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의 기쁨과 삶을 담은 사도행전 읽기 16] 제도화로 변화되는 교회(사도 6,1-7) 사도행전은 5장에서,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과 하나니아스라는 인물을 비교하며 위선적 신앙의 위험성을 잘 알려주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문제가 대두되는데, 바로 불평등입니다. 초대교회에는 두 부류, 그리스계와 히브리계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계 신자들은 그리스 지역에서 출생하여 해당 문화권에서 자라난 이들로, 율법에 대한 이해와 충성도가 낮은 이들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히브리계 신자들은 율법을 향한 충성도가 높았습니다. 이들은 서로 너무 달랐습니다. 율법을 바라보는 시선도, 예수님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그토록 다르더라도 서로를 향한 이해와 사랑을 바탕에 둔다면 하나가 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결국 서로에 대한 불신과 반목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또한 이 반목은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가에 따라 억압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 그리스계 과부 신자들이 배급에서 홀대받게 됩니다. 이러한 홀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스계 과부 신자들을 향한 차별 대우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과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말씀과 계명의 위반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구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를 파국으로 내모는 중대한 요소입니다. 사도행전보다 후대에 쓰인 야고보 서간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4) 즉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름에 대한 이해와 서로에 대한 배려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사랑이라는 가치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믿음과 사랑이 구현되기 위한 제도와 형식들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식탁의 봉사자에게 배급의 직무를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복음 선포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고난, 교회 내부의 위선과 불평등의 문제 등 여러 가지 굴곡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욕을 받은 것에 기뻐했고, 교회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롭게 변화해 나갔습니다. 지금 교회의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세속화 속에서 교회는 깨어 있어야 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 대해 열린 마음도 지녀야 합니다. 참으로 힘든 여정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도들과 함께하셨듯이, 우리와도 함께하시기에 이 여정은 고난이 아닌 희망의 여정입니다. [2023년 5월 14일(가해) 부활 제6주일 서울주보 5면, 김덕재 안드레아 신부(사목국 성서못자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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