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되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예수님의 귀중한 가르침이 마태 5,1-7,29와 루카 6,20-49에 실려 있는데 전자는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마태 5,1) 가르치셨다 하여 산상설교라 하고, 후자는 ‘평지에서’(루카 6,17) 가르치셨다 하여 평지설교라 부릅니다. 산상설교는 예수님 가르침의 백미요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으로 여기에서 우리는 ‘행복선언’(5,3-12), ‘대립명제’(5,21-48), ‘주님의 기도’(6,9-13), ‘황금률’(7,12) 등 예수님의 주옥같은 가르침들을 만나게 됩니다. 마태오의 산상설교와 루카의 평지설교는 ‘행복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한 맺힌 갈릴래아 민초들이 지금은 비록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프지만 가까운 장래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면 그 나라를 차지하고 배부르게 되며 환히 웃게 될 것이므로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코 가난하고 굶주리고 서러운 까닭에 행복하다는 역설적인 진리가 아니라 비록 현실은 비참하지만 밝아오는 미래가 있기에 행복하다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행복선언을 소개하면서 행복의 수를 아홉으로 늘렸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각색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깨끗한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면 사람들이 오해할 것 같아서 ‘마음이’(5,3.8) ‘의로움에’(5,6.10)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여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고쳐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에 들어 있는 아홉 가지 행복 선언 중에서 첫 번째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이 늘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우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틀린 번역으로 그리스어 원문에는 ‘마음이’가 아니라 ‘영(靈)으로’입니다. 여기서 ‘영’은 하느님의 영이 아니라 인간의 영을 뜻합니다. 그리고 ‘영으로’는 그리스어 원문에는 ‘주격’이 아니라 여격으로 나오는데 그리스어 문법에서는 이를 ‘관점의 여격’이라 합니다. 따라서 ‘영으로’라는 말은 다른 조건은 상관하지 말고 오직 ‘영’이라는 관점에서만 어떤 사람을 평가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곧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돈이 많으냐 적으냐, 집안이 유력하냐 보잘것없느냐, 지위가 높으냐 낮으냐 하는 따위는 상관하지 말고 오직 ‘영’이라는 관점에서만 보자는 말입니다. 따라서 3절의 말씀은 “행복하여라, 오직 영이라는 관점에서만 볼 때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을 가리키는지요? 성경에 ‘영’과 ‘가난’이라는 낱말이 자주 나오지만 두 낱말이 함께 붙어 나오는 경우는 오직 이곳뿐이기 때문에 그 뜻을 분명하게 밝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가정생활 사회생활 교회 생활에 있어서 모범적이지만 자신은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항상 노력하는 겸손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여러 면에서 성실하지 못한데 자신은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으쓱거리며 사는 이들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참다운 신앙인보다는 부실한 신앙인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유는 아직도 영으로 가난한 신앙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잘난 사람, 유능한 사람들보다 묵묵히 복음을 익히고 실천하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곧 겸손한 이들을 더 많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2023년 10월 29일(가해) 연중 제30주일 원주주보 들빛 4면, 유충희 대철베드로 신부(둔내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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