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여인들] 성모 마리아 여인의 이름 중에 그토록 광활하고 복잡한 해석과 의미를 한꺼번에 맞닥뜨린 이름이 또 있을까. 너무나 짧은 성경 구절 몇 마디로 인류 역사의 고단한 삶이, 그 숱한 간절함이 그 여인의 어깨 위에, 두 손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성모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때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처럼, 때론 우리 ‘엄마’처럼 슈퍼우먼이 되어야만 하는 성모 마리아… 성모님을 품고 있는 신앙인들의 고백은 사실, 진심 어리다 못해 뼛속까지 차오른 목마름의 외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발, 제발 한 번만이라도 제 얘길 들어주시길…. 성모님께 향한 숱한 외침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 ‘엄마’가 되기를 바라는, 그리하여 우리 ‘엄마’처럼 하느님이 내 편이길 바라는 간절함이다. 그러나 이 간절함은 사실 간절한 체념이다. 바닥을 칠 때, 더 이상 오를 힘이 없을 때, 성모님은 마지막 간절함을 끝내 들어주는 여인으로 남는다. 사도 바오로는 성모님에 대해 박하다. 겨우 ‘한 여인’으로 소개할 뿐이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머무는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갈라 4,4) 성모님을 가리키는 ‘여인’은 ‘율법 아래’에 놓이는 예수님의 육화를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다. 성모님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사도 바오로의 해석 사이엔 크나큰 간극이 있다. 그럼에도 성모님이 ‘한 여인’인 건 귀하다. 예수님을 받아내는 ‘한 여인’, 초월적인 신이 율법 아래 머무르겠다는 그 ‘바닥’에 성모님은 당신의 가치를 드러내신다. 초월이 한계 안에 내려왔고, 하늘이 이 땅 안에 제 거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성모님은 그런 가당찮은 ‘바닥’의 상징이다. 그렇다고 성모님의 겸손을 무조건적인 자기 낮춤으로 이해하는 건 적절치 않다. 너보다 낮은 자리에 머물며 네가 시키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겸손이라 한다면 성모님은 그런 겸손과는 거리가 있다. 아들 예수를 받아들일 때, 성모님은 ‘곰곰이 생각하셨다.’(루카 1,29) ‘곰곰이 생각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디아로기조마이(διαλογίζομαι)’로, 어떤 사안에 대해 고민하고 따져보고 그리하여 인식의 내적 투쟁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가리킨다. 성모님은 자기 한몸 건사하는 고민을 한 게 아니다. 주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순한 여종이 성모님이 아니다. 우리는 애초에 성모님의 고뇌와 내적 투쟁에 눈감은 게 아닐까. 무조건적인 순종의 관점에 성모님을 가둬놓고 바라본 게 아닐까. 성모님은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전투적이었고, 비판적 고민 끝에 온 세상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이뤄내셨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성모님을 ‘여인’이라는 단어로 소개한다. 카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을 ‘여인’이라 부르는 예수의 ‘차가움(?)’에 신앙인은 당혹스러워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어머니가 된다.(요한 19,27) 사도 바오로가 말한 ‘여인’은 요한복음을 통해 모든 믿는 이들의 어머니로 거듭난다. 다만 그러한 새로운 탄생은 십자가 아래였다. 뼛속 깊이 차오르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제 아들의 죽음을 끝끝내 견뎌내시는 성모님의 간절한 체념 아래 믿는 이들은 끊임없이 엄마, 엄마, 우리 엄마라고 성모님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놀랍게도 고통의 한복판에서 구원은 완성되고 성모님은 우리 ‘엄마’이고야 만다. 고통에 섬세하고, 고통에 함께하는 곳에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엄마’로서 구원을 받아내고야 만다. 이태원의 그 좁디좁은 골목 안에서도 성모님은 그들의 ‘엄마’여야만 하고 또한 우리의 ‘엄마’여야만 한다. [2022년 11월 13일(다해)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대구주보 4면,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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