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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성경에 빠지다17: 솔로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04 조회수1,777 추천수0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17) 솔로몬


솔로몬의 ‘두 얼굴’… 뛰어난 정치가, 불충실한 우상숭배자

 

 

출처=구글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열왕기 상권 1-2장은 솔로몬이 왕위 계승 서열 1번인 아도니야 대신에 왕좌를 차지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요압 장군과 에비야타르 사제의 지지를 얻어 다윗의 왕좌를 계승하려 했습니다. 나탄 예언자와 차독 사제, 다윗의 경비대장 브나야 등이 이에 반기를 들어 다윗과 밧 세바의 아들 솔로몬을 임금으로 세웁니다. 솔로몬은 임금이 되자 여느 권력자처럼 형제들과 반대자들을 모두 숙청합니다. “이리하여 솔로몬의 손안에서 왕권이 튼튼해졌다”(1열왕 2,46)고 성경은 밝힙니다.

 

솔로몬이 임금이 된 것은 사울이나 다윗처럼 카리스마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신분과 동조자들의 정치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목동 출신인 다윗은 군인으로 온갖 풍파를 거친 뒤 어렵게 임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왕자로 태어나 궁전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임금이 되어 죽는 날까지 절대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는 부족 중심의 이스라엘의 전통 제도를 허물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처럼 뛰어난 군인은 아니었지만 빼어난 정치력과 능란한 외교술로 이스라엘을 부흥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최고 번성기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 번성기였습니다. 영토도 가장 넓었습니다.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필리스티아 땅까지, 그리고 이집트 국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를 다스렸다. 그들은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조공을 바치며 그를 섬겼다.”(1열왕 5,1-2)

 

열왕기 상권 3─11장은 솔로몬 시대를 소개합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솔로몬의 실록’(1열왕 11,41)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솔로몬이 다스린 40년을 ‘평화의 시대’라고 정의합니다. 열왕기를 기록한 신명기계 역사가는 솔로몬 통치 기간을 “유다와 이스라엘은 그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았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행복하게 지냈다”(1열왕 4,20-21)고 평가합니다. 또 “솔로몬 임금은 부와 지혜에서 세상의 어느 임금보다 뛰어났다.”(1열왕 10,23)라고 칭송했습니다.

 

솔로몬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외교술’이었습니다. 그는 최우선으로 실리 외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정략혼인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는 이집트 2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프스센네스 2세의 딸과 혼인해 가나안인의 땅인 게제르를 지참금으로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압ㆍ암몬ㆍ에돔ㆍ시돈ㆍ히타이트 등 여러 나라의 왕족들과 혼인해 아내 700명과 후궁 300명을 뒀습니다.

 

솔로몬은 또 활발한 무역 활동으로 엄청난 부를 쌓습니다. 그는 해양에서 내륙으로 이어진 아라비아 대상들의 주요 무역로로 곳곳에 세관을 설치해 세금을 취했습니다. 아울러 솔로몬은 해양민족인 티로의 임금 히람과 동맹을 맺고 홍해 아카바만 에츠욘 게베르에 상선대를 두고 지중해 페니키아인들과 무역을 했습니다. 이 상선대는 팔레스티나에서 구할 수 없는 각종 귀금속과 향료, 무기 등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대외적으로 실리 외교를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병거대 주력의 군대를 재편성해 국방력을 강화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 밖과 하초르, 므기또, 게제르에 성읍을 세우고 병거대와 기병대를 주둔시켜 요새로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아울러 개화 정책을 펴 이스라엘의 문화를 상당히 발전시킵니다. 솔로몬은 왕실에 전문 역사 기록관을 두어 여러 전승을 정리했습니다. 모세 오경 야휘스트 사료가 편집된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성경과 전승에 따르면 솔로몬은 시편이나 음악에도 뛰어난 소질이 있었고 무엇보다 지혜가 깊었다고 합니다. “그는 잠언을 삼천 개나 지었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나 되었다. 솔로몬은 레바논에 있는 향백나무부터 담벼락에서 자라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초목들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관하여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민족들에게서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다.”(1열왕 5,12-14)

 

 

성전과 궁전을 짓다

 

솔로몬은 국력을 바탕으로 20년에 걸쳐 성전과 궁전을 짓는 토목공사를 추진합니다. 열왕기를 저술한 신명기계 역사가는 솔로몬의 토목공사 중 성전 건축을 가장 중대한 사업으로 여겨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1열왕 5-7장 참조)

 

솔로몬은 시온 북쪽에 있는 산마루에 주님의 집 곧 성전(聖殿)을 짓습니다. 그의 아버지 다윗이 제단을 차리기 위해 샀던 땅이었습니다.(2사무 24,18-25 참조) 성전 크기는 길이 약 27m(60암바), 너비 약 9m(20암바), 높이 약 13.5m(30암바)입니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길이 69m, 너비 28m, 지붕 높이 23m, 종탑 높이 45m이니 솔로몬이 지은 주님의 집은 대략 명동대성당의 대략 3분의 1 크기였습니다.

 

하느님 계약 궤를 모실 성전 안 지성소는 길이, 너비, 높이 모두 약 9m(20암바)의 정방형으로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레바논의 향백나무로 지은 지성소를 순금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480년, 자신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4년째 되던 해 지우 달, 곧 둘째 달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해 7년 만에 성전을 완공하였습니다. 그는 다윗 성에서 하느님 계약 궤를 성전으로 옮겨와 사제들과 온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성 들인 의식으로 지성소에 안치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솔로몬은 하느님께 장엄 기도와 친교 제물을 바치고 주님의 집을 봉헌하였습니다.(1열왕 8장 참조)

 

주님의 집을 지어 봉헌한 솔로몬은 자신과 아내를 위한 궁전도 여러 채 지었습니다. ‘레바논 수풀 궁’이라고 이름 지은 궁전은 길이 약 45m(100암바), 너비 약 22.5m(50암바), 높이 약 13.5m(30암마)로 성전보다 2배나 길고 넓었습니다. 공사 기간도 주님의 집을 짓는 기간보다 거의 곱절인 13년이 걸렸습니다.

 

 

주님께서 진노하셨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1열왕 11,9)

 

솔로몬에 대한 열왕기 저자의 평가입니다. 신명기계 역사가의 눈에 솔로몬은 훌륭한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지 않은 임금이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두 가지 큰 잘못을 저지릅니다. 첫째, 솔로몬은 우상과 이교 풍습을 이스라엘 땅에 들여왔습니다. 솔로몬은 정략혼인으로 외국의 이교도 왕족 딸들을 아내와 후궁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솔로몬은 1000명이나 되는 자신의 여인들에게 그녀들이 섬기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종교의식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산당(山堂)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솔로몬의 이런 행동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율법은 이교인과의 혼인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다른 신들 곧 우상을 섬기게 될 위험 때문이었습니다. 율법 중 임금이 지켜야 할 규정(신명 17,14-20)도 솔로몬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이유는 신명기계 역사가는 솔로몬이 율법을 어기고 우상 숭배를 허용해 이스라엘 신앙을 쇠퇴시키고 타락시켰다고 비난합니다.

 

둘째, 솔로몬은 이집트의 파라오들처럼 과도한 세금과 과중한 노역을 부과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솔로몬은 막대한 토목공사비를 세금으로 충당하기 위해 왕국을 열두 행정구역으로 나누었습니다.(1열왕 4,7-19) 세금 거두는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함이었죠. 그리고 레바논에서 예루살렘까지 건축자재를 나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 3만 명을 징발했습니다. 또 돌까는 작업에 8만 명, 짐 나르는 노역에 7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금의 권력에 의해 자유가 무자비하게 박탈당하고, 세속화되고, 계약 공동체의 바탕이 흔들릴 것이라는 이스라엘 첫 예언자 사무엘의 경고가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은 커졌습니다. 특히 남쪽 유다 지파의 다윗 왕가에 대한 북쪽 10개 지파의 반감이 폭발 직전까지 팽배하였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솔로몬은 재위 내내 종교 혼합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전통과 외래 종교 문화를 융합 발전시키려 한 것이죠. 그 대표 사례가 성전과 궁전 건축입니다. 솔로몬은 바알 신을 섬기는 티로 히람 왕실의 건축가들이 설계하고 감독한 성전에 하느님 계약 궤를 모셨습니다. 가나안 이교 문화가 이스라엘인의 신앙과 생활에 스며든 명백한 증거입니다.

 

조상들의 신앙을 소중히 여긴 이스라엘인들은 솔로몬의 외국 문화 수입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영향을 받은 신명기계 역사가는 솔로몬의 통치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솔로몬은 기원전 약 972년께부터 40년간 통일된 이스라엘 임금으로 통치하다가 기원전 933년께 선종합니다. 솔로몬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지혜와 부귀영화의 대명사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신명기계 역사가는 하느님께 불충실한 우상 숭배자로 평가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4월 2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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