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와 함께 떠나는 복음 여행]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마르 11,9)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올리브 산만 넘으면 곧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가시던 길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제자 둘을 뽑아 마을로 들여보내시며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장면을 가만히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귀 주인에게 허락을 맡지도 않고 왜 나귀를 가져가는지 물으면 그저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러는데 곧 이리로 돌려보내신답니다.”(11,3)라고만 대답하라 하시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물건을 빌리고자 할 때, 물건을 돌려주겠다는 보증을 제시하고 또 어느 정도의 값을 제공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주님’이 필요로 하신다고만 말하라고 일러주십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 마을에 들어가지도 않으셨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어린 나귀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여하튼 제자 둘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나귀를 찾아 마을로 들어갑니다. 저 멀리 바깥길 쪽으로 난 문 곁에 정말로 나귀 한 마리가 묶여 있습니다. 두 제자는 놀란 표정을 서로 주고받으며 나귀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묶여 있는 줄을 풀려고 하는데 이를 지켜보던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11,5)라고 따져 묻습니다. 제자들은 스승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그냥 나귀를 가져가도록 내버려둡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렇게 나귀를 끌고 되돌아가려는데 사람들은 제자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예수님께서 나타났다고 고함을 칩니다. 이에 수많은 사람이 쏜살같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군중에 휩쓸려 제자들은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제자들은 스승님이 나귀를 타고 가시도록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나귀에 올라앉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왜 굳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까요? 그 순간 제자들의 뇌리에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는 예언자의 말씀이 스쳐 지나갑니다. ‘아, 예수님은 단순히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 아니시구나. 메시아로서 당신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것이구나.’ 제자들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두려움과 의구심이 사라집니다. ‘보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고 그분을 영접하는 저 놀라운 광경을! 나귀를 데려오라는 명령은 당신이 메시아로서 모든 것을 훤히 아시고 임금님으로서 모든 것을 징발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구나.’ 그러나 사람들의 환호 속에 제자들의 어깨는 들썩입니다. 자신들을 향해 환호하는 백성들의 소리가 그들 안에 헛되고 헛된 믿음만 키워줍니다. 사람들 그리고 그분과 늘 함께했던 제자들. 그들은 진정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예수님이 보여주실 메시아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르코가 묘사하는 이 역설적인 장면을 가슴에 새기며, 이제 주님과 함께 그분이 걸으신 수난과 죽음의 여정으로 다가갑시다. [2024년 8월 18일(나해) 연중 제20주일 서울주보 4면, 이영제 요셉 신부(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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