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이야기] “그러나 제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1사무 24,13) -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 주다 다섯 번째 이야기 : 1사무 24장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해 지프 광야를 떠나 동쪽으로 약 25킬로 떨어진 엔 게디에 머무른다.(24,1) 사해 근처의 엔 게디는 ‘새끼 염소의 우물’이라는 뜻으로 메마른 유다 광야에서 물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다윗이 사울과 맞닥뜨려 상황을 돌파한 유명한 이야기는 24장뿐 아니라 26장 하킬라 언덕의 일화에도 나오지만 첫 번째 사건인 엔 게디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다윗이 옮겨간 거처를 전해 들은 사울은 군사 삼천 명을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가, 인근 동굴에 들어가 혼자 뒤를 보게 된다. 다윗은 부하들과 함께 그 동굴 깊숙이 숨어 있었는데, 부하들은 주님께서 사울을 다윗의 손아귀에 맡겼으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말한다.(24,5) 사울을 해치우자는 말이다. 이제 다윗의 처지는 역전된다.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몰래 잘라낸다. 옷자락이 잘려나간 것은 그 옷의 임자에게 일어날 일과 동일시되며 그가 지닌 지위와 권한을 떼어내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다윗은 곧 자신이 한 일에 마음이 찔린다.(24,6) 이 문장을 직역하면 ‘다윗의 마음이 그것(사울의 옷자락을 자른 일)을 두드렸다.’이다. ‘마음’으로 옮겨진 히브리어 ‘르밥’은 인간의 판단과 결정이 이루어지는 자리이다.(〈빛〉잡지 1월호 참조) ‘마음을 본다.’(16,7)고 하신 주님이 다윗을 선택하신 것은 그가 주님 뜻에 민감하게 분별하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건네시는 말씀은 귀로 듣는 물리적 소리가 아니라 ‘마음에 대고 하시는 소리 없는 말씀’이기에 순종하는 마음일 때 알아들을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는 이 소리를 감지하고 부하들을 꾸짖으며 자신의 행동을 바로 잡는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24,7) 그러고 나서 다윗은 사울의 뒤에 대고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하고 불러 세운 후 직접 대면한다. 사울이 돌아보자,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을 함으로써 신하로서 예를 갖춘 후 다음과 같이 분명하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오늘 주님께서는 동굴에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임금님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니 나의 주군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살려 드렸습니다. 아버님, 잘 보십시오. 여기 제 손에 아버님의 겉옷 자락이 있습니다. 저는 겉옷 자락만 자르고 임금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임금님을 해치거나 배반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고 살펴주십시오. 제가 임금님께 죄짓지 않았는데도, 임금님께서는 제 목숨을 빼앗으려고 찾아다니십니다. 주님께서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시어, 제가 임금님께 당하는 이 억울함을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24,11-13) 사울은 다윗에게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 ‘나의 주군’, ‘아버님’으로 불리고 있다. 하느님과 다윗, 그리고 사울의 관계는 이 호칭들을 통해 일정한 질서를 드러낸다. 하느님께서 사울을 임금으로 세우셨고, 다윗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울의 신하이자 사위라는 인식이다. 사울의 목숨과 인생 전체는 언제나 하느님께 속해 있다. 어떤 이유로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사를 함부로 좌우할 수 없는 이유다. 사울의 행동이 얼마나 부당하든 다윗은 하느님께 속한 권한을 넘어서지 않는다. 다윗은 억울하다. 그러나 다윗이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를 활용하는 인간적 방식이 아니다. 그는 ‘내 손으로 세우는 정의’를 거절하고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질 의로움을 선택한다. 다윗의 단호한 선택이 담긴 마지막 말 “그러나 제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24,13)라는 표현에서 하느님 안에 확고히 서 있는 한 인물의 견고함이 느껴진다. 사울의 목숨을 살려준 다윗의 관용은 그 인물됨의 탁월함을 드러낸다. 마침내 사울은 다윗을 ‘내 아들 다윗아,’(24,17)라고 부르며 그가 임금의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주셨는데도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네가 얼마나 나에게 잘해 주었는지 오늘 보여 준 것이다. 누가 자기 원수를 찾아 놓고 무사히 제 갈 길로 돌려보내겠느냐?…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24,18-21) 하느님이 다윗과 함께해 주시는 것은 다윗의 선택이 하느님의 뜻과 같은 방향에 놓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면 그분을 닮게 된다. 그분께서 나를 대하시는 그 방식으로 다른 이를 대하게 되고, 내 삶의 구체적인 현실 안에 그분의 숨결이 흘러나온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어쩌면 일생을 통해 조금씩 완성해 나가야 하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한다면 다윗이 들었던 사울의 겸손한 고백을 듣게 되지 않을까?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24,18) [월간빛, 2023년 5월호, 송미경 베로니카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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