성사는 낙태체험 가톨릭 신자 부모를 위한 치유 과정의 필수 부분이다. 참회의 성사는 치유과정 밖의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치유와 용서의 전체 여정을 기념하는데 있어 빠져서는 안될 부분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신비 모두 안에서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되고 기뻐하는 여정을 총괄하는 특별한 은총의 순간이다. 성사는 어느 때 기념하는 것이 적절한가? 낙태 체험 부모가 갖고 있는 하느님 이미지가 긍정적일 때 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사제나 사목자는 그들을 성사로 초대하기에 앞서 그들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그들이 하느님을 ‘심하게 다그치는 아버지’, 또는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보고 있다면, 그들은 충만한 의미의 성사를 기념할 준비가 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제나 사목자는 그들이 용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아울러, 성사 기념이 가장 결실 풍부한 것이 되려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가 필수적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말씀을 건네실까요?”라는 질문은 그들이 하느님과의 관계와 치유과정에서 자신이 어떠한 위치까지 와있는지를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돕는다. 어떤 이들은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고자 하는 열망이 즉시 일어난다. 이러한 낙태체험 부모들은 자신의 상처가 너무도 목을 조이고 있기 때문에, 성사 기념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재충전’되기 전까지는 치유 과정을 진행시킬 수 있는 내적 에너지를 갖고 있지 못헀던 것이다. 이러한 경우, 사제는 성사를 기념해야 하지만, 동시에 치유여정을 계속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성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분명히 해야 한다. 또한 처음의 평화스러운 느낌과 안정감이 없어졌을 때 또다시 부정 메카니즘에 빠지기 쉬운, 치유과정 초기 단계에서는 성사를 기념함으로써 올 수 있는 ‘영적 고조(高潮)’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사제는 치유 과정을 계속 진행하도록, 그리고 그들이 처음 성사를 기념하면서 가졌던 믿음과 신뢰의 정신 안에서 자신의 곤혹스러운 감정과 기억들을 정직하게 대면하도록 그들을 독려해야 한다. 참회의 성사를 기념하면서, 특히 당신이 처음으로 낙태체험 부모를 만나고 있을 때, 나는 성사기념에 도움이 될만한 다음 ‘사항들’을 준수하도록 제의하고자 한다 : * 성사에 참여하여 자신의 낙태체험을 당신과 나눌 수 있는 그들의 용기를 인정한다. * 온유의 정신 안에서, 그러나 진실 속에서, 낙태 죄를, 그리고 그러한 죄가 우리 모두에게 미친 악영향을 인정한다. *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서 명백히 드러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인정한다. * 상처 치유에는 시간이 요구됨을 인정하고, 그들이 당신과 만날 수 있도록 초대함으로써, 그들의 치유 여정이 계속 진행될 수 있도록 한다. * 적절한 보속과 사죄경을 준다. (나는 무엇이 ‘적절한 보속’인가에 대한 답변을 고해 신부의 사목적 민감성과 전문성에 위탁하고자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보속에는 기도와 아울러 구체적인 실천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후자에 속하는 예에는, 생명을 살리고 나누는 일에 경제적 도움을 제공한다든지, 어떠한 그룹을 위한 봉사에 시간을 할애하여 자원봉사하는 등이다. 그러한 보속 실천에는 분명한 목표와 목적이 있으며, 그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낙태체험 부모들은 보속 실천을 낙태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하게 되어 그것은 하느님과 흥정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며 오히려 치유과정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흥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부모는 치유와 화해를 요하는 자신의 삶의 보다 깊은 차원들을 소홀히 하게 된다. 고해신부는 보속행위가 단순히 온전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의 일부분임을, 그리고 용서는 하나의 과정이고 후에 고해성사 밖의 자리에서 사제와 낙태체험자가 대화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고백자는 죄로서의 낙태의 교회적 의미와 교회법 조항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낙태와 파문(破門)의 연관성에 대해 많은 이들이 혼동하고 있다. 1983년 교회법전에 의하면, 낙태에 연루한 사람들은 자동파문에 처해진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고해신부는 자동파문이 어떤 사람에게 적용되는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하며, 낙태가 시행된 상황들에 달려 있다. 파문 조치가 효력을 발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당사자가 교회법에 명기되어 있는 다음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어야 한다. (1) 낙태는 대죄일 뿐만 아니라 범죄 행위이다. (2) 이러한 범죄는 파문조치를 가져온다. 둘째, 당사자는 자유로이, 악의(惡意)로써 낙태를 했고, 아무런 내외적 강압없이 그러한 결정을 내리고 행동했어야 한다. 교회법은 낙태를 했어도 다음 사람들은 파문되지 않는다고 공시한다 : 1. 이성(理性)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사람, 2. 만취상태나 정신질환으로 인해 이성이 결여된 사람, 3. 당시 상황에 매우 위압되어 명료한 사고(思考)가 불가능했던 사람, 4. 만 18세 이하자, 5. 그 강도(强度)가 상대적이었다 하더라도 중압적인 두려움으로 인해, 또는 심각한 불편이나 요구에 의해 강제 낙태 받은 사람. 따라서 심한 두려움으로 위압받은 사람은 낙태와 같이 내재적으로 악한 행위로써도 벌을 받지 않는다. 6. 중압적이고도 부정의하게 낙태실행을 독촉받은 사람, 7. 낙태가 그러한 파문 조치를 유발시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 요약한다면, 낙태로써 파문의 벌을 받는 경우는 위의 모든 무효 조항들의 내용을 검토하여, 해당하는 항목이 하나도 없는 경우에 국한된다. 낙태아의 부모에 대한 나의 사목 체험의 견지에서 보면, 그들이 실제로 파문의 요건에 해당하는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분별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이를 위하여 고백을 듣는 사제는 당사자가 낙태 받았을 때의 연령, 당시의 심리/감정 상태, 교회법과 그에 따른 조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 정도, 고의성과 자유로움의 정도, 그리고 교회법 원칙과 해석 원칙 등을 고려해야 한다. 만일 파문이 발생하는 경우라면, 당사자가 다시 충만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교회법에 의하면, 낙태 등으로 인한 자동 파문 해제는 해당 교구 주교에게 유보된다. (이러한 권한은 주교가 직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갖는 보통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주교가 자신의 권한을 교구 사제들에게 위임하는 것을 허용한다.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많은 교구들에서, 사제들은 고해성사 중에 파문 조치를 철회시킬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다. The Code of Canon Law. Michigan: William Eerdman Publishing Co., 1983. 특히 교회법 1398, 1355, 1324, 1323, 1325, 137항을 보시오.) 병자성사는 낙태 체험자 치유여정에서 매우 강력한 순간이 될 수 있다. (교회법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판정되는 사람, 성사로써 힘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다.” (Pastoral Care, 27 [n.53]). 낙태후 증후군(Post-Abortion Syndrome)을 외상후 스트레스(Post-Traumatic Stress)로 이해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만일 사목적 분별을 통하여 병자성사가 치유과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정되는 경우 사목자의 병자성사 기념은 적법한 듯하다.) 병자성사가 가져올 수 있는 감정/영적 치유는 성사 전례 텍스트 자체 안에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병자성사 ‘성유축성’ 기도는 다음과 같다 : “이 성유로 도유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복하시어 그들이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이 몸과 마음과 영혼이 회복되게 하소서.” (cf. The Rites, New York : Pueblo, p.602, #75) 신체/감정적 고통을 다루어 나갈 때, 이러한 성사 안에서의 주님 구원 은총의 기념은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평화와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례는 낙태체험 부모가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특별한 방식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적합한 장(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제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정신/신체적 건강이 심각하게 손상된 경우에만 그러한 성사를 줄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깊고도 만성적인 우울증, 자살 생각이나 기도(企圖), 자궁 손상 등이 그 예이다. 끝으로, 일단 당사자가 고해성사 안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했다면, 성체성사 기념과 배령은 온전함으로 가는 길을 걸어 나감에 있어 그들에게 힘과 끈기를 주는 ‘여정을 위한 신령한 양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남녀들은 자신의 죄의 어두움을 맞대면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에 있어 성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증언해 왔다. 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현존 인식은 자신의 낙태체험을 정면으로 바라보는데 있어 그들에게 하느님과 자신에 대한 신뢰심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성체배령이 낙태 체험자의 여정에서 계속적인 치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제나 사목자는, 일정 기간동안 성체를 모시지 않는 것이 낙태 체험자들이 아직까지 바라보지 못해 왔던 이슈들을 맞대면하는데 도움될 수 있는지 그들과 진실되이 이야기 나누어야 하는 경우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여기서 성체를 모시지 않는 것은 벌주는 조치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에서 관심과 치유를 요하는 부분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초대하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카운셀링과 더불어 성체는 온전함을 향한 여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인내를 주는 강력한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같은 식으로, 기도는 진정한 평화와 화해를 바라는 남녀들에게 절대적인 필수사항이다. 사목자는 낙태체험 부모와 만날 때마다 함께 기도하고 그들이 가장 편안한 방식으로 매일 기도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의식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기도는 ‘거룩한 신경 안정제’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즉,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생각들을 부정하고 그로부터 도피하는 또다른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어떠한 유형의 기도든 의탁과 정직의 정신 안에서 주님께 말씀드리고 그분 말씀에 귀기울이는 초대(招待)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신앙과 희망 안에서 분노, 후회, 슬픔과 같은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기도와 성사기념은 내재적으로 친교적 차원을 갖고 있다. 낙태 체험자들의 온전함을 향한 여정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한 개인으로서, 한 신앙 공동체로서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구체화시키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순례자’, 죄인들의 교회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죄인에게 화해의 도구가 되어 준다. 각 성사들을 기념하면서 교회는 일치와 평화의 정신 안에서 서로를 위하여 함께 기도한다. 낙태아의 부모는 자신이 신앙인들의 공동체로 새로이 받아들여졌음을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은 여전히 주님 안에서 우리 형제 자매들이며,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신앙으로 한 몸 되어 그 여정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그들을 따뜻이 맞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성사는 하느님 뿐만 아니라 교회와의 재일치를 이룰 수 있는 길이 된다. 화해와 치유를 위한 기본적인 방법론 남녀들이 우리 사목자들에게 다가와 낙태에 대한 자신의 후회와 슬픔을 나누고 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 나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에 응답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치유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나는 낙태 체험 부모들을 돕는데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라헬 프로젝트(Project Rachel)에 관여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 사용해온, 사목자를 위한 기본적인 방법론을 제안하고자 한다. 당신은 낙태된 아기에 대한 슬픔을 가슴 터놓고 슬퍼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있음을 기억하라. 그들은 해소되지 못한 슬픔과 상실감을 다루어 나가기 위해 방어 메카니즘들을 사용해 왔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아기를 파괴시키기로 한 자신의 결정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을 화해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그들의 아기는 단순히 수동적 의미에서 (예를 들어, 질병이나 사고)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아기는 살해되었고 이것이 그 부모들이 끌어 안고서 화해해야 하는 끔찍한 현실이다. 지난 수십년동안 우리는 엘리자베츠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가 정립한 ‘애도(哀悼)의 고전적 단계들’을 사용하여 우리 삶에서 중요한 누군가를 잃었을 때 우리 모두가 겪는 슬픔의 패턴들을 이해해 왔다. 낙태 체험자 카운셀링 영역에서도 많은 카운셀러들이 그와 동일한 차원의 애도과정을 관찰하고 있다. 그렇다면, 낙태아의 부모가 이러한 애도와 치유 단계들을 거쳐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목자의 임무가 될 것이다. 여기서 목표는, 그들이 애도 단계들을 거쳐 나가도록 외압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러한 과정을 거쳐갈 수 있도록 돕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목자는 이러한 애도 단계들이 반드시 ‘고정적’인 것은 아니며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한다면, 당신은 그들이 부정(否定) 단계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들임 단계에 도달할 거라고 미리 단정할 필요가 없다. 치유 여정의 어느 위치에 와 있는가에 따라 그들은 다양한 단계들 사이를 쉽게 옮겨 다닐 수 있다. 따라서, 사목자는 그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애도과정의 어떤 차원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려 하는지 식별하기 위해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부정은 낙태의 감정?영적 상처로부터 남?여성을 방호해 주는 방어 메카니즘이다. 애도의 첫 단계에서, (진실을)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려웠던 기억이나 느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특정 사건을 보다 잘 회상할수록, 부정은 점차 감소되고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해소될 수 있다. 그들이 처음으로 낙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에는, 그들이 그 사건을 이미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 단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 수 있다. 나는 낙태 사목자들에게, 낙태 체험자들과의 인간관계의 이러한 시작 포인트에서는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바라는 만큼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얼마나 신뢰를 갖고 의탁할 수 있는지 감을 잡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방어막을 어느 정도나 걷어낼지 결정하기 위해 당신의 태도를 포착해내려 할 것이다. 여기서, 민감성을 갖고 공감적으로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사목자로서의 당신의 임무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더욱 편안함을 느끼게 될 수록 낙태 사건을 보다 뚜렷이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는 비밀보장에 대한 신뢰를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낙태체험 부모는 외부로 누설될 위험없이 안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사목자는 낙태 체험이 그들의 삶에 정확히 어떠한 영향을 미쳐 왔는지 알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낙태후 증후군의 몇 가지 증상들을 살펴 보도록 제안할 수 있다. 이는 차후의 대화를 위한 시작으로서도 적절한 포인트가 될 수가 있다. 사목자는 낙태아의 부모가 낙태체험을 시간 구조 속에서 정리해 볼 수 있도록 초대해야 한다. 여기에서 대화는 기억할 수 있는 가능한 자세한 많은 객관적 사실 ― 낙태 전후, 그리고 낙태하는 동안 발생한 일들 ― 묘사에 집중될 수 있다. 예를 들어 : 낙태 전 : 자신의 임신 사실을 언제 알게 되었는가? 누구에게 처음 그 사실을 말하였는가? 남자는 임신 사실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의 첫 반응은 어떠했는가? 낙태를 결정하기로 한 것은 언제인가? 누가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가? 낙태하는 동안 : 낙태를 했던 장소는? 몇 시에 낙태를 했는가? 낙태 시설은 어떠했는가? 어떻게 해서 낙태 클리닉에 갔는가? 낙태가 끝난 후 어디로 갔는가? 낙태 후 : 낙태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낙태한 다음날 어떤 일들이 발생했는가? 낙태후 신체적으로 어떻게 느꼈는가? 달리 이야기한다면, 사목자는 자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한 많은 객관적 질문들을 해야 한다. 왜 그럴까? 이러한 객관적 질문들은 부정(否定)을 깨버리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낙태는 또다시 생생한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그리고, 낙태 체험자는 자신이 여러 해동안 잊으려고 발버둥쳐왔던 실제를 다시금 정리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충분히 상상되겠지만, 이는 낙태 체험자에게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여기서 사목자는 지극히 민감하고 인내로우며 보조적이 될 필요가 있다. 대체로, 당신은 얼마나 그들이 그 사건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실들을 기억하려 하거나 기억할 수 있는지 주목함으로써 그들의 부정의 깊이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것이다. 만일 사목자가 주의 깊게만 들어준다면, 그들이 낙태와 관련한 사건들에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었는지를 회상하면서 자신의 감정들을 표출하는 내용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제니퍼는 내게 이야기했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저는 너무도 많은 여성들을 보았고 [사실] 나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느낌]” 이러한 시점에서는, 낙태와 연관되어 그들이 체험하는 감정들을 접촉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치유자의 임무이다. 예를 들어 :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무엇을 느꼈는가? 낙태 결정을 확고히 내렸을 때 무엇을 느꼈는가? 낙태 전후일과 당일에 무엇을 느꼈는가?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그리고 수술 테이블 위에 누워서 무엇을 느꼈는가? 실제로 낙태에서 발생한 일이 그 악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했을 때 무엇을 느꼈는가?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화의 시간, 통찰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루시는 7년전의 자신의 낙태체험을 둘러싼 느낌들을 떠올리면서 갑자기 말을 꺼냈다. “신부님도 아시다시피, 정말 저는 그 아기를 낳고 싶었어요! 그건 다만 제게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어요. 마음 깊은 곳에서 저는 아기를 원하고 있었어요.” 이 시간에는 고통스러운 느낌들이 자주 표면으로 떠오르고 그들은 깊이 애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느낌들이 아무리 힘에 겹다 하더라도, 사목자는 그러한 느낌들로부터 그들을 건져내려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들이 오랜동안 느낄 수 없었던 느낌들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놓아 두라. 당신이 그들에게 주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애도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의 당신의 존재,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주겠다는 당신의 의지이다. 느낌과 감정들이 충분히 복원되고 확인되면서 그들은 애도 표현 과정의 다음 세 단계를 바라볼 수 있는 시점에 오게 된다. 자신의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은 죽은 아기의 인간성을 보다 자유로이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인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으며, 이 시기에 사목자는 깊은 감정이 표출되는 것을 자주 목격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분노(anger) 단계가 이 시기에 나타나며, 그들은 낙태의 결과 ― 아기의 죽음 ― 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낙태가 자행되었던 온갖 이유들을 무색케 만드는 심각한 결말로 이어진다. 분노는 다양한 방향들에 그 초점을 맞출 수 있다 : 자기자신, 하느님, 그 사건에 관여했던 사람들 등. 사목자는 그들이 그러한 분노가 어느 곳을 향해 있는지 확인하고 그것을 낙태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 시기에 용서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 또한 매우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그러한 분노로부터 그들을 꺼내오려 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신앙의 정신 안에서 그 과정을 정리해 나갈 수 있도록 가이드해야 함을 기억하라. 그들은 누구에 대해 화가 나 있는가? 그들은 왜 화가 나 있는가? 어떻게 그들의 분노를 경감시킬 수 있는가? 오랜 세월동안 억눌려 왔던 감정들을 체험하는 동안, 그들은 거래(bargaining)라 부르는 다음 애도 단계를 통하여 후회와 슬픔과 상실감을 경감시키려 하기 쉽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일을 현재의 어떠한 행동으로써 보상하려고 시도한다. 예를 들어, 낙태아를 ‘보상’하기 위해 또다른 아기를 갖는다든지, 죄책감과 슬픔을 보상하여 떨쳐 버리기 위해 ‘완벽한 부모’ 되기를 원한다든지, 자신의 슬픔과 후회의 감정들을 무마시키려고 생명수호 단체나 자원봉사 기관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사목자는 그들이 자신의 보상심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그들의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과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하지만, 과거에 일어난 그 일을 되돌리기 위해 정작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온유로써 도와주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아기는 하늘나라로 갔고 어떠한 행동으로써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아기가 이미 죽었고 어떠한 보상 행위로도 그 사실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가슴깊이 인정하면서 깊은 슬픔이 따라온다. 상실감과 공허감을 진하게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우울(depression) 단계를 인지할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은 낙태 사건을 깊은 상실로서 이해하게 된다 : 낙태는 그들로부터 아기를 빼앗아가 버렸다. 그들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우울증 경감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의 고통스런 감정들을 계속적으로 정리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사목자의 임무이다. 너무도 많은 낙태 체험자들이 자신이 슬퍼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목자는 자신의 아기를 잃어버린데 대한 부모들의 슬픔을 인정하고 그러한 감정들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확신시켜 줄 수 있다. 아기를 잃은 어머니, 아버지들은 마음깊이 상처받고 있고, 이러한 상실을 느낄 권리를 갖고 있다. 사목자는 그러한 감정들을 긍정해 주고 정리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의 아기를 재인격화(repersonalized)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을 때 우울 단계가 지나가 버린다. 여러 해동안, 낙태된 아기는 탈인격화(depersonalized)되어 감정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이제, 받아들임(acceptance) 단계라 부르는 마지막 단계가 다가온다. 이러한 단계에서 아기는 더 이상 무인격적(無人格的) 존재가 아닌 가슴에 품어 안을 ‘내아들’, ‘내딸’이다. 이제 그들은 아기를 받아들이고 아기의 죽음과 그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며, 아기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한다. 성인들의 통공 교리는 그들에게 희망 가득한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죽은 아기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살고 있고 이제는 부모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알면서 크나큰 위로를 발견한다. 이러한 시점이 오면 사목자는 부모에게 아기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권유할 수 있다. 왜 그럴까? 그럼으로써 아기는 진정으로 그들의 아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아기 이름을 짓는 것은 화해를 위한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아울러, 그들은 아기가 어떻게 생겼을까를 영상화시켜 보도록 초대받을 수도 있다. 나는 너무도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마음 속 깊이 이미 그렇게 해 왔음을 알고 번번이 놀라고만다. 낙태 체험자 치유 사목을 하면서 나는 글쓰기가 치유와 화해 과정에서 지극히 중요한 실천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을 ‘구체화’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편지쓰기는 많은 부모들에게 유익하다. 하느님께, 낙태된 아기에게, 낙태 결정에 관여했던 이들에게 편지쓰는 것은 용서 과정 진행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많은 부모들은 용서의 여정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가 가장 어려운 부분임을 발견한다. 빈번히 그들은 낙태결정 당시의 자신으로부터 현재의 자신을 유리시키길 희망한다. 이는 그들을 부정(否定) 상태로 빠뜨리며 치유과정 진행을 방해한다.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는 많은 부모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낙태 결정 당시의 자신과 대화에 들어간다. 이러한 실천을 통하여 많은 이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깊은 슬픔과 자기경멸의 감정들을 인정할 수 있으며, 고통스러운 과거와 자신을 화해시킬 수 있게 된다. 개인기록으로서 일기쓰기나 매일묵상 기록 역시 이러한 부모들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일기 쓰는동안 떠오르는 주제와 그 패턴에 관심 기울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목자 역시 그들안에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영역들과 치유과정 진행을 보다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다. 사목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함으로써 그들이 체험하는 치유 레벨을 평가할 수 있다 : 하느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자 하실까요? (낙태된) 아기는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 아기가 당신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어할까요? 당신은 자기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고 계시나요? 화해 부족이나 경멸 반응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사목자와 부모간에 치유 작업이 더욱 요망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느님과 자기자신과 타인들과 화해하려는 지속적인 요구가 초점이 된다. 가톨릭 세례식 전례의 상징들은 그들을 위한 치유와 희망의 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다. 백색 의상과 세례초를 전달하는 준전례적(準典禮的) 세례식은 그들에게 평화와 신앙 체험의 강력한 순간이 될 수 있다. 또한 가톨릭 신자 낙태 체험자들은 낙태아를 기념하는 미사 지향을 봉헌할 수 있다. 이는 낙태와 연관이 있는 특정한 날, 즉 낙태한 날, 아기의 출생 예정일, 심지어 아기의 이름과 같은 성인 축일에 드리는 것이 적절하다. 많은 낙태 체험자들은 자신의 아기를 나타내는 개인적 상징물 ― 작은 태아 조각상, 아기를 기념한 십자 목걸이, 반지나 액자, 아기의 가묘(假墓)에 대한 헌화 등 ― 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 치유와 평화에 무척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기서, 적절하고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이 자신의 슬픔을 의식화(儀式化)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목자의 임무이다. 만일 사목자가 꿈 분석같은 진보된 특정 치유 테크닉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도움이 된다. 드물지 않게, 꿈은 마음이 스스로 치유해 나가는 방법이며, 마음이 안전하게 다루어낼 수 있는 소재를 스스로 제공한다. 많은 억압된 생각과 감정들이 우리의 꿈생활을 통하여 표현된다. 많은 낙태 체험자들이 특정한 꿈을 자주 꾼다는 이야기를 고백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사실이 아니며, 그것을 잘 분석해 보면 낙태체험으로부터 유래된 해소되지 않은 기억과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레베카는 8년 전에 낙태를 했다. 최근 그녀는 벌판 어느 바위에 앉아 있는 8살난 소년을 만나는 꿈을 자주 꾼다. 그 소년을 꿈에서 보았을 때 그녀는 소년이 아무 얼굴도 없고 불렀을 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레베카에게 낙태아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아기가 어떻게 생겼었을까 생각해 보았는지 물어 보았다. 그제서야 레베카는 완결을 향해 나가려는, 자신의 꿈의 발달되지 못한 부분들을 이해하였다. 이미지 도입법도 치유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 사목자는 그들이 낙태사건의 다양한 순간들을 영상화시키고 자신의 ‘십자가’를 체험하면서 그 가운데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도록 초대한다. 기억들의 치유는 이러한 유형의 신앙 영상화를 통하여 증진될 수 있다. 낙태 체험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자신의 체험을 묵상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치유를 위한 매우 소중한 도구가 되어왔다. 그룹 모임은 그들이 다른 이들과 함께 자신의 느낌과 생각들을 나눌 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치유 여정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힘과 도움과 격려를 얻을 수 있다. (‘12단계’라 명명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익명 모임(Alcoholics Anonymous)과 마찬가지로, 낙태 체험자들을 위한 도움 그룹들은 정직과 겸손과 긍정과 신뢰를 요구받는다. 일단 그러한 모토가 정착되면, 빠른 진보가 이루어진다. 라마의 여인들 : 낙태 체험자 성서연구(Women in Ramah : A Post-Abortion Bible Study, Christian Action Council, 701 West Broad Street, Suite 405, Falls Church, VA 22046)와 같은 프로그램은 도움 그룹 구성을 위한 효과적인 모델이 되어 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체험이 그들이 자신이 결코 홀로가 아님을 인식할 수 있는 특별한 친교의 시간을 마련해 준다는 사실이다. 나 외에도 나와 똑같은 치유의 여정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고 그들로부터 이해받고 받아들여진다면, 깊고도 지속적인 우정이 드물지 않게 생겨난다. 그룹 안에서 강화된 우정의 끈은 그들에게 삶을 매우 잘 지탱해 줄 수 있는 힘이 된다. 부모와 아기의 관계가 ‘나 - 그것’으로부터 ‘나 - 너’로, 부정으로부터 긍정으로 변하면서 치유과정이 열매를 맺어간다. 이러한 과정이 완결되는 때가 올 수 있는가? 답은 그렇다와 아니다의 두 가지이다.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슬픔과 기억은 언제나 남아있을 것이다. 자녀를 잃은 부모들은 그들 안에 여하간 치유 여정이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마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하고도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한다면, 치유 과정에도 어떠한 유형의 완결이 있어야 한다. 사목자와 낙태 체험자 사이의 관계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의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시점까지 치유가 진행되었다고 양자가 느끼게 된다면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끝맺음으로 완결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치유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사목자가 부모를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초대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 아마도 이는 어떠한 애덕 행위를 한다거나, 생명을 살리는데 드는 비용을 기부한다든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너온 자신의 여정에 대해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사목자는 다른 이들과 함께 치유과정을 여정해 나가는 그(녀)의 역량의 성격과 한계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낙태 체험자들을 돕는 과정에서 전문 치료자가 필요한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을 의뢰할 수 있는 적격하고 훌륭한 전문가들과의 연계가 필수적이다. 낙태 체험은 임상적 실제(외상후 증후군(外傷後症候群))에 비추어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사목자가 그들에게 계속적인 전문치료를 제안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한 지식을 계속하여 키워나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사목자가 의뢰하는 전문가는, 상처 주는 사건으로 낙태를 간주하고 있고 영적인 삶에 깊이 민감한 사람이어야 함을 주의하라. 카운셀러나 사목자가 합심하여 낙태 체험자의 건강과 치유를 위한 도움을 주는 것은 무척 유익하다. 끝으로,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참회의 성사는 낙태체험 가톨릭 신자를 위한 치유와 온전함의 여정에서 결코 누락되어서는 안될 차원이다. 그 안에서 그들은 생명을 주시는 고유한 방식으로써 주님 용서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다. 성사는 그들이 걸어온 전체 치유 여정을 종합 기념한다. 이는 그들이 하느님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고 용서와 화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장 잘 기념될 수 있다. 이 상처입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자신의 삶에 너무도 깊은 영향을 끼쳐온 비극 속에서도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복음 전달자로서의 우리의 임무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희망으로 가는 길(paths to hope)이 되어 줄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은 죄와 죽음의 현실을 대면할 때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태도를 취한다. 우리는 그러한 고통과 죽음을 우리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 안에서 이해하며, 그것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인식한다. 결국 그것은 생명으로 나아간다.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으로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낙태라는 십자가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그 고통과 죽음과 마음의 메마름을 견디어 내고 있는 사람들은 부활한 생명과 희망의 말씀을 받을 수 있다. 낙태는 그로 인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죽은 아기를 위한 마침표도, 아기의 부모를 위한 종착역도 아니었다. 제자들이 부활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갈바리아' 산을 되돌아 보았듯이, 그들도 생명을 주시고 화해를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부활한 신앙과 희망의 프리즘을 통하여 자신의 '갈바리아'산을 되돌아 본다. 탕자의 아버지께서 전하신 사랑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시어 우리가 낙태의 고통을 인내하고 있는 사람들, 화해를 찾아 온전해지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오직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발견할 기쁨의 메시지를 그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죽었던 우리 자매와 형제들이 새생명으로 돌아왔도다 잃었던 그들을 결국 찾고야 말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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