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제물의 종류가 많은데, 어떻게 다른지요?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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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윤희 | 작성일2020-05-10 | 조회수3,323 | 추천수0 | 신고 |
홍승모 신부님께서 가톨릭 평화방송에서 강연하실때 교재원고를 올리신게 있어서 공유합니다. 저도 레위기를 읽다보니 궁금한게 많았는데요, 다행히 자료가 있어 너무 감사했네요
제13회 방송분 교재 원고 레위기의 주요 신학적 주제들 1 1. 희생제물 1) 서원예물 서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드리는 예물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자신이나 자식들이나 자신의 권한에 속한 사람들을 하느님께 서원했다. 또는 몇몇 짐승들이나 자기 소유의 집이나 밭과 같은 토지의 일부를 하느님께 봉헌하기도 했다. 이런 서원예물들은 희생제물로 봉헌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다. 고대 종교 의식에는 사람을 신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었고 이스라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판관 11,30에 나오는 판관 입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때에 입타는 주님께 서원을 하였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제가 암몬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판관 11,30-31). 그러나 이러한 종교 관습은 율법에서는 금지되었고 예언자들의 비판을 받게 된다(레위 18,21; 예레 7,31이하; 에제 16,20-21). 짐승들도 예물에 모두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부동산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 소유가 성전이나 사제들에게 양도될 수는 없었다. 이런 것들은 하느님께 거룩한 것으로 봉헌할 필요성을 느낀 한 개인이 속한 부족의 소유로 남겨져야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레위 27장에 따르면 서원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은 성소 세겔로 값을 매겼다. 무게단위로 볼 경우 1세겔은 약 11.4그램이었고 화폐단위일 경우에 1세겔은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값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봉헌하려는 대상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화폐를 성전에 바쳤던 것이다. 이런 예물규정들은 경솔한 서원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짐승의 맏배의 경우에 이미 모든 맏배는 하느님의 소유이기에 봉헌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 값에 해당하는 성소 세겔로 봉헌되었다(레위 27,26-27). 또한 땅, 곡식, 과일, 가축 등과 같은 생산물의 십분의 일은 하느님께 바쳐진 거룩한 것이기에 서원예물로 봉헌할 수 없었다.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다. 누가 그 십분의 일을 되사고자 하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 보태야 한다. 큰 가축과 작은 가축의 십분의 일, 곧 지팡이 밑으로 지나가게 하여 골라낸 모든 가축의 십분의 일은 주님에게 바쳐진 거룩한 것이 된다”(레위 27,30-32). 2) 희생제물 희생제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이스라엘 경신례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다. 이 제사는 거룩한 장소(聖所)면 어디에서든지 행해졌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경 요시아 왕의 개혁 초기부터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시행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제사가 봉헌되었다(탈출 29,38-42). 여기서 십분의 일 에바는 약 4,5리터이며 1힌은 약 7,5리터에 해당하는 양이다. 날마다 바치는 제물에 대한 이런 규정은 바빌론 유배기간이나 유배이후 사제계 학파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루살렘이나 그밖에 다른 성소에서 바쳐진 이 제물의 초기 규정이나 성격을 정확히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히브리어에서는 희생제사와 제물의 의미가 서로 구별되어 고정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희생제사와 제물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제물로 표현되는 의미가 더 강하다. 일반적으로 희생제사는 공동체의 개별 구성원과 그를 둘러싼 환경에 따라 그 목적이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희생제사의 공통적인 요소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에서 발생되는 폭력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의 악순환이란 넓은 의미에서 한 개인이나 집단이 행한 그릇된 행위로 인한 반작용, 곧 복수와 그에 따른 또 다른 복수의 악순환을 의미한다. 이것을 막기 위해 희생제사의 제물봉헌과 그 제물에 대한 심판구조라는 2가지 원리가 행해져 왔다. 여기서 심판구조란 제물을 받아들이는 주체이신 하느님께 합당한 제물인지의 여부를 뜻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분노를 가라앉히는 기능을 갖고 있다. 다신주의에 입각한 가나안의 경신례는 희생제사와 제물의 이름으로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많은 이탈과 남용 비윤리적인 일들이 행해졌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유일신 사상에 입각한 희생제사를 통해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종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희생제사는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 하느님과의 통교, 하느님께 청하는 속죄라는 3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레위기 1-7장에 종합적으로 기술된 희생제사의 제물에서 이 3가지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번제물(레위 1,1-17)과 곡식제물(레위 2,1-16)과 맏물 봉헌(레위 27,26-27)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 친교제물(레위 3,1-17)은 하느님과의 통교, 그리고 속죄제물(레위 4,1-5,13)과 보상제물(레위 5,14-26)은 하느님께 청하는 속죄를 위한 것이다. 나머지 레위 6,1-7,38은 사제들이 제사와 거기에 따른 다양한 제물을 어떻게 전례적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희생제사가 지니는 이러한 기능은 제물보다는 하느님과의 통교와 속죄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이런 이유로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의 본래적 의미를 되찾으려고 비판의 일성을 드높였던 것이다. 의롭고 흠 없는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외적(경신례) 및 내적(정의의 실현)인 모든 쇄신을 말한다. 그러기에 말라 1,10에서는 정의가 없는 제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성전 문을 닫아걸어서 너희가 내 제단에 헛되이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였으면 좋겠다. 나는 너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너희 손이 바치는 제물을 받지 않으리라”. 하느님은 통교와 속죄를 통해 당신 정의를 사회 속에 실현하여 현재의 그릇된 현실을 변화시키는 내적인 쇄신이 병행되는 제물을 원하시는 것이다. 3) 번제물 레위 1,1-17에서는 번제물에 관한 규정을 언급하고 있다. 번제는 가장 장엄하고 공적이며 대중적인 일반 제사이다. 번제는 문자 그대로 불사르는 뜻의 번(燔)자로, 바쳐질 짐승의 가죽만 빼고 짐승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바치는 제사이다.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 용어는 올라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그 이유는 짐승의 고기를 불사를 때에 나는 연기와 냄새가 하느님께 올라가 주님을 위한 향기로운 제물이 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론 사제의 아들들은 제단에 불을 피우고, 그 불에 장작을 얹어놓는다. 아론의 아들인 사제들은 각을 뜬 고기와 머리와 지방을 제단의 불에 얹은 장작 위에 차려 놓는다. 제물을 바치는 이가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놓으면, 사제는 그것을 모두 제단 위에서 번제물, 곧 주님을 위한 향기로운 화제물로 살라 바친다”(레위 1,7-9). 화제물은 일반적으로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 모두를 가리키는 반면, 번제물은 짐승만을 가리키는 차이가 있다. 번제물로 잡을 짐승은 주로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이 없는 수컷(레위 1,3.10)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레위 1,14) 같은 날짐승이 해당되었다. 짐승들은 하느님께 호의로 받아들여지도록 가장 좋은 것으로 흠이 없어야만 했다(레위 1,3). 짐승의 피는 만남의 천막 어귀에 있는 제단 주위에 뿌렸다(레위 1,5). 사제계 전승에 따르면 피는 생명과 연관되어 있기에 세속적인 사용을 금지하고 속죄예식에만 사용되고 있다(레위 17,10이하). 가죽은 규정(레위 7,8)에 따라 사제의 몫으로 돌아갔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번제물로 바친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레위 1,4). 손을 얹는 목적은 인간의 죄를 제물에게 넘기려는 의미가 아니라, 제물과 봉헌자 사이의 일치의 의미, 곧 봉헌자가 제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뜻이다. 인간의 죄를 제물에게 넘긴다면, 죄를 뒤집어 쓴 흠 있는 그 제물을 먹거나 하느님께 바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징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치는 봉헌자의 제물은 실제로 하느님께 예물이 되는 것이다. 4) 곡식제물 번제물이 주로 소나 양이나 염소 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같은 짐승을 제단 위에서 불로 살라 바치는 화제물이라면, 곡식제물은 말 그대로 동물 이외의 제물을 뜻한다. 레위 2,2에 따르면, 사제는 고운 곡식가루와 기름을 한 손 가득 퍼내어, 유향 전부와 함께 기념제물로 제단 위에서 살라 연기로 바쳤다. 여기서 기념제물이란 곡식제물 가운데에서 향과 함께 또는 향 없이 불에 살라 바치는 부분을 가리킨다. 이러한 기념의식의 목적은 예물 전체를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여 그 제물을 봉헌하는 봉헌자를 자비롭게 기억하시고 마음에 드시게 하는 데 있다. 곡식제물의 재료는 고운 곡식가루에 기름을 섞어 누룩 없이 반죽하여 만든 과자나, 기름을 부어 누룩 없이 반죽하여 만든 부꾸미(전병)를 사용했다(레위 2,4). 레위 2,11에서는 어떤 누룩이나 어떤 꿀도 화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누룩이나 꿀의 사용을 금한 이유는 일종의 발효작용을 통해 곡식제물이 부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 생각된다. 또 다른 이유는 아모스 예언서에 나타나듯이 누룩 든 빵을 바치던 가나안 전례의식의 침투를 막고 차별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아모 4,5). 곡식제물이 부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으로 소금을 사용하기도 했다(레위 2,13). 곡식제물 규정과 병행구절인 민수 15,3-12에 따르면 포도주를 제주로 하느님께 드렸다는 언급이 있지만 레위기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아마도 술에 취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그릇된 남용과 제물의 세속화라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듯싶다. 성서에서 소금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들 중에 하나이기도 하며(집회 39,26) 불모의 상징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신명 29,22; 판관 9,45). 율법 규정에서 소금은 누룩이나 꿀과는 반대로 정화하고 보존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2열왕 2,21). 소금은 음식의 맛을 항구히 보존하다는 의미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영원한 계약을 가리키기도 한다(민수 18,19). 5) 친교제물 친교제물은 소나 양이나 염소의 굳기름만을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다(레위 3,2-5.9-11.14-16). 친교제물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었다(창세 4,3-4). 나머지는 사제와 봉헌한 사람과 가족과 친척 그리고 거룩한 잔치에 초대되어 참여한 공동체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성소에서 일정한 기간 내에 친교제물로 바쳐진 부분 이외의 나머지를 함께 먹었다. 이러한 친교제물은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공동체의 축제나 삶과 깊은 관련이 있기에 화목제물이라고도 한다. 레위 7,11-17에서는 예식보다는 봉헌자가 어떤 의향을 갖고 제물을 바치는가에 따라 일반적으로 감사제물, 서원제물, 자원제물로 구분하고 있다(레위 7,11-12.15-17). 잔치에 초대된 공동체 구성원들은 하느님 앞에서 화목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그 이유는 친교제물을 통해 하느님께 받은 호의와 은혜에 대한 기쁨의 감사와 찬양이 거룩한 공동체의 잔치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던 것이다. 신명기 법전의 율법 규정에서는 이러한 화목제물이 상속재산이나 공동체의 권익을 누리지 못했던 가난한 이들에게까지도 사랑의 연대감으로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신명 12,17-18: 16,10-11). 먹거리뿐 아니라 기쁨을 함께 나누었던 이러한 화목제물의 규정 속에서 우리는 사도 2,46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다(사도 2,46-47). 초대교회 공동체가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떼고 음식을 함께 먹었던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파스카 사건을 기억하고 지속하는 성찬례에 대한 특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이 식탁 공동체의 일부분으로 공동체에서 소외당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루에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형제애의 표본이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6) 속죄제물 레위 4,1-35에서는 속죄제물의 예식에 관한 4가지 형태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대사제의 속죄제물(레위 4,3-12), 둘째는 회중의 속죄제물(레위 4,13-21), 셋째는 왕권을 상실한 유다의 수장 또는 부족의 수장의 속죄제물(레위 4,22-26), 마지막으로 일반인의 속죄제물(레위 4,27-35)이다. 일반적으로 대사제와 회중의 속죄제물은 황소이다(레위 4,3). 반면에 수장과 일반인의 속죄제물은 염소이다(레위 4,22-24). 그러나 일반인의 경우에는 흠 없는 암컷 양도 가능했다(레위 4,32-33). 같은 사제계(P) 학파에 의해 기록된 민수 15,24-29에도 이와 같은 속죄제물에 대한 규정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속죄제물의 예식에 관하여 공동체와 개인이라는 2가지 범주에서만 분류되어 있다(민수 15,24.27). 첫 사제들의 임직식에서 모세에 의해 바쳐진 속죄제물을 언급하는 레위 8,14과 사제 아론에 의해 바쳐진 속죄제물을 언급하고 있는 9,8을 보면 사제계 학파는 아마도 민수 15,24-29의 규정을 확대해서 레위 4,1-35에 기록한 것 같다. 속죄제사의 특징 중에 하나는 죄를 지은 자가 속죄제물로 사용되는 황소나 염소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다음, 주님 앞에서 속죄제물을 잡는 것이다. 그러나 회중의 경우에는 회중, 곧 공동체의 원로들이 주님 앞에서 제물로 사용된 황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나서 황소를 잡았다(레위 4,15). 또 다른 특징은 대사제와 회중의 경우에 기름부음 받은 사제가 제물로 사용된 황소의 피를 만남의 천막으로 들어가서 손가락에 찍어 성소의 휘장 앞면에 일곱 번 뿌리고, 나머지 피는 제단의 뿔들에 바르고, 그 나머지 피는 모두 만남의 천막 어귀에 있는 번제제단 밑바닥에 쏟아 부었다(레위 4,5-7.16-18). 수장과 일반인의 경우에는 만남의 천막으로 들어가서 손가락에 찍어 성소의 휘장 앞면에 일곱 번 뿌리는 예식을 제외하고는 대사제와 회중의 경우와 동일하다(레위 4,25.30.34). 속죄제물은 제물의 굳기름과 피는 다르게 처리되고 나머지는 성전 외부에서 태워진다는 점에서 번제물과는 구별된다. 속죄제물은 일반적으로 7단계, 곧 1) 짐승을 속죄제물로 봉헌 2)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음 3) 제물의 도살 4) 피의 예식 5) 굳기름을 모두 들어냄 6) 굳기름을 살라 바침 7) 제물의 나머지 부분의 처리하는 7단계 예식을 거쳤다. 가난한 이들의 경우에는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와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치거나, 또는 고운 곡식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속죄제물로 바쳤다(레위 5,7-13). 이것은 속죄제물을 통한 죄의 정화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레위 5,1-4에서는 속죄제물을 바쳐야 하는 구체적인 4가지 경우를 나열하고 있다. 이 4가지 사례는 레위 4장에서 언급된 사례와는 다르다. 레위 4장에 언급된 속죄제물을 바쳐야 할 죄들은 고의적이나 의도적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시한다. 이 4가지 사례는 실수나 부주의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레위 5,1-4에 언급된 속죄제물을 바쳐야 할 죄들은 고의적인 죄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분명 경고와 세심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1)의 경우는 법정에서 마땅히 증언해야 할 진술을, 그로 인해 곤경에 빠지고 싶지 않거나, 또는 어떤 난처한 입장을 피하기 위해, 거부하는 행위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을 탈출기와 신명기에서 볼 수 있다(출애 23,1-2; 신명 19,15-19). 탈출기나 신명기에 언급된 구절은 거짓 증언과 관련된 법 규정들이다. 그러나 레위기에 언급된 1)의 경우는 거짓 증언과 같이 엄중한 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범인을 법정에 고발해야 하는 증인이 법정 진술을 회피해 고발하지 않는 경우는 거짓 증언에 해당하는 죄와는 구별된다. 4)의 경우도 증언과 관련하여 해야만 하는 말을 무지로 하지 않거나 말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우이지만 거짓 증언에 해당하는 죄와는 구별된다. 1)과 4)경우는 단순히 법정 증언에 대한 호출을 거부한다고 해서, 또는 증언과 관련하여 해야만 하는 말을 고의로 하지 않거나 말로 책임을 회피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 않기에 증언하기를 꺼려하는 곤란한 상황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의도와 경고가 깔려 있다. 또한 의도적인 죄는 아니지만 이 죄 역시 공동체가 준수해야 할 진리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따르지 않는 것이기에 속죄제물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 것이다. 2)와 3)의 경우는 레위 11-15장에 나오는 정결과 부정에 대한 법 규정들과 관련이 있다. 이 경우 거룩한 공동체의 법 규정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경신례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기에 자신을 정결케 함으로써 부정을 벗어야 했다. 분명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정결의 의미가 독신과 같은 순수함이나 공기와 물과 같은 물질의 맑고 깨끗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결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세속적인 것과 접촉으로 인해 더럽혀지는 부정한 것과 구별되어 나타난다. 레위기에서의 정결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오염시키거나 생명(피)을 위협하는 모든 위협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순수하게 보호하려는 배려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이다. 레위 5,5-6에서는 속죄제물의 결론을 담고 있다. 여기서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사제 앞에서 단순히 죄를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의 기도에서 나타나듯이 죄의 고백을 포함한 하느님을 향한 기도를 뜻한다(느헤 1,6). 7) 보상제물 레위 5,14-26에는 보상제물에 관한 규정이 언급되고 있다. 보상제물의 예식은 레위 7,1-6에 명시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보상제물의 예식은 속죄제물의 7단계 예식, 곧 1) 짐승을 속죄제물로 봉헌 2)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음 3) 제물의 도살 4) 피의 예식 5) 굳기름을 모두 들어냄 6) 굳기름을 살라 바침 7) 제물의 나머지 부분의 처리 중에서 1)과 2)의 예식 부분만 결여되어 있고 나머지는 동일하다. 그러나 제물의 나머지 부분의 처리는 속죄제물과 보상제물의 규정이 서로 차이가 있다(레위 7,6: 6,19-23). 일반적으로 두 제물의 고기는 사제가 먹을 수 있었지만, 단지 속죄예식을 거행하기 위한 죄가 포함되지 않은 제물이거나 피를 만남의 천막 안으로 가져오지 않은 제물에 한에서이다. 마지막 경우에는 만남의 천막 밖에서 불에 태워버려야 했다. 이 규정은 레위 10,18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보상제물의 특징은 보상에 있다. 보상제물은 저질러진 잘못에 대한 보상으로 본래 값의 오분의 일을 더한 값이 바쳐진다(레위 5,16.24). 또 다른 특징은 하느님을 거슬리는 직접적인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레위 5,19). 죄의 종류는 아마도 경신례와 관련된 거룩한 물건들에 대한 그릇된 사용(레위 5,20-23: 위탁물, 담보물, 약탈물, 분실물)이나 또는 거짓 맹세로 주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레위 5,24)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 레위 1-5장이 각 제물에 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정들이라면, 레위 6-7장은 사제들이 준수해야 할 규정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 규정들이 뜻하는 본래 의미에는 희생제사로 바쳐지는 제물이 지니는 거룩함에 대해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제물들은 거룩하신 하느님께 바쳐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특히 유배 이후, 신앙을 자각한 공동체의 의식 속에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바로 거룩함 자체이신 하느님과 그분께 드리는 경신례의 거룩함에 기초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번제물이나 친교제물을 바칠 경우에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어야 한다는 규정(레위 6,2.5.6)에는 이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제단 위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은 레위 24,1-4에 언급되고 있는 성소의 등불을 떠오르게 한다(레위 24,1-4). 이렇게 제단 위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은 하느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끊임없는 기도를 상징하며 동시에 출애급 당시 광야의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던 불기둥 같이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이다(탈출 13,21-22). 살라 바치는 제물에서 나는 향이나 연기도(레위 6,8.15) 보이지 않지만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상징한다(탈출 19,9). 불기둥처럼 구름기둥은 감추어진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며 전례 예식 안에서 유향의 연기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어야 한다는 규정은 보이지 않지만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부정하지 않고 거룩하게 정화되어야 할 필요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제물을 태우고 남은 재를 치우고 사제들이 옷을 갈아입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레위 6,3-4). 또 다른 의미는 하루에 두 번 바치는 희생제사가 매일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탈출 29,38-39). 그 이유는 제사를 통해 하느님과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통교와 축복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이다(탈출 29,43-46). 제물의 나머지 일부는 사제들의 몫으로 돌아갔다(레위 6,10.22: 7,6). 그러나 성전이나(에제 42,13) 만남의 천막 뜰이나(레위 6,9) 제단 곁(레위 10,12)과 같은 거룩한 장소에서 먹어야 했다. 그 이유는 거룩함을 존중하고 보호하려는 데 있는 것 같다. 레위 7,7-10에 언급된 사제의 몫은 후기에 편집된 것으로 보이며 거룩함 보다는 사제에게 돌아갈 배당, 곧 번제물의 가죽과 곡식제물 일부에 대해 정확히 언급하고 있다. 2. 사제직 설정에 관한 규정 우리는 지금까지 서원예물과 희생제물 규정이라는 제목 하에서 레위 1-7장에 나타난 서원예물, 희생제물, 번제물, 곡식제물, 친교제물, 속죄제물, 보상제물의 규정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레위 8,1-10,20에서는 사제직 설정에 관한 규정들을 언급하고 있다. 사제들의 임직식을 언급하는 레위 8장은 탈출 29장의 사제 임직식과 탈출 40장의 성막 봉헌과 연결되어 있다. 사제 임직 예식은 11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사제 임직식에 필요한 재료 준비(레위 8,2-3). 2) 회중을 불러 모음(레위 8,3). 3) 물로 씻김(레위 8,6). 4) 아론에게 예복을 입힘(레위 8,7-9). 5) 성막과 제단을 도유(레위 8,10-11). 6) 아론을 도유(레위 8,12). 7) 아론의 아들들에게 예복을 입힘(레위 8,13). 8) 속죄제물 봉헌(레위 8,14-17). 9) 번제물 봉헌(레위 8,18-21). 10) 임직식제물(친교제물)과 흔들어 바치는 예물 봉헌(레위 8,22-29). 11) 성별 예식(레위 8,30). 위에 언급한 사제 임직식 절차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에서 7)항 까지는 성별 준비과정이며 8)에서 11)항까지는 제물 봉헌과 관련이 있다. 곧 사제 임직 예식은 하느님께 드리는 거룩한 경신례 예식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제 임직식이 거룩함과 관련된 정화의 예식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제 임직식에서 봉헌된 고기와 빵은 만남의 천막 어귀에서 사제만이 먹을 수 있었다(레위 8,31).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태워 버렸다(레위 8,32). 사제만이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봉헌될 예물에 손을 얹었다는 표현처럼(레위 8,22), 바로 사제들의 예물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일반 백성들은 이런 특별한 정화 예식의 절차를 거쳐 축성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곧 사제 축성이 거룩함과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제들만이 먹을 수 있었던 축성된 빵에 대한 내용과 병행구인 레위 24,8-9절에 따르면, 하느님께 화제물로 바쳐진 빵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장소에서 오직 사제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몫으로 돌아가야만 했다(1사무 21,4-7). 3. 하느님의 영광 이제 9장에서는 아론이 속죄제물과 번제물과 친교제물을 바치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제물을 바치는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가시적 징표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다(레위 9,4ㄱ-7). 사제 아론이 백성들을 위해 속죄제물과 번제물과 친교제물을 바치고 속죄예식을 거행한 다음, 백성들을 축복 한 후에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레위 9,22-24). 주님의 영광은 레위기에서 규정하고 있는 경신례의 가장 중심에 있다. 하느님의 영광은 공동체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의 가장 거룩한 현현이다. 레위기를 저술한 사제계 전승에게 하느님의 영광은 출애급 체험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하느님의 영광이란 용어가 실제로 제일 먼저 나타나는 구절은 갈대 바다의 횡단과 관련된 말씀이다(탈출 14,4.17-18). 하느님의 영광은 출애급 광야의 여정에서 만나와 같은 은총과 구름에서 드러난다(탈출 16,7.10). 하느님의 영광은 모세가 율법과 계명을 받았던 시나이 산에서 장관을 이루며 레위 9,24에 언급된 타오르는 불도 시나이 산의 하느님의 현현을 기억하게 한다(탈출 24,16이하). 레위 9,6과 23에서 속죄예식을 거행하는 만남의 천막에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인 만남의 천막은 하느님의 현존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가시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출애급 과정에서 야훼 하느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하셨다는 사실은 구원 역사, 곧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느님은 인간과 통교하시기를 바라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일정한 시기와 거룩한 장소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은 현실화되었고 그 만남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신앙은 정화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레위 10장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과 관련하여 사제들이 치러야 할 죄인들의 장례식과 사제직에 관한 몇 가지 규정들을 언급하고 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느님께 벌을 받아 죽은 이유를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저마다 제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불을 담고 향을 놓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과는 다른 속된 불을 주님 앞에 피워 바친 것이다”(레위 10,1)라고 설명하고 있다. 향은 번제물 제단에서 타오르는 숯을 가져다가 분향제단에서 잘 준비하여 피우게 되어 있다(탈출 30,27: 30,34-38; 레위 4,7). 나답과 아비후는 아마도 이 규정을 어긴 것이 아닌가 보는 견해가 있다. 곧 예레 1,16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다른 이방 신들을 위해 향을 피웠거나, 또는 영원히 타올라야 할 제단의 불을 꺼뜨렸거나(레위 6,1-6) 또는 제단이 아닌 다른 외부의 장소에서 불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본다(말라 1,10 참조).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을 종합해 보면 결국 “주님께서 나에게 가까이 있는 이들을 통하여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나의 온 백성 앞에 나의 영광을 나타내겠다”(레위 10,3)라는 언급처럼, 하느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제직무와 관련된 이러한 거룩함의 신학은 레위 10,10-11에 잘 기술되고 있다. “이는 또한 너희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고, 주님이 모세를 통하여 말한 모든 규정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치게 하려는 것이다”(레위 10,10-11). 이 구절은 후기 사제계 전승의 편집 의도를 잘 전해주고 있다. 사제가 가르쳐야 할 율법의 가르침에는 거룩함과 속됨, 정결과 부정의 의미가 둘 다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사제들은 나의 율법을 짓밟고 나의 거룩한 물건들을 더럽혔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고,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의 차이를 알려 주지 않았으며, 내 안식일에서는 아예 눈을 돌려 버렸다”(에제 22,26). 이 때문에 예언자 에제키엘은 사제직무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속죄예식과 관련된 제물에 관한 규정들의 결론은 레위 10,19에 언급되고 있다. “보십시오, 그들이 바로 오늘 주님 앞에 속죄 제물과 번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치다니요! 내가 오늘 속죄 제물을 먹는다 한들 주님께서 좋게 보아 주시겠습니까?”(레위 10,19). 신명 33,10-11에 언급된 “그는 당신의 법규들을 야곱에게 가르치고 당신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칩니다. 당신 앞에 향을 피워 올리고 당신 제단에서 번제물을 바칩니다. 주님, 그의 힘에 복을 내리시고 그의 손이 하는 일을 기꺼이 받아 주십시오. 그를 반대하는 자들의 허리를 치시고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씀처럼, 사제 직무는 하느님의 마음에 좋게 드시는지가 관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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