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여호수아의 사명과 구원의 하느님 호세아에서 여호수아로 모세가 죽은 뒤 ‘모세의 시종’으로 불리었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민수 13,16에 의하면 여호수아는 원래 ‘호세아’였는데 모세에 의해 여호수아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구하다’ ‘돕다’ ‘구원하다’를 뜻하는 동사 ‘야사’에서 나온 이름으로서 ‘구원’을 뜻합니다. 그런가하면 여호수아는 ‘야사’ 앞에 ‘야훼’를 붙인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이름으로서 ‘야훼께서 구원하신다’ ‘야훼는 구원이시다’ 곧 ‘주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세아에서 여호수아로의 개명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사제계 전승의 민수기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이집트 탈출 이전의 사람들은 아직 야훼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신약에 와서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흔한 유대인의 이름으로 ‘예수아’ 또는 ‘예호수아’로 발음된 듯한데, 그리스어 신약성경에서 ‘이에수스’, 라틴어 신약성경에서 ‘예수스’가 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예수’가 되었지요. 아무튼 예수라는 이름의 어원은 여호수아로서 ‘하느님은 구원해 주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메시아’ 곧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세상의 수많은 이름 가운데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따를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나의 이름은 그분의 뒤를 따라 갈 때 참된 이름이 되고,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길 안에서만 의미가 있음을 잊지 맙시다! 여호수아의 사명 모세는 (지금의 사해 동쪽 요르단 지역) ‘모압’에서 약속의 땅을 건너다보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신명기의 마지막 장에 의하면, 모세는 죽기 전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하였고, 이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차 말하는 여호수아의 지시를 따르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습니다.(34,9 참조) 이어지는 여호수아기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가 죽고 난 다음 여호수아에게 하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다음 서문에서 보여주듯 여호수아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는 일 그것입니다. “이제 너와 이 모든 백성은 일어나 저 요르단을 건너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거라. … 네가 사는 동안 내내 아무도 너에게 맞서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어 주었듯이 너와 함께 있어 주며,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겠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줄 사람은 바로 너다.”(여호 1,2-6) 이제 백성을 이끌어가는 일 다음으로 중요한 여호수아의 사명은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전한 율법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일찍이 모세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율법서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는데, 그것은 고집 센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반항하여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가르침을 주고 경계하기 위해서였지요. 이는 신명기에서도 강조한 점입니다. 신명기 끝부분을 보면, 120살의 노쇠한 모세가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선포하고 율법의 말씀들을 기록한 다음, 기록한 그 책을 주님의 계약의 궤 곁에 두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책이 너희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하여라. 그것은 내가 너희의 반항심과 너희의 고집을 잘 알기 때문이다.”(신명 31,26-27) 여호수아기는 신명기의 강조점을 이어받아 그 시작부터 ‘율법의 준수’를 강조합니다. 즉 여호수아는 밤낮으로 율법서의 말씀을 되뇌어 그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하고, 머리와 가슴에 새긴 그 모든 말씀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하는 것이니, 그러한 율법의 실천에 번영과 축복의 결과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너는 더욱 더 힘과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율법을 명심하여 실천하고,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서의 말씀이 네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밤낮으로 되뇌어, 거기에 쓰인 것을 모두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네 길이 번창하고 네가 성공할 것이다.”(여호 1,7-8) 위의 말씀에 이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늘 여호수아와 함께 하실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어 주겠다.” 모세에게 드린 것과 같은 순종을 약속한 백성들도 “오직 힘과 용기를 내십시오.” 하며 여호수아를 성원했지요. 과연 함께 하시는 하느님과, 순종하겠다는 백성으로부터 큰 격려를 받은 여호수아는 용감하게 백성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도 하느님의 도우심과 우리의 지지를 받아 용기를 내면 좋겠습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가야 할 여호수아는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가까이 하고, 또 그 말씀을 잘 실천해야 했습니다. 곧 여호수아의 사명은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를 때 수행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수아가 율법서의 말씀을 “밤낮으로 되뇌어 실천해야 한다.”고 했는데, ‘되뇌다’라는 말의 어원은 ‘새가 지저귀다’ ‘중얼거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남이 들을 수 있도록 봉독하는 낭송 방식을 ‘되뇌다’라는 말로써 표현하고자 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말씀을 명심하고 실천하되 먼저 ‘되뇌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혼자서 기도할 때에도 나의 입술의 움직임으로 소리를 내고, 성경을 읽을 때에도 눈으로만이 아니라 입술로 거룩한 소리를 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눈으로만 읽지 말고 소리를 내며 읽을 때 마음까지 울리게 될 테니까요! 요르단 강을 마르게 하신 하느님 오늘날 이스라엘 동쪽에 흐르는 요르단 강은 북부 갈릴래아 호수에서 (중남부) 사해로 흘러들고 있는데, 사해 위쪽에는 요르단 강을 가운데 두고 왼편에 ‘예리코’, 오른편에 ‘아벨 시팀’이라는 도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기는 2장에서 6장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이 ‘시팀’에서 요르단 강을 건너 예리코를 점령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계약 궤와 그 궤를 멘 레위인 사제들을 보거든” 자신들이 있던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라갈 것을 명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이 길을 가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해야 갈 길을 알 수 있을 것이오. 다만 여러분과 그 궤 사이에 이천 엄마 가량 거리를 띄우고, 그 궤에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마시오.”(여호 3,4)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계약 궤를 뒤따라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2000 암마는 약 900미터나 되는 간격이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거리지요. 여호수아기의 저자는 이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계약 궤는 너무나 신성하니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음을 말하려는 듯합니다. 이를 명한 여호수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백성을 앞서가되 요르단 강을 다 건너지 말고 강 한복판에 서 있다가, 백성들이 다 건너고 나면 그제야 강을 건너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건너던 요르단 강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계약 궤가 들어서자 흐르던 물이 멈추었고,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고 강을 건너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의 탈출 때와 같은 이적(異蹟)이 일어난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니 흐르던 강물마저 멈추고 말라버린 것입니다! “가지 마오 가지를 마오.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가려거든 가시려거든, 이 언약 가져가시오.” 양지은 아녜스가 미스트롯2에서 열창한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그 (죽음의) 강을 건널 사람은 노래 속의 님만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건너야만 할 강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 강이 영원한 삶으로 건너가는 강이라면 어떨까요? 그 강에 뛰어들 용기와 실행이 필요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니 희망을 놓지 맙시다.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크신 하느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2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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