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일곱 교회에 보내진 사랑의 편지(묵시 2-3장) 살아가는 데 있어 유일한 정답은 없다. 저마다 삶의 관점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처한 상황에 따라 그 관점 역시 늘 변화하기 마련이니까. 간혹 삶이 휘청이거나 아슬아슬할 때 혼자 고민하며 성경을 펼칠 때가 있다. 성경의 몇몇 구절에서 위안을 얻고 참된 삶의 방향을 다시 설계해 보기도 한다. 대개는 성경을 통한 제 삶의 미래가 보다 숭고하고 아름답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다시 살아본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요한 묵시록이 소개하는 일곱 교회의 편지들 역시 서로 다른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고 그분을 살아내는 길이 무엇인지 묻고 답한다. 각각의 편지 서두엔 묵시 1장에 소개된 사람의 아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등장한다. 묵시 1,16에 일곱 별을 쥐고 있는 이로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일곱 교회의 주도권을 가진 예수님으로 해석된다. 주목할 것은 사람의 아들이 특정적이고 유일한 이미지가 아니라 일곱 교회의 구체적 모습이나 각각의 편지가 전하는 메시지에 부합하는 이미지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가령,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메시지를 담은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람의 아들은 지도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묵시 2,1) 페르가몬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진 이로 사람의 아들이 소개된다.(묵시 2,12) 페르가몬은 가파른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도시의 이미지를 사람의 아들의 모습과 연계하여 묘사한 듯하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묵시 3,1)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사르디스에 보내진 편지는 17년 어느 날 밤 사르디스에 닥친 크나큰 지진의 재앙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한 분이시되, 그분을 따르는 신앙 공동체는 사람의 아들을 자신에게 익숙한 이미지로 각색하여 만나고 있다. 요한계문헌의 핵심이 육화 사상에 있다면 사람의 아들은 고유한 삶의 자리에 고유한 방식으로 서로 다르게 해석되어 육화하고 있는 셈이다. 요한 묵시록의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꽤나 성공한 도시들 안에 위치한다. 일곱 교회는 상업적 왕래가 잦은 중심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신앙 공동체 간의 연락 또한 용이했으리라. 그래서인지 일곱 교회의 편지는 그 형식에 있어 서로 대동소이한 모습을 띈다. 일곱 개의 편지는 회개를 중심으로 짜여진다.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 특정 교회의 현실에 대해 언급하고 부족한 것을 되돌아 보게함으로써 다시 회개하길 촉구한다. 회개하는 이를 이른바 ‘승리하는 사람’이라 일컫고 그들에겐 갖가지 선물이 주어지는 것으로 일곱 편지들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편지마다 반복되는 구절, 그러니까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라는 구절은 편지의 메시지가 소아시아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여러 교회’로 번역한 것은 다소 아쉽다. 그리스어 본문에는 지시대명사가 쓰여 ‘일곱’ 교회를 구체적으로 지칭한다. 다시 고쳐 번역하자면 ‘그 일곱 교회들’이 맞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보편적이고 완전한 가치를 담고 있어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는 시,공간을 초월한 모든 교회에 보내진 것으로 해석된다. 일곱 개의 편지 모두 2000년 전 기록이지만 오늘, 그리고 내일 역사를 살아가는 모든 교회에게 보내진 예수님의 당부가 된다. 일곱 편지가 말하는 회개는 무엇일까. 에페소에 보내진 편지는 회개에 대한 단상을 사랑의 이름으로 정리한다. 이를테면 회개는 자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방향지워진다.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비판하는 에페소의 편지는 사랑의 걸림돌로 니콜라오스파의 소행을 문제 삼는다. 사도행전에 니콜라오스는 일곱 부제 중 한 분으로 소개되는데, 교부들의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니콜라오스를 중심으로 한 신앙인의 무리가 있었고 그 무리는 혼잡한 세상에서 정갈하고 모범적인 신앙인의 삶을 갈구하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보다 훌륭한 신앙 공동체가 기대되는 엄격한 신앙 생활은 불행히도 다른 형제들을 비난하는 잣대가 되어 공동체 내부를 휘젓고 친교와 조화를 살아가야 할 사랑의 공동체는 분열의 자리가 되어 버린다. 사랑과 일치를 강조하는 요한 복음, 나아가 요한계문헌이 쓰여진 이유를 이러한 공동체 분열에서 찾는 학자들이 많다. 에페소의 편지는 놀랍게도 니콜라오스의 소행에 대해 예수님의 1인칭 화법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너에게 좋은 점도 있다. 네가 니콜라오스파의 소행을 싫어한다는 것이 나도 그것을 싫어한다.”(묵시 2,6) 본디 모든 이단과 사이비 종교는 ‘선민의식’을 제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다. 다른 이와 다르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이 가지지 못하는 은총과 특혜를 우리만이 누린다,는 식이 그렇다. 신앙 생활은 수련을 통한 제 삶의 안위나 올바름을 견지하는 데 있지 않다. 에페소 교회에 보내진 편지의 끝에 ‘승리하는 이’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묵시 2,7) 하느님처럼 되고픈 순수한 열정과 바람을 원죄의 이름으로 처리해 버리는 에덴 동산의 이야기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생명 나무 열매는 하느님과의 친교, 나아가 모든 피조물과의 조화를 살아가는 에덴 동산의 유일한 규칙이자 원리의 메타포다. 이를테면, 친교는 획일적 하나가 아니라 다름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전제한다는 것. 다름에 대한 이해없는 친교는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바벨탑의 횡포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굳이 하나로 만들어 집단의 통일을 이뤄내는 식의 신앙은 참 슬프거나 지루한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리지 않는가. 본디 태고적 우리 인간은 선과 악의 이원론을 도무지 몰랐고, 조화와 연대를 제 삶의 근본으로 살아내었다. 서로에겐 그저 ‘알맞은 협력자’(창세 2,18)였을 뿐이었고 그땐 사랑만 있었다. 거기엔 옳고 그름으로 따지는 잣대도, 보다 나은 내일도 없으며,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도덕군자의 가르침도 필요 없었다. 에페소에 건네진 편지는 그래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한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 2,4-5) 첫사랑. 그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서로가 달라서 겪고야 마는 갈등과 다툼, 대립과 반목, 그럼에도 기쁨과 행복, 감사와 감동이 중첩된 삶의 희로애락을 모조리 품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 사랑이라면 사랑으로 품지 못할 것이 없다. 얼룩이 묻어 더럽더라도 제 자식이고 제 형제고 자매면 아름답게 보이는 게 사랑이니까. 회개는 사랑이다. [월간 빛, 2024년 4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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