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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시편 톺아보기: 시편 100편, 고함 아닌 함성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12-13 조회수2,136 추천수0

[시편 톺아보기] 시편 100편, ‘고함’ 아닌 ‘함성’

 

 

2002 한일 월드컵 때 경기장 안팎에서 외치던 응원 소리는 전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응원단장이 유도하고 국민이 함성으로 화답하는 모습은 국외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커다란 함성은 우리 선수의 사기는 높여주고 상대편에게는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나아가 관중을 경기에 더 몰입하도록 하는, 즉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예열’ 단계를 만들어 줍니다. 

 

유명 가수들은 콘서트장이나 행사장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한껏 흥을 돋우고 청중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해 떼창이나 함성 같은 응원 사격을 적극 요청하기도 합니다. “자! 뛰어!”, “다 같이 소리 질러!”, “함성소리, 5초간 발사!”라며 함성을 끌어내는 것이지요. 사실 우레와 같은 함성은 흥을 올리고 분위기를 띄우는 데 아주 제격입니다. 

 

‘함성’은 소리칠 함(喊)과 소리 성(聲)으로 되어 있습니다. ‘함(喊)’은 소리를 내는 입이 그 역할을 다(咸)할 때까지 목청 끝까지 내는 소리라고 풀이됩니다. 반면 ‘고함’은 ‘함성’과 달리 ‘다 함께’ 외치는 소리이기보다 각 개인이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치는 것으로 조금은 다른 뉘앙스를 지닙니다. 

 

시편 100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 함께 소리치는’ 함성을 요구합니다. 시편의 시작에서부터 “주님께 환성 울려라.”라며 초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성전에서 예배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환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는 ‘기뻐서 큰 소리를 지른다’, ‘고함을 치다’, ‘귀먹게 할 정도로 소리를 높이다’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가장 유명한 외침은 예리코 성을 함락할 때 내지른 외침입니다. ‘루아’는 일반적으로 적군의 침략을 급히 알리는 경보나 성막의 계약궤가 진영으로 들어올 때, 혹은 왕의 즉위식 때 왕을 향하여 내지르는 환호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내지르는 환호성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 때에 울리는 환호가 마치 전쟁의 신호 혹은 전쟁의 외침과도 같은 함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93편부터 99편까지 7개의 시편은 왕이신 하느님의 위엄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통치를 찬양하는 시편이 묶어진, 하나의 작은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 조금씩 다른 내용을 다루는 듯 보이지만 왕이신 하느님은 정의와 공평의 재판관이라는 주제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시편 100편은 시편 93편에서 99편까지의 ‘후렴 시편’처럼 왕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 100편이 ‘후렴 시편’ 역할을 하는 이유는 정의롭고 공평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라는 ‘찬양의 촉구’ 때문입니다. 찬양을 독려한다는 것은 찬양이 하느님의 통치를 체험하고 바라는 사람들의 합당한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즉 시편 100편은 하느님의 통치를 체험한 백성들이 정의롭고 공평하신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함성과 같은 모습으로 보여준 시편입니다. 

 

시편 100편은 150개의 시편 중에서 유일하게 ‘감사를 위한 시편’이라는 머리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의 시편’으로 명시된 이 시편에는 감사의 메시지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감사의 이유는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이며, 셋째는 우리가 그분의 소유라는 점입니다. 넷째는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라는 것, 다섯째는 우리가 그분의 양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분인가를 깨닫는 데에 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저자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가 그분의 소유이고 그분의 백성이며 그분의 양떼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경험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하느님만이 주님이시라는 고백과 그 고백에 따르는 모든 요구와 의무로 그분을 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벅찬 감격 속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섬김입니다. 

 

이 시편은 전체 다섯 소절로 이루어진 비교적 짧은 시편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하며 모든 사람을 그 찬양에 동참하도록 독려합니다. 비교적 짧은 시편인데도 명령형 동사가 일곱 개나 나타납니다. 그분께 ‘환성 올려라’, ‘섬겨라’, ‘나아가라’, ‘알아라’, ‘들어가라(2번)’, ‘찬미하여라’가 그러합니다. 그 어떤 비애나 탄식, 원망과 같은 부정적 언어는 한 소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가라’라고 할 때 사용된 히브리어는 ‘아바드’입니다.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이 동사에서 ‘노예’, ‘종’이라는 단어 ‘에베드’가 파생되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행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단어가 진정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한 성전 예배 행위를 넘어선, 곧 생애 전체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며 전면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종’(에베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찬양하며 전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을 섬기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에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명확히 밝혀줍니다. “그분은 선하시고 영원한 자애를 지니셨고 변치 않는 성실을 가지신 분”(5절)이라는 고백이 그러합니다. 

 

감사와 찬송은 축복의 전주곡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예배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4절)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창조물로, 하느님의 소유로, 하느님의 백성으로, 하느님의 양떼로서 감사하며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그 삶이 바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감사로 채우며 삶으로 쓰는 시편 100편이 되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 그동안 ‘시편 톺아보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맡아주신 임미숙 수녀님께 감사드립니다. 

 

[월간빛, 2022년 12월호,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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