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요셉(마태 1-2; 루카 2)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마태 1,18-2,23; 루카 2,1-52) 루카는 예수님과 성모님께 온전히 초점을 맞추는 반면, 마태오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보입니다. 마태오는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 “의로운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의 자손”(마태 1,19-20)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잉태되신 때부터 성가정이 헤로데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돌아올 때까지, 요셉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떻게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지켜냈는지 소상히 전합니다. 예전에 어느 미술관에서 보았던 성화에서, 자신의 옷자락을 펼쳐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감싸 보호하던 그분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진정 요셉은 ‘성가정의 수호자’였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족보에서 일관되게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다.”라고 말하는데, 유독 예수님의 탄생만은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가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라고 말합니다. 이를 통하여 마태오는 ‘하와에게서 태어날 메시아의 약속’(창세 3,15)과 ‘젊은 여인에게서 태어날 임마누엘의 약속’(이사 7,14)이 오롯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구세주의 오심으로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 절정에 다다른 장엄한 이 순간, 요셉은 모든 영광을 성모님께 돌리고 또한 예수님의 아버지의 자리마저 성부 하느님께 고이 내어드린 채 겸손되이 가장자리로 물러납니다. 갈등과 번민의 순간에 언제나 자기 생각과 결정보다 하느님의 뜻을 우선하여 따랐던 요셉의 의로운 삶은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탁월한 모범입니다. 혼인하기도 전에 잉태한 여인 마리아를 기꺼이 맞아들인 요셉은, 후일 간음한 여인을 보호하고 용서하신 아드님의 모습(요한 8,1-11)을 앞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꿈에 천사의 지시를 받을 때마다(마태 1,20-25; 2,13-15.19-23)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바를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인 요셉은, 후일 아드님과 관련한 신비를 접할 때마다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신 성모님의 모습(루카 2,19.51)과 많이 닮았습니다. 이리도 세 분이 서로를 닮을 수 있었던 것은, 세 분 모두가 ‘한 분이신 하느님’의 뜻을 찾았고 그분을 성가정의 중심에 모셨기 때문이겠지요. 요셉은 가난한 목수였고(마태 13,55), 그분 밑에서 자란 예수님도 목수였습니다(마르 6,3). 예수님은 어릴 적부터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오랜 세월 아버지 요셉과 함께 목수로 일하셨을 터이지요. 예수님과 한 지붕 아래 살며, 수많은 대화를 나누고 사랑 가득한 눈빛을 마주한 채 복된 날들을 이어갔을 요셉의 삶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삶 가운데 조그마한 작업장에서 거친 노동을 이어가면서도, ‘주님의 수호자’로 살아간 요셉 성인이 우리에게 말하는 듯합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고작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만나는 나의 노동과 일상이 내 눈에 초라해 보일지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그 자리가 바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자리’, ‘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자리’임을 기억하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가운데는 성인도 있었고, 작은 믿음에 걸려 넘어진 죄인도 있었습니다. 임금들뿐 아니라, 이방 여인에다 목수까지도 있었지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참조).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들판에 핀 한 송이 들꽃처럼, 화려하지 않고 평범한 나의 일상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즐겨 받으시는 하느님을 믿으며, 모두가 구원의 여정을 기쁨과 희망 속에 힘차게 이어가시길 빕니다. [2022년 11월 20일(다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대구주보 3면,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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